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 (금)
(백)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강론자료

3월 28일(주일)-사순 5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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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4-03-27 ㅣ No.620

사순 제 5 주일 (다해)

 

        이사 43,16-21        필립 3,8-14         요한 8,1-11

    2004. 3. 28.

 

주제 : 나는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대하고 사는가?

 

한 주간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3월의 마지막 주일이며, 사순 5 주일입니다.  지나고 나면 빠른 것이 시간이라고는 합니다만, 봄은 오는 것이 참 더디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시간이 공익광고 시간은 아닙니다만 한참 위험하다고 하니 특별히 ‘불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애써 벌어들인 재산을 한 순간에 날려버리는 불은 조심해야 하지만, 우리의 마음과 삶의 자세를 하느님을 향하여 뜨겁게 타오르게 하는 신앙의 불은 더 키워야 할 일입니다.  

 

굳이 천주교 신앙과 개신교 신앙을 비교할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엊그제 저녁 시간에 학교 운동장을 걷다가 개신교 사람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개신교 사람들 둘이 운동장을 걸으면서 수시로 반복되는 이야기의 하나가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연세 드신 할머니 한분이 무슨 고민을 이야기한 듯 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들은 나이 젊은 사람이 그 할머니를 향하여.....“할머니, 하느님께서 집사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데요.... 집사님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꼭 믿으셔야 해요”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신앙을 드러내는 사람을 보면서 그의 삶이 부럽다고 말합니다.  부럽다고 말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삶으로 연결되어 한다는 소리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실천할 삶의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오늘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은 인간의 삶이 보여주는 모습과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의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향하여 당신의 팔을 있는 대로 다 벌린 분이며, 우리가 할 일은 자비로우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고 그분의 품에 안기면 충분하다고 선언하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첫 번째 독서로 들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언제나 충분히 알아듣고 그분의 자비하신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실천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 사람들에게 자비로운 분이시지만 일부의 사람들은 그 자비로우신 하느님에 대해서 듣고 배워도 내 삶에 드러내기를 무척이나 어렵게 생각하고 실천하기를 힘들어 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하느님의 뜻을 잘 실천한다고 말합니다.  분명 우리의 마음자세를 아실 하느님을 서글프게 하기 딱 좋은 소리입니다.

 

내가 미워하는 어떤 사람, 보기만 해도 소화가 되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가슴에 품고 삽니다.  없다면 다행이고 참 좋은 일이지만, 이상하게도 우리 가슴속에 그런 사람이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은 있을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좁은 마음을 갖고 사는 사람이라면,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도 ‘뼈에 맺힌 그 사람은 예외’로 빼고 자신은 남들보다 더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그렇게 왜곡된 삶의 자세는 때로는 법의 이름을 앞세우고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이끕니다.  그것이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을 뺀 사람들의 태도였습니다.

어떤 여인이 율법에 어긋난 일을 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벌을 받는 자리게 서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이 무슨 일을 하다가 붙잡혀왔는지는 복음에서 들었을 터이니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  그 여인이 한 행동을 두고 예수님은 어떻게 단죄하고 벌을 내리겠는가를 묻는 것이 복음은 내용입니다.  그 여인을 돌로 쳐 죽이는 것은 모세가 정해준 법에 나오는 대로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올바른 길로 나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법인데, 복음에 나오는 사람들이 사용하려던 법은 죄를 범했다는 사람을 죽음으로 모는 것이었습니다.  법을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2004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적용되는 법의 모습과 우리가 그 법을 대하는 일을 구별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사람은 죄를 선언하고, 분열시키고 공동체를 이리저리 찢어놓음으로써 정의를 세운다고 우기고 주장하지만, 하느님은 받아들이고 일치시키는 일로서 정의를 세우는 분이라는 것이 그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어려운 말은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가 어떤 길을 따라야 하는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삼국지에 제갈량이 보여준 한 가지 전설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내용은 칠종칠금이라는 고사와 연결돼 있습니다.  제갈량이 남만의 임금 맹획을 사로잡은 다음, 그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서 했던 행동을 설명하는 것이 ‘칠종칠금(七縱七擒)’의 이야기입니다.  결국 제갈량의 마음과 뜻을 알아들은 맹획이 어떤 사람이 됐는지는 삼국지를 읽은 사람이라면 아는 일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이런 모습이 보이도록 살아야 합니다.  ‘너의 죄를 묻던 사람들은 아무도 없느냐?.....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선언을 듣는 것도 결코 쉬운 생활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용서를 선언하고 자비를 보여주는 일이지만, 그것이 나의 삶에는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그 길로 나서는 사람들이 적기는 합니다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신앙인들이란 세상의 대부분 사람들이 행동하는 것처럼 휩쓸려 사는 것으로 만족해도 좋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을 판단하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시고, 내가 쌓아놓은 내 삶의 결과들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은 사순시기 다섯 번째 주일입니다.  부활 축제일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내 믿음의 생활을 통하여 하느님께로 달음질쳐 갈 수 있는 결과를 만들어내도록 노력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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