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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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순교지별로 살펴보는 124위 - 대전교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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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11-02 ㅣ No.734

124위 시복시성 기원 특별기획 - 이슬은 빛이 되어 (12) 순교지별로 살펴보는 124위 - 대전교구 ③


형장으로 가면서도 묵주기도 바쳐

 

 

이국승은 동정을 지키며 교리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포도청으로 압송돼 가는 도중에도 기도를 멈추지 않아 보는 이들을 탄복하게 했다고 전해진다.(탁희성 작)

 

 

공주의 순교자들

 

충청도 음성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 이국승은 장성해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이 새로운 종교를 철저히 배우기 위해 경기도 양근의 권일신을 만났다. 그로부터 교리를 배운 그는 교회의 본분을 즉시 지키기 시작한다.

 

1795년 을묘박해 가운데 체포된 이국승은 형벌을 받던 도중 석방돼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그는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동정을 지키며 살기로 작정한다.

 

부모의 계속되는 혼인요구로 그는 한양으로 이주해 훈장생활을 하며 여러 사람에게 천주교 교리를 전했다. 또 최창현(요한), 정약종(아우구스티노) 등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과 교리를 익혔으며 교회 일을 도왔다.

 

공주 감영터. 충청도 전체를 관할하던 이곳 감영에서 김원중을 비롯한 많은 교우들이 목숨을 잃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이국승은 곧 체포됐다. 포도청으로 압송돼 가는 도중에도 기도를 멈추지 않았던 그는 형조에서 최후의 진술을 한다.

 

“지난 10년 동안 천주교 신앙에 빠져 이미 고질병과 같이 됐으니, 비록 형벌을 받아 죽는다고 할지라도 믿는 마음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일찍이 체포됐을 때는 혹독한 형벌을 이기지 못해서 ‘마음을 바꾸겠다’하고 석방됐지만, 이는 저의 본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이국승은 1801년 7월 충청도 공주로 이송돼 29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충청도 진천 발래기에 살았던 ▲ 김원중은 본래 신덕이 교우들 사이에 잘 알려져 있던 인물이다.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진천 관아에서 발래기 신자들의 소문을 듣고 그곳을 박해했을 때, 그는 ‘천주교를 신봉하는데 어찌 배교 행위를 하겠느냐’면서 관아의 명령에 협조하지 않았다.

 

여사울 성지. 김광옥은 ‘내포의 사제’ 이존창의 출생지인 여사울에 살면서 이존창을 통해 교리를 배웠다.

 

 

1866년 10월, 관아에서는 다시 전갈을 보내 ‘발래기 사람들은 모두 관아에 출두하라’고 명령한다. 이 명령을 들은 그는 교우들에게 말한다.

 

“이제 들어가면 모두 죽게 될 것이다. 그러니 모두 관아로 갈 것이 아니라 죽음을 달게 받을 정도로 신덕이 깊은 사람만 관아로 가자.”

 

진천관아에서는 이들을 가뒀다가 10월 30일 공주로 압송했는데, 그는 이때 아내에게 ‘당부의 말’을 전한다.“우리는 모두 주님께서 창조하신 것이오. 자녀들을 잘 보살피고, 죽으나 사나 주님의 명에 순종하다가 죽은 뒤에 천당에서 만날 수 있도록 합시다. 나는 공덕이 없지만 주님의 도우심만을 믿고 천당에 오르길 바라고 있으니, 이 세상에서는 다시 나를 볼 생각을 하지 마시오.”

 

그 일행이 공주 관아에서 어떠한 형벌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모두 끝까지 신앙을 증거했으며 교수형으로 순교했다는 사실이다.

 

 

예산과 대흥의 순교자들

 

예산에는 ▲ 김광옥(안드레아) 순교자가 60세의 나이로 하느님을 부르며 순교했다.

 

예산 여사울의 면장을 역임하던 그는 50세쯤 됐을 때 같은 곳에 살던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게 교리를 배운 뒤 매일 교우들과 기도를 드리고 금식재를 지키는 등 극기행위를 실천했다.

 

갖은 형벌에도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김정득은 고향인 이곳 대흥 동헌으로 압송되어 참수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성물과 서적만을 지닌 채 자신이 입교시킨 친척 ▲ 김정득(베드로)과 함께 공주 무성산으로 들어가 교리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이미 이름이 알려진 그들은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혹독한 매질과 고문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천주님께 죄를 지을 수 없다’며 천주교 서적을 내놓기를 거부한다. 얼마 후, 감사는 그들을 청주로 이송시켰고 그들은 서로를 권면하면서 형벌과 옥중의 고통을 견디다 다시 한양으로 압송됐다.

 

이후 김광옥과 김정득은 ‘고향인 예산과 대흥으로 압송해 참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고향으로 보내진다. 매질과 고문으로 인해 걸음을 뗄 수조차 없었지만, 하느님이 주신 용기로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그들은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라고 작별인사를 했다고 한다.

 

김광옥은 들것에 실려 예산형장으로 가면서도 묵주기도를 바쳤고, 목침을 가져다 스스로 자신의 머리를 뉘인 다음 두 번째 칼날에 목숨을 바쳤다. 김광옥의 친척 김정득은 예산에서 얼마를 더 간 대흥감옥에 수감돼 읍내로 끌려가 죽음을 맞이했으니 그때가 1801년 8월 25일이었다.

 

[가톨릭신문, 2009년 11월 1일, 오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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