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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청소년에 대한 교회론적 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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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1-06 ㅣ No.28

[성령과 청소년] 성령과 청소년에 대한 교회론적 접근

 

 

성령과 청소년 사이에 어떤 신학적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들 청소년에 대한 교회의 사목적 배려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찰이 본고의 요지이다.

 

청소년 주제를 다루면서 우리는 먼저 두 가지를 전제하기로 한다.

 

첫째, 청소년 주제는 반드시 가정과 사회 전체의 주제와 결부되어 있다. 뚜렷한 경계선을 긋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둘째, 청소년 주제의 주류를 초·중·고등학생들에 초점을 맞춘다. 대학생과 그 이후 시기 그리고 근로 청소년 문제는 전체적인 시각 안에서 유추될 수 있다.

 

 

1. 교회의 성령론적 원천

 

우리가 교회 안에 성령에 대해 말할 때 출발점은 사도행전 2장이다. 사도행전은 교회의 성령론적 원천을 전하고 있다. 세계 각 지역에서 모인 유다인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도들의 증인들이다. 세계 각국에서 온 이 사람들은 이미 이방 백성들의 모임을 상징하고 있다. 성령강림은 모든 시대와 모든 백성에게 무엇이 교회인지를 미리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주님의 재림 때까지 성령의 선물과 선교로의 부름, 이 두 가지 요청이 필연적이다.

 

스승 예수님께서 로마 제국과 헤로데를 물리치시고 이 세상에 하느님 왕국을 세우시어 왕이 되시리라고 믿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무력한 죽음 앞에 실의와 절망에 빠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언제 잡혀 죽을지도 모를 두려움에 방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서 절망과 허탈에 빠져 있었다. 이때 스승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신 것이다. 예수 부활은 제자들의 절망을 한없는 기쁨으로 바꾸어놓았다. 제자들은 스승 예수님을 뵙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1-22). 

 

사도행전 2장은 제자들이 불혀 모양으로 내려오신 성령을 받았다고 전하고 있다. 제자들은 성령을 체험하였다. 성령은 제자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으셨다. 절망과 두려움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제자들이 이제 일어서서 문을 박차고 나가기 시작했다. 죽음이 그들의 발길을 가로막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제자들은 이제 확신에 차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게 되었고 죽기까지 오직 복음을 선포하는 길을 갔던 것이다.

 

성령을 체험한 제자들의 변화된 삶은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시켰다. 성령을 체험한 제자들이 첫 번째로 한 일은 복음 설교였다. 제자들은 군중들 앞에서(사도 2,14-40; 3,11-26), 의회나 법정에서(사도 4,8-20; 5,27-42), 관헌들과 군주들 앞에서(사도 24,10-21; 26,1-32) 대담하게 복음을 증언하였다. 그 결과로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그들은 베드로의 말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 그날 새로 신도가 된 사람은 삼천 명이나 되었다"(사도 2,41).

 

교회를 형성시키신 성령을 교부들은 '교회의 혼'으로 묘사하고 있다. 교부들의 이러한 시각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으로 고백되고 있고(DS 150),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 7항이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그러므로 거룩한 교부들은 생명의 원리인 영혼이 인체 안에서 수행하는 역할과 성령의 임무를 비교할 수 있었다."성령은 교회를 형성시키실 뿐만 아니라 나아가 교회를 성화시키신다. 이른바 성령의 선물(Charisma)이 그것이다.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은 이런 것이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갈라 5,22). 성령과 반대되는 세상 일은 이런 것이다. '음행, 방탕, 서로 원수지는 것, 싸우는 것, 시기하는 것, 분노, 이기심, 갈라서는 것, 질투하는 것, 술 주정, 흥청대고 먹고 마시는 것, 때리는 것, 그리고 내 마음대로 하는 것'(갈라 5,21 참조). 이렇게 성령께서는 각자를 선물로 초대하시어 강력하게 각자의 삶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공동체 전체를 보호하시며 세상 성화를 위해 작용하신다. 

 

성령의 교회 성화 활동을 교회헌장 12항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또한 성령께서는 당신 선물을 당신 의향대로 각자에게 나누어주시며, 모든 계층의 신도들에게 특별한 은사도 나누어주심으로써 교회의 쇄신과 더 폭넓은 건설을 위하여 유익한 여러 가지 활동과 직무를 맡기기에 적합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신다."

 

 

2. 현대의 세계와 청소년

 

청소년들은 미래 교회의 주역일 뿐 아니라 현대 교회의 당연한 구성원들이다. 특별히 세례와 견진이라는 성사적 방법을 통하여 청소년들도 예수님 말씀을 듣는다.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이렇게 해서 청소년들도 성령의 선물로 초대되지만 여전히 청소년들과 성령의 선물 사이에 간격이 놓여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우선, '잊어버리기' 때문이고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의 병이다. 잊어버리고 관심이 없기 때문에 성령 쇄신 운동이 일어난다. 성령을 새롭게 체험하여 그 선물을 안고 살자는 게 성령 쇄신 운동이다. 성령은 또한 청소년을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라는 선물로 초대하지만 청소년들은 잊어버리고 관심이 없기 때문에 금방 세상일에 젖어들고 만다.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말 함부로 하고, 저 혼자밖에 모르고, 잘난 척하고.......

 

청소년들이 성령의 선물을 간직하고 사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복음서의 부자 청년은 우리의 주제와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마태 19,16). 1980년 프랑스를 방문하신 교황님께서는 '기아와 빈곤의 현세에서 젊은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는 한 청년의 질문에서도 이 대목을 인용하셨다. 도대체 청소년들이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은 시대를 넘어서는 보편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구약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신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면, 젊은이가 그 깨끗한 길 어찌 가오리까?"(시편 118,9)현대는 현저히 정신이 퇴조하고 물질이 사조 전면에 등장해 있는 시대다. 신유물론이 압도하고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현대의 정신 사조를 주도하고 있다.

 

현대의 과학 기술은 물질에 관한 인간의 가능성을 무수히 개발해 왔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사상과 인간 내부를 지배하는 데도 성공해 왔다. 달나라 토끼까지 잡아올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세상은 과학과 자유가 주는 희망에 모든 것을 걸고 있고, 인간의 삶과 사고가 바뀌고 있다. 인간은 풍요로운 세상의 도래를 꿈꾸어 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이러한 물질의 성공은 인간의 삶을 놀랄 만큼 윤택하게 했지만 한편으로 정신적 가치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세상 전체의 평화와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 과학 기술의 발달이 인류를 거역하고 있다. 물질 세계를 정복해 온 인간의 발전이 오히려 수많은 방법으로 인류 자신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왜 여전히 세상 안에 부정과 고통이 판을 치는가. 왜 정의가 짓밟히고 불의가 버젓이 살아있는가. 왜 악인이 득세하고 선인이 오히려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나아가 부자 청년의 질문은 이제 이 시대의 언어로서 세상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청소년들은 무엇을 해야 세상의 악을 물리칠 수 있는가. 그리고, 과연 그들이 그 일을 해낼 수 있는가.

 

 

3. 한국 사회와 청소년 문제의 실제

 

한국 사회 전체가 중병에 걸려있다. 돈과 명예가 이 나라의 가치 척도가 되었고 정당한 수단과 방법이 무시되고 있다. 대통령부터 차례대로 뇌물 먹는 나라, 장관도 국회의원도, 대학 교수도 판사도, 경찰도 공무원도 받아먹는다. 초등학교 여교사 뇌물명세표에는 립스틱이 500개나 있었단다. 수십, 수백 억 뇌물이 오고가는 현실은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서민을 좌절시키고 절망시킨다. 사회에 불신풍조를 일으킨다. 왜 지존파니 막가파니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가.

 

뇌물 공화국이다. 돈 봉투 공화국, 거짓말 공화국이다. 정의가 실종된 나라, 부실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삼풍 백화점, 성수대교처럼 그렇게 나라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부실 공화국 청소년들의 지상 과제는 오직 일류 대학 합격이다. 공부 지상주의가 시발점이다. 모든 가치관은 공부에 집중되어 있고 그 밖의 다른 가치관은 뒷전으로 밀려나 버렸다. 공부와 출세라는 척도 아래 모든 것이 종속된 구조가 청소년의 삶을 규정하고 있다.

 

첫째, 가치관 혼란의 문제다. 

 

청소년들은 가치관의 혼란 속에 있다. 사실 한국 사회 전체가 극심한 가치관의 혼란 속에 있다. 오늘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 놓여있는 공간적 간격과, 전통과 진보라는 시간적 간격, 여기에다 과학주의의 환상이 우리 사회에서 정당한 가치관을 몰아내 버렸다. 사회 전체의 흔들리는 가치관은 사람들을 치열한 경쟁으로 내몰고 있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공부 기계가 되어버린 청소년, 오직 공부 잘해서 일류대학 가는 것이 돈과 권력을 보장하는 길이라는 잠재의식이 암암리에 사회와 청소년 가치관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이런 살벌한 경쟁 속에서 청소년들은 절망한다. 마약 먹고, 본드 마시고, 몰려다니며 친구 때리고 돈 뺏고, 시험 떨어지면 자살하고. 이렇게 해서 승자는 승자대로 삐뚤어진 가치관으로 뇌물 공화국의 일원이 되고, 패자는 패자대로 부실 공화국의 환부를 이루어가게 된다. 왜곡된 가치관 속에 승리하여 출세한 장관, 판사는 뇌물 받아먹고 도로나 지하철 부실 공사하고, 경쟁에서 뒤쳐진 사람들은 또 다른 그릇된 가치관을 창출하게 된다. 혼란의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만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논리, 이런 힘의 논리, 경쟁의 논리가 세상의 논리가 되었다. 이런 풍토에서 내가 죽어서 남을 살리는 논리, 교회의 십자가의 논리는 더 이상 발붙일 자리가 없게 되었다. 십자가의 논리, 그것은 남을 살리기 위해 내가 죽어야 하는 바보 같은 논리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가 양보해야 하고 희생해야 하고 끝내는 죽어야 하는 논리다.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길, 그러나 그 길은 마침내는 승리하는 길이다.

 

둘째, 가치관의 혼란은 가정 교육의 부재를 낳았다.

 

사회 전체 가치관의 극심한 혼란은 우리 사회 모든 가정을 위협하고 있다. 한국의 모든 가정이 극심한 위기에 몰려있다. 이런 구도는 청소년들에 대한 가정 교육을 무력화시켰다.

 

황금 만능주의, 물질주의 풍조와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이 우리의 가정을 알게 모르게 파괴하고 있다. 가정 문제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매맞는 아내, 아내의 가출, 아버지의 실직, 불륜, 퇴폐풍조 등이 이혼율의 폭증을 낳았고 청소년을 가정 밖으로 내몰고 있다. 청소년 가출이 줄을 잇고, 폭력, 범죄, 마약, 본드, 마침내 자살에 이르기까지. 흔들리는 가정은 청소년 전체를 흔들고 있다. 어른들은 문제아를 개탄하면서도 한편으로 아이들을 일회용 소모품으로 활용한다. 이른바 삐끼로, 앵벌이로, 술집 노리개로. 가정을 책임지고 있는 부모의 각성이 절박하다.

 

공부를 위해서라면, 일류 대학에 가는 길이라면 어떤 희생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부모들의 염원도 가정 교육 부재의 한 주범이다. 남의 자식은 죽더라도 내 자식만 일류 대학에 가면 그만이라는 풍조가 가정 공동체의 개념을 바꾸어놓고 있다. 요즈음 학생들은 새벽부터 밤늦도록 공부에 시달리다가 파김치가 되어 돌아와 잠을 자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학교로 떠난다. 부모 보기에 자식이 애처롭고 자식은 자식대로 고달프다. 이러니 가정 교육 자체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우리는 예의 바르고 올바른 사람을 보면, 가정 교육을 잘 받았다고 한다. 며느리나 사위를 구할 때 뼈대있는 가문, 가정 교육이 잘된 가문을 따진다. 우리는 또 '먹고 사는 게 전부가 아니다. 먼저 인간이 되어야지.'라고 말한다. 이렇게 먼저 인간이 되는 것, 이것은 우선적으로 가정 교육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인간을 존중할 줄 알고, 생명을 존중할 줄 알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 무능하고 병든 사람을 무시하지 않을 줄 알고, 사랑하고 희생하고 양보하고 참을 줄 알고, 봉사 협력할 줄 아는 것을 가정에서 먼저 배워야 한다.

 

교회는 가정을 작은 교회, 가정 교회로 부르면서 가정은 가족 구성원의 구원을 위한 역할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교회가 인간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일에 협력하듯이 가정 구성원 또한 서로의 구원을 위해 협력해야 한다. 교회가 구원의 진리를 신자들에게 가르치고 교육하듯이 가정도 구원의 진리를 가족에게 가르치고 교육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정 교회의 일차적인 책임은 바로 부부에게 있다. 가톨릭 교회가 혼인의 신성함을 말하면서 첫 번째로 부부애 안에서의 일치, 두 번째로 자녀 출산과 교육을 가르치는 것도 의미 깊다.

 

셋째, 일류병에 물든 우리의 학교 교육 풍토의 문제다.

 

청소년들에게 학교는 그야말로 전쟁터다. 내가 살기 위해 친구들을 이겨야 한다. 우정은 간데없고 모두가 경쟁 상대들이다. 건전한 인격 함양은 말뿐이게 되었다. 진정한 자유 정신, 자율성, 상상력과 창의력을 배우기에는 너무나 바쁘고 여유가 없다. 이러한 긴장은 스트레스를 낳고 그릇된 청소년 문화로 표출되고 만다. 학교는 학생들을 상품으로 찍어내는 공장이 되어버렸다. 입시가 불량 여부를 판정하는 기준이다. '불량품'을 위한 배려는 거의 없다. 책임은 '불량한' 학생들에게 주어질 뿐이다. 

 

초등학교부터 학생이나 부모는 '돈 봉투'라는 문제와 대결해야 한다. 부모 입장에서는 하자니 내키지 않고 안 하자니 불이익을 당할 것 같고, 선생님 입장에서는 받자니 양심이 부끄럽고 안 받자니 혼자만 잘난 것처럼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초등학교 교문 앞에 붙은 '우리 학교는 돈 봉투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커다란 현수막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망국병이라는 과외 열풍은 공부 지상주의의 한 단면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부모의 과욕에 떠밀려 조기 교육이라는 미명 아래 적성과는 상관없이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만능을 강요당해야 한다. 온갖 과외에 힘입어 엄청난 사교육비는 가정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커다란 부담이다. 불법 과외는 또 다른 사회 문제를 낳고 있다.

 

바람직한 성교육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성교육의 당위성에는 다른 의견이 없지만 그 내용과 방법에 대해선 모두 어렵다. 성에 관한 한 오늘의 청소년은 상상을 초월한다. 따라서 단순한 신체적 지식을 가르치는 정도로는 효과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남성과 여성의 만남과 역할, 올바른 사랑과 성생활, 가정과 사회 등의 전체적 시각이 필요하다.

 

넷째, 신앙 교육도 위기다.

 

공부 지상주의의 큰 구도 안에서 필연적으로 청소년들에 대한 신앙 교육도 위기를 맞고 있다. 사목자와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 주일학교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많은 경우 성당에 오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풍토가 현실이다. 지상 과제인 공부 앞에 신앙은 뒷전으로 밀려나버렸다. 청소년들에게 신앙 교육을 말하는 것이 너무나 한가로운 사치가 되어버렸다. 공부가 끝나고 일류 대학에 들어간 뒤에 신앙 생활을 시작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다. 어릴 때부터 신앙을 맛들이지 못한 사람이 대학에 들어간 뒤에 신앙에 회귀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학은 지금까지의 모든 억압과 통제가 갑자기 해방되어 자기 자신이 주체로서 전면에 부각되기 때문이다. 숨어있던 '개인주의'가 고개를 들게 마련이다.

 

성당마다 이러한 상황에 맞는 주일학교 신앙 교육의 효과있는 프로그램이 없는 것도 문제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겠지만 부모 등살에 밀려 마지못해 오는 아이들, 성당을 놀거나 머리 식히는 곳으로 알고 오는 아이들,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오는 아이들 또 행사가 있을 때만 오는 아이들 등에 대해 적절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도 쉽지 않다. 앞서가는 신세대 문화에 젖어있는 이들에게 주일학교의 낙후된 방식은 시시하고 재미가 없다. 흥미있고 다양한 신앙교육 프로그램의 연구와 개발이 시급하다.

 

주일학교 신앙 교육의 주역은 교리교사들이다. 교회는 어떻게 좋은 주일학교 교사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교사 양성을 위해 어떤 투자를 하고 있는가. 아직도 봉사와 희생만을 강조하며 낡은 방식에 젖어있지는 않은가. 단연코 사목자들은 훌륭한 교사의 발굴과 양성에 과감히 투자해야 한다. 유급 교사에 대한 연구와 검토가 시급하다.

 

 

4. 사목적 배려 방향

 

많은 경우 사목자들은 청소년 문제 앞에 역부족을 고백한다. 사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분석과 처방을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청소년 문제는 한국 사회의 가치관이라는 사상적 영역과 함께 가정, 학교, 사회 전체 문제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예견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적절한 때를 맞추어 미리 대비해야 한다. 그저 종래에 해오던 것이나 답습하면서 속수무책으로 시류 탓만 하고 앉아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청소년 사목의 구체적 실제를 하나하나 거론할 수는 없다. 다만 오늘날의 상황에서 청소년들이 처한 실상을 고려하여 사목자로서 할 수 있는 청소년을 위한 기본적인 배려 방향에 대해 몇 가지 제언하고자 한다.

 

첫째, 가정에 대한 배려가 필연적이다.

 

가정은 가장 기본적인 인격 공동체인 동시에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사회 공동체라 할 수 있다. 가톨릭교회는 오늘의 가정을 '작은 교회', '가정 교회'로 부르면서 교회 개념이 가지는 풍부한 의미를 원용하고 있다. 살펴본 대로 오늘날 가정이 처한 극심한 위기는 그대로 청소년 위기의 요람이다. 가정의 위기가 사실 청소년 문제, 나아가 사회 문제의 원천을 이룬다. 가정이 튼튼하면 사회 전체가 건강하다.

 

우리가 청소년에 대한 사목적 배려를 고려할 때 결코 가정에 대한 사목적 배려를 간과할 수 없다. 가정이 참다운 공동체로 유지되려면 그 구성원이 단순히 한 집에서 함께 먹고 자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가족 구성원 각자의 위치와 역할을 깊이 인식하고 서로가 인격적 관계를 가지는 것이 필연적이다. 여기서 대화는 인격적 관계의 전제다. 따라서 사목자는 부모들에게 먼저 혼인 교육의 핵심인 부부애와 자녀 교육에 대한 책임을 고취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양심에 대한 일깨움이다.

 

청소년들이 처한 상황과 조건이 아무리 열악하더라도 사목자들은 그들의 양심을 일깨워 주려 노력해야 한다. 젊음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성장'과 '미래에 대한 도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성장과 도전의 바탕에 양심이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진리를 따를 수 있는 첫 번째 길은 바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 양심이다.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가치는 양심의 올바름과 올곧음에 달려있다. 양심의 실종은 곧 진리의 실종을 의미한다. 진리가 실종된 삶, 진리가 실종된 가정과 사회의 결말은 낙원이 아님이 확실하다.

 

사목자들은 가능한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청소년들이 양심을 지켜 나갈 수 있도록 호소하고 배려해야 한다. 청소년 각자의 양심이 젊은 시절에 성숙한 지혜를 얻음으로써 양심대로 사는 사람, 양심을 저버리지 않는 사람, 양심을 느낄 줄 아는 사람, 양심에 비추어볼 줄 아는 사람, 그리하여 마침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 양심은 바로 하느님을 아는 기준이며 잣대이기 때문이다. 양심은 한없이 부드럽지만 어떤 죄악이나 파멸보다도 강하기 때문이다.

 

셋째, 신앙이다.

 

사목자들은 또한 청소년들이 신앙을 간직하도록 힘써야 한다. 사도 요한은 청소년들을 위한 멋진 편지를 남겼다. "젊은이들이여, 여러분은 강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지니고 살며, 악마를 이겨냈기 때문에 나는 이 편지를 씁니다."(1요한 2,14)로 시작되는 이 편지의 한 결론은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라는 대목이다. 이것은 그 안에 세상의 온갖 죄악에 대한 승리를 증언하고 있는 간결하고도 강력한 신앙의 언어다. 사실 사도 요한의 이 말씀은 우리가 처음에 제기한 부자 청년의 질문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청소년들이 신앙을 간직함은 새로운 가능성을 뜻한다. 그 가능성은 요란하지는 않지만, 점진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능성이다. 사목자들은 여기에 헌신해야 한다.

 

사도 바오로가 디모테오 주교에게 한 당부는 오늘의 사목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전하고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사람들을 책망하고 훈계하고 격려하시오"(2디모 4,2).

 

청소년 모두는 하느님 말씀을 지니고 살아야겠다. 그럴 때 그들은 강할 수 있다. 21세기는 새로운 도약의 가능성이다. 새로운 미래를 향한 도전이 성장하는 청소년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일은 해볼 만한 일이다.

 

[사목, 1998년 5월호, 전광진(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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