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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세계 교회 건축의 영성: 세 가지 거룩한 공간 통하여 함께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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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3-03 ㅣ No.240

[세계 교회 건축의 영성] 세 가지 거룩한 공간 ‘통하여’ ‘함께’ ‘안에서’

 

 

미사를 드릴 때 사제가 제대 앞에서 하는 동작은 매우 공간적이다. 그 중에서도 사제가 팔을 벌리며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감사 기도를 시작하고, 손을 올리면서 “마음을 드높이.”라고 하면, 회중은 “주님께 올립니다.”라고 답한다.

 

“주님께 올립니다.”는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는데,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높입니다.”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We lift them(our hearts) up to the Lord.”다.

 

이 동작이 주는 공간적인 느낌은 거룩한 공간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팔을 벌리면 ‘함께’ 있는 공간을 나타내고, 올리는 손의 ‘높이’는 지붕을 향해 상승한다. “마음을 드높이.”라고 말하며 사제가 손을 올릴 때, 우리의 마음은 눈과 함께 저 위를 향한다. 성당이라는 건물의 공간은 그저 넓고 높은 것이 아니다. 모두가 하느님께 마음을 드높이는 높은 공간이며, 하느님 백성으로 ‘함께’하는 넓은 공간이다.

 

마음을 드높이려면 눈을 위로 향해야 하고 몸도 올라가야 한다. 오래 전부터 믿는 이들은 하느님께로 ‘마음을 드높이고자’ 높은 곳에 있는 거룩한 장소로 애써 올라갔다. 프랑스 중남부 오베르뉴 지역에 르퓌앙벌레이라는 작은 마을에는 두 개의 원뿔꼴 바위산이 솟아있다.

 

높이가 85미터인 생 미셸 바위 꼭대기에 962년에 만들어진 생 미셸 데기유 경당(Chapelle Saint Michel d'Aiguilhe, 왼쪽 사진)이 있다. 이곳에 가려면 바위를 깎아 만든 268개나 되는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높기만 하다고 모두 거룩한 곳은 아니다. 그곳에 제단을 쌓고 집을 지을 때 더욱 거룩한 장소가 된다.

 

거룩한 곳은 왜 높은가? 저 높은 곳은 우리 인간을 넘어선 하느님께서 계신 곳이며, 우리가 알고 인식하고 상상하는 것 저편에 언제나 초월해 계시기 때문이다. “Deus semper major(God is always greater).”라고 이냐시오 영성에서도 말하듯이,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이해하고자 하는 것보다 언제나 더 크시며 끝없는 신비이시다. 그래서 인간의 어떤 기대나 상상, 개념이나 이미지로도 하느님을 나타낼 수 없다. 진실한 것, 아름다운 모든 것은 하느님을 비출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안에 계시지 않는다. 그래서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은 우리를 향해 더 높은 곳을 바라보라고 말하고 있다.

 

 

사제의 동작과 건축공간의 일치

 

사제의 동작이 가장 함축적으로 느껴지는 때는 사제가 성반과 성작을 받들어 올리면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per ipsum, etcum ipso, et in ipso.)”라고 말할 때다. 이때 잇달아 표현되는 ‘통하여(per, through)’, ‘함께(cum, with)’, ‘안에서(in, in)’라는 세 개의 전치사는 주의 깊이 알아들어야 할 매우 공간적인 단어다.

 

‘통하여(through)’란 이쪽에서 저쪽으로, 아래에서 위로 그 사이를 지나가며 옮겨가는 것을 말한다. ‘함께(with)’는 앞이나 뒤에 있지 않고 친근하게 가까운 옆에 모여 있거나 걷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안에서(in)’는 나보다 더 큰 존재에 에워싸여 보호를 받으며 오로지 하나뿐인 곳을 향하는 내적인 힘을 느끼게 해준다.

 

본디 성당을 포함한 모든 건축공간은 사람을 감싸는 것이다. 그렇지만 공간이란 사방으로 무한히 펼쳐져 있다. 다만 건축은 무한정한 공간의 한 부분을 한정해 줄 따름이다. 그런데 주택이든 학교든 음악당이든 모든 건축공간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입장으로 이 세상에 지어진다.

 

하나는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며 자기 몸을 지키려고 건축으로 불을 둘러싸며 안으로 사람을 감싼다. 그런가 하면 사람은 혼자 있지 않고 언제나 함께 모여야 하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이어져야 한다. 그러려고 사람은 건축으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관계를 이어간다. 모이는 공간을 가지지 못한 집단을 공동체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건축은 무한한 공간, 무한한 존재를 만나도록 사람을 이끈다. 현상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모든 집은 수직의 축선을 가진다.”라고 말했다. 이는 일상적인 공간에서도 근원적이며 초월적인 차원과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말이다.

 

사제가 제대에서 빵과 포도주가 담긴 성반과 성작을 들어 올리는 것은 들어 올린 것을 ‘통하여’ 초월자로 이어지는 공간의 수직성이다. 또한 교우들을 향하여 팔을 벌리는 것은 모인 사람과 ‘함께’하는 공간의 수평성이고, 다시 두 손을 모으는 것은 ‘안’을 향하는 공간의 내향성이다.

 

사제의 세 가지 동작은 ‘통하여’, ‘함께’, ‘안에서’라는 세 가지 건축공간과 일치한다. 인간은 자신을 지키는 공간을 위해 앞뒤의 깊이로 안을 구하고‘(안에서’), 사람이 모이는 공간을 위해 좌우로 폭을 가지며‘(함께’), 무한한 존재를 만나고자 높이를 만난다‘(통하여’).

 

형식적으로 보면 성당 건축은 단순하다. 그것은 넓어서 많은 사람이 ‘함께’ 들어갈 수 있게 하나로 툭 터진 공간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보호되도록 높은 지붕이 위를 덮고 있다. 동시에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제대라는 한 점에 집중하는 공간이다. 이것은 미사를 올리는 사제의 동작과 그대로 일치한다.

 

이처럼 성당 건축에는 세 가지 건축공간의 역할이 ‘한 공간 속’에 ‘동시에’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성당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를 공간으로 드러내는 건축이다.

 

 

하느님의 집은 땅과 하늘을 잇는 세계 축

 

하느님의 집은 땅과 하늘을 잇는 세계 축(axis mundi)이요 ‘하늘의 문(porta coeli)’이다. 그런데 문은 집안을 격리하기도 하고 안과 밖을 이어주기도 한 것이니, 성당은 세계 축의 시작이자 문지방이고 중심이면서 이행하는 곳이다.

 

고딕 대성당의 건설자들이 왜 그리 높은 공간을 구현하려고 했는지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당의 아치와 리브와 탑은 우리의 눈을 저 위로 잡아당긴다. 건물이 눈을 들어 높은 공간을 보라 하며, 마음을 저 위로 들어 올려 하느님께서 계신 곳을 향하라고 재촉하고 있다.

 

이러한 수직의 관계는 수평의 관계로도 나타난다. 성당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타나는 긴 통로는 길이며, 이 길에서는 제대를 향한 행렬이 거룩한 여정을 시작한다.

 

이 긴 통로는 고향을 버리고 하늘을 향해 가는 길, 하느님에게서 나온 우리가 다시 하느님께로 향하는 길이다. 성당의 가운데 부분을 네이브(nave)라 하여 배에 비유한 것도 안전한 이 배가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가고 있다는 뜻이다.

 

성당은 단지 앉아서 바라보려는 곳이 아니다. 제대와 그 뒤편으로 몸과 마음이 움직이는 곳이다. 도미니쿠스 뵘의 걸작인 묀헨글라트바흐의 성 가밀로 성당은 아름다운 제대 뒤에 아주 투명한 뒷벽이 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야할 바를 공간으로 나타낸 것이다.

 

다시 여기에 그리스도께서 중심에 계시고 그 주변을 사람들이 손에 손을 잡고 에워싸는 공간이 있다. 지상을 순례하는 백성은 혼자 여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가톨릭교회라는 공동체와 ‘함께’ 그 여정을 걷는 것이며, 함께 와서 함께 기뻐 노래하고 함께 몸을 굽히며 무릎을 꿇는 곳이다.

 

“와서 주님께 환호하세. 우리 구원의 바위 앞에서 환성 올리세. … 들어가 몸을 굽혀 경배드리세. 우리를 만드신 주님 앞에 무릎 꿇으세”(시편 95,1.6). 성당은 불러 모은 하느님 백성을 한 공간에 함께 있게 한다.

 

제대가 성당 안에 놓인 것일까? 아니다. 반대로 제대를 중심으로 뻗어 나오는 힘을 담는 것이 성당이다. 전등이 없던 시대에는 제대에 켠 촛불의 빛이 공간의 중심이었듯이, 제대는 폭풍을 견디는 은신처요 평화의 땅을 향하라고 우리를 안으로 잡아당긴다.

 

성 스테파노 대성당(로마, 470년 무렵).

 

 

부활 성야 예식 때 불을 다 끈 다음 파스카 초를 높이 쳐들고 ‘그리스도 우리의 빛’을 노래할 때 그 공간을 상상해 보라. 우리는 그 빛을 향하고 그 빛 안에 있다. 또 부활 찬송(엑술뗏, Exsultet)을 노래할 때 모든 이가 촛불을 켜 들고 서 있는 공간을 떠올려 보라. 우리가 들고 있는 하나하나의 촛불이 그 노래를 에워싸고 있다. 그 장면 안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집의 공간적 본질이 들어있다.

 

로마의 로톤도에 있는 성 스테파노 대성당의 공간을 보라. 로마 제국의 영묘를 본떠 지었으면서도 세 가지 거룩한 공간은 아주 명료하다. 바깥으로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주보랑이 있고 그 안쪽으로 열주로 둘러싸인 공간을 만들었다. 그 안에는 제대를 두고 그것을 다시 낮은 난간으로 둘렀다. 공간의 중심을 향하여 우리를 ‘안으로’ 모아들이려는 것이다.

 

구원의 바위 앞에 있는 하느님 백성은 줄기둥으로 둘러싸인 원형 공간 안에 ‘함께’ 있다. 그리고 저 머나먼 천상의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마음을 드높이는 우리를 향해 밝은 빛을 내려주고 있다. 이 얼마나 은총의 공간인가?

 

* 김광현 안드레아 - 건축가.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로 전주교구 천호성지 내 천호부활성당과 성바오로딸수도회 사도의 모후 집 등을 설계하였다.

 

[경향잡지, 2016년 2월호, 김광현 안드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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