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일)
(백)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교회문헌ㅣ메시지

복음의 기쁨을 안고 세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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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5-25 ㅣ No.677

“복음의 기쁨”을 안고 세상으로 (1) 늘 새로운 기쁨 - 예수님과 만남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첫 권고문은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히 채워줍니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인간을 창조하시고 돌보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부활의 새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에게서 절정을 이룹니다.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이런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믿는 사람은 어떤 처지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습니다. 

 

그리고 교황님은 이 글을 쓰는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기쁨으로 두드러진 새로운 복음화의 단계로 들어서도록 격려하면서, 앞으로 여러 해 동안 교회가 걸어갈 새 길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즉, 예수님과의 깊은 만남으로 우리 모두 ‘새로운 복음화’로 나아가고 그 안에서 교회가 새 길을 찾아가자고 권고하십니다. 

 

복음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온 마음과 삶을 기쁨으로 채워주는 하느님의 선물이지만, 오늘날의 세상에는 이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교황님은 그것을 ‘온갖 극심한 소비주의와 더불어 개인주의적 불행’이라고 지적하십니다. 현대문명은 인간의 편리를 위해 많은 것을 발전시켰지만, 그것이 오히려 안이하고 탐욕스러운 마음과 피상적인 쾌락에 대한 집착, 그리고 이웃과 함께하는 마음을 잃게 하는 고립된 정신을 낳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이해와 관심에만 갇히게 되면, 우리 마음 안에 다른 이들이, 특히 가난한 이들이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면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삶은 하느님의 원하시는 품위 있고 충만한 삶도 아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솟아오르는 성령 안에서 사는 삶도 아닙니다. 

 

그래서 교황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어디에 있든 바로 지금 이 순간 새롭게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적어도 날마다 그분을 찾으려는 열린 마음을 가지도록’ 권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시고 언제나 기쁨을 되찾아 주시어, 언제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많은 예언자들과 하느님을 만나고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는지 볼 수 있습니다. 교황님은 묻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 기쁨의 큰 강물 속으로 들어가지 못할 이유가 있습니까?’ [2014년 10월 12일, 연중 제28주일 청주주보 4면,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대전교구 총대리)]

 

 

“복음의 기쁨”을 안고 세상으로 (2) 영원한 새로움, 새로운 복음화

 

 

교황님은 현대 기술사회가 쾌락의 기회를 증대시켜 왔지만 그것으로 진정한 삶의 기쁨을 누리기는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하시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은 가장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기쁨은 가진 것 없는 매우 가난한 이들이 누리는 기쁨 그리고 직업적으로 중요한 임무를 다하면서도 너그럽고 단순하며 믿는 마음을 지닌 이들이 누리는 기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쁨은 사랑에서 오고 사랑은 만남에서 발생합니다. 자신의 윤리적 기준이나 고결한 생각 안에 갇혀있지 않고 거기에서 벗어나 사람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남으로써, 우리는 온전한 인간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복음화 활동의 원천이 있습니다. 삶의 의미를 되찾아주는 이 사랑 곧 복음을 만나면, 우리는 이것을 다른 이들과 나누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벗어나 한층 높은 차원에서 더욱 강렬한 삶을 살아가도록 힘을 줍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심오한 법칙이 있습니다. 즉, 생명은 내어줌으로써 더 자라나고 고립되고 안주하면 약해집니다.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내어줄 때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얻고 그것은 계속 자라납니다. 

 

선교 또한 그렇습니다. 복음 선포자는 진정한 자아실현의 원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불안 속에서 때로는 희망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현대 세계 안에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교황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럴 때 ‘낙심하고 성급하고 불안해하는 선포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기쁨을 먼저 받아들여 열성으로 빛나는 삶을 살려는 복음의 봉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복음 선포의 과정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을, 나이에 상관없이, 늘 새롭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지혜와 지식의 폭은 너무 깊고 넓어, 언제나 더욱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뜻이 담긴 복음 본연의 참신함을 되찾고자 할 때마다 우리에게 우리 시대에 알맞은 새로운 형태의 표현들과 설득력 있는 기호와 어휘가 생겨날 것입니다. 진정한 새로움은 하느님께서 몸소 신비로운 방식으로 만드시고 영감을 주시고 일으키시며 인도하시며 우리와 동행해 주시는 데에서 발생합니다. 정기적으로 공동체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물론 세례를 받았으나 더 이상 신앙의 위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리스도를 모르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도 복음의 기쁨을 누리고 나누는 “매력”을 보여줍시다! [2014년 10월 19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 주일) 청주주보 4면,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대전교구 총대리)]

 

 

“복음의 기쁨”을 안고 세상으로 (3) 선교 활동을 향한 교회의 쇄신

 

 

세계 복음화는 예수님의 선교 명령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 일에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보여주실 새 땅으로, 모세는 백성을 이끌고 주님께서 마련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예언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하여 ‘출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위해 존재하시듯, 그분의 몸인 교회 역시 세상을 위하여 세상을 향하여 존재합니다. 곧, 교회는 본질상 주님으로부터 파견되어 세상을 향해 ‘출발’하는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에 복음을 전할 때 가장 교회다워진다는 뜻입니다. 다음에 보겠지만, 교황님께서 선교를 위한 교회 쇄신을 더 미룰 수 없다고 하신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교황님은 복음 선포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십니다. 곧, ‘출발’하는 교회는 선교하는 제자들의 공동체로서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두려움 없이 과감히 ‘첫 걸음을 내딛고’, 활동 중에 하느님의 자비와 무한한 힘을 경험하면서 더 깊이 ‘뛰어들고’, 한 걸음 한 걸음 사람들과 ‘함께 가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고’, ‘기뻐합니다.’ 여기에서 교황님은 ‘첫 걸음 내딛기’라는 단어를 이 문헌을 위해 당신이 일부러 만든 것이라고 강조하십니다. 이 단어는 교회 공동체가 선교를 위해 걸음을 떼면 그곳에 예수님께서 먼저 와 계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 하시며 당신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러한 뜻을 담고 교황님은 지금의 교회가 쇄신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외적으로 아무리 훌륭한 구조라 하더라도 새로운 생명에 대한 희망과 진정한 복음 정신 곧 ‘교회 본연의 선교 소명에 대한 충실성’이 없다면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고 말씀하십니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쇄신은 선교를 그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본당은 세상과 동떨어진 구조도 아니고 선택받았다고 자처하는 자기도취적 집단도 아닙니다. 본당은 그 지역의 교회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성찬례를 이루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성장하는 장소이며, 이 모든 활동을 통하여 신자들이 복음 선포자가 되도록 격려하고 교육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주교는 신자들이 한 마음 한 뜻을 이룬 초기 그리스인 공동체의 이상에 따라, 때로는 백성 앞에서 방향을 제시하고 때로는 한 가운데에서 인자로운 모습으로 조용히 머물고 때로는 뒤에서 처진 양 떼를 도와주면서, 자기 교구 안에서 선교적 친교를 증진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교하는 교회를 위하여 교황직의 쇄신도 깊이 생각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2014년 10월 26일, 연중 제30주일 청주주보 4면,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대전교구 총대리)]

 

 

“복음의 기쁨”을 안고 세상으로 (4) 선교는 복음의 핵심으로부터 (1)

 

 

계시된 모든 진리는 다 하느님에게서 나온 소중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가운데 복음의 핵심 곧,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하느님 사랑의 아름다움을 더 직접적으로 잘 드러내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교리를 비교할 때에는 진리의 서열 또는 위계가 있다’고 한 것이나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교회의 도덕적 가르침 또한 그 고유의 ‘위계’를 지닌다고 가르친 것은 이러한 의미입니다. 

 

이런 점에서 선교를 핵심으로 하는 사목은 많은 교리를 두서없이 전달하고 이를 강요하려해서는 안됩니다. 복음은 무엇보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께 응답하라고, 그리고 다른 이들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나와 다른 이들의 공동 선익을 추구하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교황님은 우리가 특정한 이념적 선택에 바탕을 둔 교리나 도덕적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복음의 향기’를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시며 단호히 강조하십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이 사랑의 초대가 희미해질 수는 없습니다.” 

 

이어서 교황님은 우리가 복음을 살아가고 선포할 때 구체적인 역사 즉 언어와 상황의 일정한 한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신앙의 유산과 그것이 표현되는 방식은 서로 별개의 것입니다.” 즉, 각 시대에 맞는 표현 방식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표현하는 방식의 다양성을 찾기 위하여 교회 안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의 연구들도 자유롭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지니고 있는 어떤 관습들은 오랜 역사적 뿌리를 두고 있고 또 아름답기는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복음을 전하는 수단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두려움 없이 이러한 것들을 재고해야 합니다.” 교황님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교회가 나중에 추가한 규범들이 “신자들의 삶에 짐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뿌리를 두고 있는 신앙은 이 세상에서 어떤 모호함을 지닐 수밖에 없지만, 이 점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길로 우리가 전하는 종교적 가르침이 복음 선포자의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격려하십니다. 사실 복음 선포자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선포하면서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삶을 회피한다면, 그의 말이 누구를 설득할 수 있겠습니까? [2014년 11월 2일, 위령의 날 청주주보 4면,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대전교구 총대리)]

 

 

“복음의 기쁨”을 안고 세상으로 (5) 선교는 복음의 핵심으로부터 (2)

 

 

교황님은 복음 선포자의 삶으로 복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교회가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교황님이 이 문헌에서 중요하게 사용하시는 “세상을 향해 ‘출발’하는 교회”는 문을 활짝 열어놓은 교회입니다. ‘문을 열어놓은 교회’는 가만히 앉아서 누군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교회가 아닙니다. 방탕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멀리서 아들이 보이자 달려가 끌어안는 사랑 가득한 아버지의 집이고, 그 누구보다도 먼저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 자주 멸시당하고 무시당하는 이들, 우리에게 받고도 “보답할 수 없는 이들”(루카 14,14)에게 다가가는 사랑 가득한 적극적인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황님은 말씀하십니다. “결코 가난한 이들을 저버리지 맙시다!” 

 

신앙생활의 중심인 성사들의 문도 어떠한 이유로든 닫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먼저 신앙인이 되는 첫 문인 세례성사의 문이 활짝 열려 있어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이 문으로 들어오도록 우리가 초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찬례는 성사생활의 충만이지만 그것은 완전한 이들을 위한 보상이 아니라 나약한 이들을 위한 영약이며 양식입니다. 이러한 확신은 성사가 누구에게 어떻게 베풀어져야 하는지 사목적 귀결로 이어집니다. 교회는 저마다 어려움을 안고 찾아오는 모든 이들이 자신들을 위한 자리가 있다고 느끼는 아버지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교황님께서 그리는 교회의 모습에 감동을 느낍니다. 

 

“이제 출발합시다. 가서, 모든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합시다...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고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 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저는 더 좋아합니다. 저는 중심이 되려고 노심초사하다가 집착과 절차의 거미줄에 사로잡히고 마는 교회를 원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우리의 양심을 괴롭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수많은 우리 형제자매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맺는 친교에서 위로와 빛을 받지 못하고 힘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교회가 되기 위해 지금 우리가 가지고 누리는 것을 변화시키는 쇄신의 길에서 우리가 길을 잃을까 두려워하기보다 오히려 우리에게 거짓 안도감을 주는 조직들이나 습관들 안에 갇혀버릴까 두려워하며, 우리의 문 밖에 굶주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 6,37)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2014년 11월 9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청주주보 4면,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대전교구 총대리)]

 

 

“복음의 기쁨”을 안고 세상으로 (6) 오늘날 세상의 도전들 ① 위험한 현상들

 

 

복음화 활동과 관련하여 교황님은 시대의 징표를 주의 깊게 살피는 복음적인 식별을 강조하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회학적 이론들이 모든 현실을 총체적으로 분석하려고 덤비면서 오히려 실현 가능한 해결책을 담아내지 못하는 이른바 ‘과잉진단’의 수준에 그치는 것을 경계하면서, 선교하는 제자들의 시각 곧 “성령의 빛과 힘으로 길러지는” 시각을 가져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시각을 돕기 위하여 교황님은 오늘날 세상에서 상당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4가지의 위험한 현상과 3가지의 도전 범주를 제시하고 계십니다. 

 

위험한 현상의 첫 번째로 ‘배척과 불평등의 경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이든 노숙자가 길에서 얼어 죽어도 기사화가 되지 않으면서, 주가지수가 조금만 내려가도 즉시 중요한 기사가 되는 세상은 인간의 가치를 배척하는 문화입니다. 모든 것에서 경쟁의 논리가 지배할 때 그것은 곧 약육강식의 사회를 만들고 여기에서 밀려난 이들은 ‘착취’ 수준을 넘어 사회의 중심에서 쫓겨나고 ‘버려진’ 사람이 됩니다. 

 

둘째, ‘돈의 새로운 우상은 안 된다.’ 오늘날 우리는 돈이 우리 자신과 사회를 지배하는 물신주의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런 경향은 인간을 목적으로 보지 않고 단지 소비자로 전락시킵니다. 한계를 모르는 권력욕과 소유욕 그리고 널리 만연한 부패와 이기적인 탈세가 세계적인 규모를 띠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셋째, ‘봉사하지 않고 지배하는 금융제도는 안 된다.’ 물신주의가 팽배할수록 이를 경고하는 건전한 윤리는 비생산적이고 지나치게 인간적인 것으로 나아가 위협적인 것으로까지 여겨집니다. 시장 논리가 점차 절대화될수록 인간의 온전한 자아실현을 원하시는 하느님은 오히려 위험한 분이 됩니다. 교황님은 금융전문가들과 정치지도자들에게 옛 성인의 말씀을 들려주시며 사심 없는 연대성을 지니고 경제와 금융에서 인간을 이롭게 하는 윤리로 돌아갈 것을 강력히 권고하십니다.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어 갖지 않는 것은 그들의 것을 훔치는 것이며 그들의 생명을 빼앗는 것입니다.” 

 

넷째, ‘폭력을 낳는 불평등은 안 된다.’ 지역사회든 국제 사회든 과도한 불평등은 폭력을 낳습니다. 이는 단지 배척당한 이들이 자신들의 불만을 폭력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사회 경제제도가 그 뿌리부터 불의하기 때문입니다. 군비경쟁 역시 거짓된 희망을 줄 뿐 평화를 위한 진정한 해결책이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이 역시 경제력과 무력을 바탕으로 국가 혹은 민족간의 불평등과 갈등을 심화시킬 뿐입니다. [2014년 11월 16일, 연중 제33주일(평신도 주일) 청주주보 4면,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대전교구 총대리)]

 

 

“복음의 기쁨”을 안고 세상으로 (7) 오늘날 세상의 도전들 ② 복음 선교에서 만나는 도전들

 

 

이어서 교황님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서 부딪칠 수 있는 현대 사회의 도전 중 먼저 ‘문화적 도전’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어느 곳에서는 종교 자유에 대해 직접적인 공격과 박해가 가해지기도 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종교를 포함하여 전체주의처럼 보이는 모든 것에 반발하는 상대주의적 무관심을 만나기도 합니다. 폐쇄적인 자기 고유의 진리를 고집하는 곳에서는 그들과 어떠한 공동계획을 세우는 것 자체가 어렵습니다. 세계 여러 곳에서 일어나는 신흥종교운동은 근본주의적 경향을 띠거나 사실상 하느님 없는 영성을 주창하고 있지만, 교묘한 방법으로 현대 개인주의가 만들어내는 세속적 합리주의의 허점을 파고듭니다. 사목자들은 행정적인 측면을 우선시하거나 성사집전에만 몰두하지 말고, 사목적 측면에 더 마음을 쓰고 진정한 복음화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오늘날 가정 또한 심각한 문화적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가정은 서로의 차이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면서 서로에게 속해 있음을 배우는 곳이며 신앙이 전수되는 자리입니다. 

 

다음으로 ‘신앙토착화의 도전’입니다. 교황님은 복음이 한 지역에 전파되어 건강한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문화의 복음화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정신이 사람들의 일상적인 마음과 정신에 깊이 스며들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복음화된 문화는 오늘날 세속주의의 맹공 앞에서 그 한계를 뛰어넘는 힘을 발휘합니다. 세계의 여러 곳의 대중문화에는 남성 우월주의, 알코올 중독, 가정폭력, 낮은 미사 참여율, 주술에 빠지는 숙명론이나 미신 등이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복음화된 대중문화는 이러한 현상들을 치유하고 신앙과 연대의 가치를 통하여 한층 정의롭고 종교적인 사회발전을 증진할 수 있습니다. 대중신심의 확신은 이런 점에서 가장 좋은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도시문화의 도전’도 있습니다. 다문화 사회인 도시에서는 다양한 문화적 형태들이 공존하면서도 자주 분열과 갈등이 빚어지기도 합니다. 이곳에는 개인과 가정의 삶을 영위하는 데에 필요한 수단을 가진 시민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이런 혜택으로부터 밀려난 ‘도시의 잉여 인간들’도 있습니다. 자유와 참여와 다양한 요구들을 대규모 시위로 표현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마약과 인신매매, 소수자에 대한 학대와 착취, 노인과 병자 유기, 다양한 형태의 부패와 범죄가 일어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복음 선포는 인간 생명의 존엄을 회복시키는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이 제안하는 인간 생명에 대한 단일하고 완전한 의미는 도시의 병폐를 없애는 최고의 치료제인 것입니다. [2014년 11월 23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성서 주간) 청주주보 4면,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대전교구 총대리)]

 

 

“복음의 기쁨”을 안고 세상으로 (8) 사목 일꾼들이 겪게 되는 유혹들 ①

 

 

교황님은 임시 진료소에서 사람들을 치유하거나 평화로이 죽음을 맞이하도록 도와주고, 가장 낮은 곳에서 중독된 이들을 돌보며, 어린이와 젊은이의 교육에 헌신하고, 버림받은 노인들을 보살피는 등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헌신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감사하며, 이 시대의 자녀인 우리가 그 문화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제약과 악영향으로 인해 병들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시면서 특히 사목 일꾼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몇 가지 유혹들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시고자 합니다. 

 

교황님은 먼저 오늘날 수많은 사목일꾼들이 세상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고 ‘이기적 나태’에 빠져 자유와 휴식에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지적하십니다. 그들이 기도생활을 하지만 실은 내면에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사목일꾼으로서의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미디어 문화와 일부 지식층이 교회의 메시지와 관련하여 노골적인 회의와 냉소를 퍼뜨리는 사회적 분위기의 영향도 있습니다. 사목일꾼들이 선교를 통하여 다른 이들에게 헌신하기보다 경제적인 안정에 매달리거나 혹은 권력이나 인간적인 영예를 얻으려는 생활방식에 빠지고, 많은 사제들이 개인적인 시간을 갖는 데에 집착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가면을 쓴 물질주의와 쾌락주의 그리고 회색의 실용주의에 우리의 내면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기적 나태’를 직시하고 우리의 선교 열정을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 복음화의 기쁨을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 

 

‘무익한 비관주의나 패배주의’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시대에 우리를 새로운 질서로 이끌고 계시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승리는 언제나 십자가입니다. 이에 반해 패배주의는 눈에 보이는 성공이 없으면 불안한 자기중심적인 신뢰부족의 산물입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영성의 사막화 곧 그리스도교적 뿌리를 없애고 하느님 없이 오직 인간 중심의 사회를 세워나가려는 시도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사생활의 안락함 속에 혹은 가까운 친구들의 좁은 울타리 속으로 달아나 복음의 사회적 측면도 도외시하면서 십자가 없는 하느님을 원합니다. 요즈음 유행하는 ‘웰빙’문화도 그 안에 형제자매들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자기중심적 태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이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강생을 통하여 그리고 십자가를 통하여 온유한 사랑의 혁명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는 설령 우리가 부당한 대우를 받더라도, 형제애로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굽히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품 안에서 고통을 이겨내는 법을 배운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신앙이 진정한 대중 신심으로 확산되어 그리스도교 신앙이 대중문화 속에 육화되도록 해야 합니다. [2014년 11월 30일, 대림 제1주일 청주주보 4면,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대전교구 총대리)]

 

 

“복음의 기쁨”을 안고 세상으로 (9) 사목 일꾼들이 겪게 되는 유혹들 ②

 

 

교황님은 ‘영적 세속성은 안 된다.’고 단호히 선언하십니다. 영적 세속성은 교회에 대한 사랑의 겉모습 뒤에 숨어서 실은 자신의 영광과 안녕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가장 대표적인 예가 성경의 바리사이들입니다. 이것은 교회에 대한 명백한 반대나 혹은 순전히 도덕적인 다른 세속성들보다 더 큰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진정한 복음화보다 남들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데에 그리고 은총의 문을 열기보다는 검토하고 검증하는 데에 자신의 힘을 소진합니다. 영적 세속성에 젖은 사람들은 교회 안팎에서 특별한 대우를 원하고, 통계와 기획과 평가와 일처리 능력 등 관리자의 기능에 매달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형제들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오히려 높고 먼 데서 내려다 바라보면서 평범한 형제자매들의 예언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이들을 무시하고 쉽게 분노하며 다른 이들의 잘못을 계속 들추어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자기 죄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용서에 진심으로 열려 있지도 못합니다. “이는 선으로 포장된 끔찍한 타락입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싸움들’입니다. 영적 세속성에 젖어 특권의식을 갖고 이에 방해되는 다른 이들과 다투거나 평범한 교회 공동체 일원으로 사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여 특별하다고 여기는 이런저런 집단에 소속되어 경쟁의식을 키우기도 합니다. 봉헌된 사람들조차 여러 행태의 적개심, 분열, 비방, 질투 등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교황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그리스도인들이 형제적 친교의 빛나는 매력적인 증인이 되기를 당부합니다... 우리는 같은 배를 타고 같은 항구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이에게 속한 저마다의 은사를 기뻐할 줄 아는 은총을 간구합시다!” 

 

교회 안에서 더 많은 여성 특유의 감수성, 직관, 고유한 역량이 발휘될 기회가 주어져야 합니다. 남녀의 동등한 존엄에 대한 확신에 기초하여 여성의 권리가 존중되어야 한다는 요구는 도전적이면서도 심오한 문제를 교회에 제기합니다. 실제로 여성이신 마리아께서는 주교들보다 더 존귀하신 분이십니다. 직무 사제직이 ‘위계적’인 측면을 가진다 해도 이는 온전히 그리스도의 지체들의 거룩함에 예속됩니다. 언제나 하느님 백성에게 봉사하는 것이 바로 권위의 원천입니다. 이 봉사에 여성이 맡을 수 있는 역할이 보다 깊이 숙고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일상 안에서 자주 불안, 문제, 상처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청년들에 대한 사목입니다. 공동체 전체가 젊은이들을 복음화하고 교육하며 젊은이들이 더 많은 지도력을 발휘해야 할 긴급한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지역에서 사제직과 봉헌생활의 성소가 부족합니다. 공동체가 끊임없이 기도하고 젊은이들에게 복음전파에 온전히 봉헌하도록 권유해야 합니다. [2014년 12월 7일,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 청주주보 4면,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대전교구 총대리)]

 

 

“복음의 기쁨”을 안고 세상으로 (10) 교회, 하느님 백성 - 모두가 선교사

 

 

교회는 교계제도라는 옷을 입지만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백성이며, 삼위일체에 뿌리를 내린 신비입니다. 동시에 교회는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순례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백성으로 존재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시어 우리가 당신의 사랑에 응답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이 세상에서 구원의 성사가 되도록 파견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시고 교회가 기쁨으로 선포하는 이 구원은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그 누구도 혼자 구원될 수 없습니다. 교회가 된다는 것은 아버지 사랑의 큰 계획에 따라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 백성은 고유한 문화를 가진 이 세상의 다양한 민족들로 구체화됩니다. 모든 문화에서 발견되는 긍정적인 가치들과 형식들은 복음이 선포되고 이해되며 실천되는 방식을 풍부하게 할 것이기에, 올바로 이해된 문화적 다양성은 교회의 일치에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신앙은 어느 특정 문화의 이해와 표현의 한계에 갇힐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은 성령의 도유로 거룩해지고, 그 모든 구성원은 그들이 받은 세례에 힘입어 어떤 처지에 있든 신앙교육의 수준과도 상관없이 선교하는 제자 곧 복음화의 능동적인 주체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만난 그리스도인은 모두 선교사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진실로 체험한 사람은 그 누구라도 세상에 나가 그 사랑을 선포하는 데에 오랜 준비나 긴 시간의 훈련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복음이 한 민족 안에 토착화되면, 문화전수의 과정에서 신앙도 늘 새로운 방식으로 다음 세대에 전달됩니다. 이 전달과정에서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의 은사를 각자의 재능에 따라 삶으로 드러내면서 자신이 받은 신앙을 증언하고 또 새롭고 설득력있는 표현으로 풍요롭게 합니다. 여기에 대중신심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대중신심은 하느님 백성의 자발적인 선교활동의 표현이며 그 주역은 성령이십니다. 대중신심이 갖고 있는 적극적인 복음화의 힘이 곧 성령의 활동임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속적인 토착화의 과정을 심화하고자 대중신심을 촉진하고 강화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선교는 거리나 광장에서 혹은 여행 중에도 개인에게서 개인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다른 이에게 전할 준비가 늘 되어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준비되어 있다면 성령께서는 복음화하는 교회 전체를 다양한 은사로 풍요롭게 해 주십니다. 다양한 형태의 은사들이 서로의 차이로 인해 불편하게 여겨져서는 안 됩니다. 인간적인 계산으로 일치를 이루려고 할 때 자칫 단일한 획일성을 강요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은사들은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진정한 친교 안에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건강한 지체들이 되어 참되고 신비로운 열매를 맺습니다. [2014년 12월 14일,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청주주보 4면,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대전교구 총대리)]

 

 

“복음의 기쁨”을 안고 세상으로 (11) 강론 ① 진리를 존중하고 말씀을 먼저 자기 것으로 삼기

 

 

복음 선포는 하느님께서 선포하는 사람의 말을 통하여 다른 이들에게 다가가시어 당신의 힘을 나타내신다는 확신에 바탕을 둡니다. 특히 성찬모임에서 하느님 말씀의 전례적 선포는 성사적 친교에 앞서 하느님과 당신 백성이 나누는 대화의 최고의 순간으로서 모든 교리교육을 뛰어넘습니다. 

 

강론은 전례거행이라는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선포이기 때문에 간결해야 하고, 일반 연설이나 강의를 닮지 말아야 합니다. 한 시간 내내 청중의 주의를 끌만큼 좋은 내용이라 해도, 그렇게 하면 성찬례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되어 전례거행의 조화와 리듬을 왜곡시킵니다. 교회는 어머니이고 따라서 자애로운 어머니가 자녀에게 말하는 방식으로 강론은 이루어져야 합니다. 즉, 자녀는 강론에서 사랑을 느껴야 하고, 살아가는 힘을 얻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강론자는 자신의 계획에 따라 말하지 않고,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백성의 마음과 문화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강론은 진리 전달 이상의 것입니다. 순전히 도덕적이거나 교리적인 또는 성경해석 강의가 되면 마음과 마음의 소통에서 멀어집니다. 강론은 이렇게 지식을 전달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이의 마음에 불을 지르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사제들이 강론준비에 충분히 시간을 할애하기를 바랍니다. 준비가 되지 않은 강론자는 영성적이지 않고 정직하지 않으며 자신이 받은 은사에 무책임한 사람입니다. 먼저 성령께서 오시도록 기도를 드린 다음, 그 날의 성경구절에 모든 주의를 집중하십시오. 이것이 진리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강론의 첫 준비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본문의 세세한 부분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핵심 메시지 곧 본문에 구조와 일관성을 부여하는 메시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성경본문의 핵심 메시지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연관시켜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해석의 중요한 원칙이며, 사제가 평소에 늘 성경을 가까이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말씀이 사제의 생각과 감정 속까지 깊이 들어가 사제 안에서 새로운 시각이 싹틀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주일 말씀이 먼저 사제의 것이 되어 그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면 신자들의 마음속에서도 찬란히 울려 퍼질 것입니다. 

 

강론자는 자신이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그리고 언제나 그분의 사랑이 결정적이라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강론을 하면서, 베드로 사도가 “나는 금도 은도 없소.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사도 3,6)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를 내 준 것처럼 똑같이 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합니다. 교회가 시작될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성령께서 복음 선포자 안에서 활동하시니, 성령을 뚜렷이 의식하고 그분께 자신을 내맡기고 이끄시는 대로 따르십시오. [2014년 12월 21일, 대림 제4주일 청주주보 4면,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대전교구 총대리)]

 

 

“복음의 기쁨”을 안고 세상으로 (12) 강론 ② 영적 감수성, 간결하고 긍정적인 언어

 

 

기도하면서 하느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으로 깨치고 새롭게 되도록 이끌어주는 방법으로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가 있는데, 이는 강론자가 성경구절의 핵심메시지를 이해하려고 연구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같습니다. 영적독서는 그 구절의 자구적 의미에서 시작해야 자신이 이미 내린 결정에 끌려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님, 이 성경 구절이 저에게 무슨 말씀을 하는 것입니까?’라고 질문해야 합니다. 말씀이 먼저 강론자에게 메시지가 되어야 듣는 이에게도 메시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강론자는 또한 백성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강론자는 성경구절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언어와 표징과 상징들을 고려하여 삶에 관한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강론자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나 최신 뉴스를 끌어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환경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을 읽어내는 영적 감수성과 복음적 식별력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강론 내용 못지않게 강론 방법에 대한 관심도 깊은 영적 태도입니다. 듣는 이에게 다가가는 방법 곧 강론자와 듣는 이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랑이 드러나야 합니다. 성경에 적절한 강론 준비를 위한 제언이 있습니다.: “많은 것을 간결하게 말하라.”(집회 32,8) ‘간결하다’는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관련됩니다. 바오로 6세께서도 “강론이 간결하고 명료하며 솔직하면서도 시기에 알맞다면 신자들은 강론에서 많은 것을 기대하고 큰 유익을 얻을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강론에 신학과정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익힌 언어가 아니라 듣는 이 곧 백성들이 살아가는 환경의 언어를 써야 합니다. 간결하지만 명료하지 않을 수 있음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논리가 부족하거나 다양한 주제를 한꺼번에 다루려 하다 보면 그렇습니다. 강론의 주제가 통일되고 문장이 명료하며 일관되게 준비하십시오. 

 

좋은 강론의 또 하나의 특징은 긍정적인 언어입니다. 되도록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부정적인 언어보다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더 잘할 수 있는지 긍정적인 언어를 쓰고, 부정적인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면 그것을 매력적이고 긍정적인 가치로 발전시키십시오. 그렇게 하여 강론이 불평이나 탄식, 비판과 비난에 그치지 않고 항상 희망을 주고 미래를 지향하도록 해야 합니다. [2014년 12월 28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 청주주보 4면,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대전교구 총대리)]

 

 

“복음의 기쁨”을 안고 세상으로 (13) 케리그마의 심화를 통한 복음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복음선포와 함께 신앙성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 교회가 세상에 전한 ‘첫 선포’를 케리그마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모든 복음화 활동과 교회 쇄신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여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성숙은 교리교육적인 차원을 필요로 하지만 최종 목적지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인간이 되시어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이 먼저 걸으시고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계명이며, 모든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에 대한 확신과 응답이 신앙성숙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응답과 성숙의 여정에서 언제나 하느님의 은총이 선행함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성령을 따르는” (로마 8,5)삶을 통하여 그 모든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첫 선포’는 단지 시간적으로 처음이 아니라 질적으로 모든 선포의 으뜸, 곧 우리가 다양한 형태로 거듭 들어야 하고 선포해야 할 핵심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다른 모든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사제 역시 끊임없이 케리그마로 생생하게 복음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늘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사제는 백성의 성숙 과정을 함께 하는 동반자이면서, 그 자신 역시 하느님 백성으로서 성숙 과정의 일원입니다. 

 

교리교육에서 우리의 모든 도덕적 종교적 의무에 앞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사랑을 잘 표현해야 합니다. 이는 정식화된 진리를 강요하는 방식이 아니라 기쁨과 격려와 활력과 조화로운 균형을 특징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언제나 중심이 되어야 하는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많은 교재나 프로그램이 신비 교육을 위한 쇄신의 필요성을 충분히 언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신비와 관련하여 모든 형태의 교리교육은 ‘아름다움의 길’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믿고 따르는 것이 단순히 옳은 일이 아니라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을 새로운 빛과 기쁨으로 채워주는 그런 아름다움을 말합니다. 

 

이 모든 복음화와 성숙의 원천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말씀에 귀 기울이는 훈련을 끊임없이 받아야 하고, 말씀이 점점 더 온전하게 모든 교회활동의 중심이 되게 해야 합니다. 말씀과 성사의 낡은 대립은 이미 극복되었습니다. 활기차고 효과 있는 말씀선포는 성사를 온전히 받게 해주고, 성사 안에서 말씀은 최대의 효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사시어 활동하시도록 성경 연구는 모든 신자에게 활짝 열린 문이 되어야 합니다. [2015년 1월 4일, 주님 공현 대축일 청주주보 4면,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대전교구 총대리)]

 

 

“복음의 기쁨”을 안고 세상으로 (14)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 - 특히 가난한 이들을 향하여

 

 

교회의 첫 선포는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인데, 이는 복음화가 하느님 나라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현존하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형제애의 가르침 안에는 이미 복음의 사회적 차원이 깊이 담겨 있습니다. 불의한 사회 구조 안에서 참다운 형제애는 실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개별 인간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도 구원하십니다.” 

 

복음의 가르침은 단순히 하느님과 나와의 개인적인 관계에 그치지 않으며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응답을 선한 행위의 목록으로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제안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함께 누리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과 함께 이미 하느님의 나라는 지상에 현존하며 자라고 있습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마태 12,28) 

 

종교가 사적이고 내밀한 영역에 국한되어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을 영원한 행복으로 부르시면서 그들이 이 세상에서도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회개는 특히 “사회질서와 공동선 추구와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합니다. 지구는 우리 공동의 집이며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입니다. 사람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세우는 정의가 모든 정치의 목적이며 고유한 판단기준이라면, 교회 역시 그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친히 “가난하게 되신”(2코린 8,9) 하느님의 마음속에 가난한 이들을 위한 특별한 자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이들이 사회에 온전히 통합될 수 있도록 가난한 이들의 해방과 진보를 위한 하느님의 도구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의 울부짖음을 들으신다는 성경의 수많은 말씀들은 만일 우리가 그 호소에 귀를 막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죄가 되고, 그들과의 연대성의 결여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고 가르칩니다. 가난한 이를 돌보고 도우라는 하느님의 명령은 어쩌다가 베푸는 자선행위 차원이 아니라, 빈곤의 구조적 원인을 직시하고 가난한 이들의 온전한 발전을 촉진하도록 일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시장의 눈먼 힘과 보이지 않는 손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정의의 증진은 경제성장을 전제로 하면서도 더 나은 소득분배와 일자리 창출도 넘어서 가난한 이들의 온전한 진보를 분명히 지향하는 결정, 계획, 구조, 과정을 요구합니다. 교황님은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생활 방식에 따라 관심을 더 쏟아야 하는 다른 일들이 많아서 가난한 이들을 가까이할 수 없다고 어느 누구도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 가난한 이들의 범주에 경제적 이윤과 무분별한 착취에 황폐해지는 자연환경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2015년 1월 18일, 연중 제2주일(일치 주간) 청주주보 4면,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대전교구 총대리)]

 

 

“복음의 기쁨”을 안고 세상으로 (15) 공동선과 평화, 사회적 종교적 대화

 

 

교황님은 기득권을 누리는 이들이 자신의 특권을 조금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가난한 이들을 침묵하게 하거나 적당히 구슬리는 거짓 평화의 시도들에 맞서 인간 존엄성과 공동선이 위협받을 때 예언자적 목소리를 드높여야 한다고 단언하십니다. 그리고 책임 있는 시민의식을 강조하시며 평화와 정의와 형제애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네 가지 원칙을 제시하십니다. 첫째, “시간이 공간보다 앞선다.” 시간은 미래의 충만에 희망을 갖고 함께 전진하는 것이고, 공간은 눈앞의 권력과 자기 과시의 수단들을 장악하여 모든 문제를 당장 해결하려는 무모한 시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는 방식으로, 눈앞의 결과에 매이지 말고 인간 삶의 충만함이라는 목표를 향해 꾸준히 나아가야 합니다. 둘째, “일치가 갈등을 이긴다.” 갈등은 우리 가운데 늘 존재합니다. 갈등을 분열의 이유가 아니라 일치를 이루어야 할 다양성으로 이해하고, 이를 기꺼이 받아들여 해결하고, 새로운 전진의 연결고리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셋째, “실재가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는 생각이나 말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약속은 강생으로 실재가 되었습니다. 정치적 선언이나 종교적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는 미사여구로 전락시키는 일을 피해야 합니다. 넷째, “전체가 부분보다 더 크다.” 세계화와 지역화 사이에도 현실적으로 긴장이 존재합니다. 개인이나 지역문화가 자신의 독특한 개성을 보존한 채 공동체 혹은 세계에 진심으로 통합될 때, 언제나 자신의 발전을 위한 새로운 자극을 받게 됩니다. 가난한 이들과 비난받을만한 이들조차 수용하는 보편질서와 공동선을 추구하는 힘이 살아있어야 참된 통합이 가능해집니다. 

 

이어서 교황께서는 “복음화에는 대화의 길도 포함되어 있다.”고 말씀하신다. 교회는 ‘평화의 복음’(에페 6,15)을 선포하고 이를 위해 모든 국가권위와 국제권위와 협력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성과 과학의 빛 역시 신앙의 빛처럼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고, 과학의 진보에 주의를 기쁘게 받아들이면서 그것이 인간의 중심성과 최고 가치를 언제나 존중하게 하고자 합니다. 교회 일치 운동은 “모두 하나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하신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며, 복음화가 반드시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것”(로마 11,29)이기에 우리는 유다민족을 특별한 관심으로 바라봅니다. 우리가 그들과 히브리 성경 본문을 함께 읽고 하느님 말씀의 풍요로움을 이해하는 상호 보완성도 존재합니다. 나아가 모든 비그리스도교 신자들과 나누는 이른바 종교간 대화는 세계평화를 위해 필수조건이고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임무입니다. 이 대화의 성공은 진리와 사랑의 열린 자세에 달려있습니다. [2015년 2월 1일, 연중 제4주일 청주주보 4면,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대전교구 총대리)]

 

 

“복음의 기쁨”을 안고 세상으로 (16) 새로운 선교 열정 - 그리스도와 맺는 인격적 관계

 

 

복음 선포자는 오순절 날 성령께서 오시어 사도들을 하여금 세상에 하느님의 위업을 대담하게 전하게 하신 일을 기억하며, 두려움이 없이 성령의 활동에 자신을 열어 내맡기는 사람입니다. 교황님은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우리는 기도를 토대로 삼고 성령께 간청합시다. 기도가 없으면 우리의 모든 활동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우리의 선포는 공허해질 위험이 있습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허파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확고한 사회적 선교적 투신이 없는 기도나 신비적 제안 혹은 마음을 바꿀 수 있는 영성이 결여된 사회적 사목적 담론들과 관행들은 복음화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기도가 참으로 중요하지만, 사랑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는 사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영성을 제시하려는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역사의 초기부터 역사의 매 시대마다 복음 선포의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교황님은 우리가 겪는 어려움에 넘어지지 말고, 우리에 앞서 시대의 어려움에 맞서 싸운 성인들에게서 배우자고 말씀하시며 그 길을 제시하십니다. 언제나 복음화의 첫 동인은 우리가 받은 예수님의 사랑, 그분께 구원받은 우리의 경험입니다. 진실로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그 사랑에 응답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법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닫힌 마음을 열어주시고 우리의 삶을 흔들어주시도록 간청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나 복음 선포에서 결정적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맺는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예수님의 온 생애를 관상하고 경배하며 그분 안에서 평화를 찾는 일을 해 나갈 때, 그것은 우리의 이성만으로 하는 것과 달리,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우리와 함께 걸으시며 선교 활동의 중심에 서 계시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결코 힘과 열정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선교는 근본적으로 예수님을 향한 열정이기에, 그분과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된 복음 선포자는 예수님께서 뜨거운 사랑의 눈길로 당신 백성을 바라보고 계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분 백성을 향한 열정으로 불타게 되며, 사람들의 삶에 가까이 머무는 영적인 맛을 들이고 이것이 더 큰 기쁨의 원천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 길에서 십자가와 적당한 거리를 두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유혹을 받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사람들의 고통 받는 몸을 어루만져 주기를 바라십니다. 교황님은 말씀하십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그가 더 나은 삶을 살도록 도울 수 있다면 그것으로 내 삶의 봉헌은 의롭게 됩니다. 하느님의 충실한 백성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좋습니다. 우리가 벽을 허물고 우리 마음이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으로 가득할 때 우리는 충만합니다.”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를 사랑이신 하느님과 일치시켜주는 영적인 힘입니다. 이웃에게 눈을 감으면 하느님도 볼 수 없습니다. 풍요롭고 영적인 결실은 눈에 보이지 않고 알아채기 힘든 법이니 눈앞의 결과에 흔들리지 말고 나아갑시다. [2015년 2월 8일, 연중 제5주일 청주주보 4면,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대전교구 총대리)]

 

 

“복음의 기쁨”을 안고 세상으로 (16) 교회의 모상이며 복음화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예수님을 낳으시고 기르신 마리아께서는 성령과 함께 언제나 백성 한 가운데 계십니다. 마리아께서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시며 성령께서 오시도록 간청하셨고(사도 1,14) 성령강림으로 교회가 창립되고 선교의 폭발을 가능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성모님을 사랑하는 제자의 어머니로, 제자를 성모님의 아들로 주시며 당신 어머니를 우리 모두의 어머니로 주신 뜻이 드러납니다. 곧 마리아께서는 제자들의 어머니이시고 교회의 어머니이시고 신자들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교회와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은 마리아께서 하셨듯이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낳아 이 세상에 내어주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일생을 따르며 그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마리아(루카 2,35)께서는 가장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하신 제자이시기에, 우리의 모든 고통을 이해하시는 여인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낳으신 마리아께서는 이 세상에 정의를 낳을 때까지 산고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한 희망의 표징이 되십니다. 

 

또한 순종과 믿음의 여인이신 마리아께서는 교회 복음화의 ‘방식’이 되십니다. 마리아는 연약한 여인이시지만 순종과 믿음으로 어느 인간적 계획이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일을 이루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이 세상에 강생하게 하시고 일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 안에서 겸손과 온유가 나약한 이들의 특징이 아니라 참으로 강한 이들의 덕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에 관하여 일어나는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2,19.51) 되새기는 마리아께서는 크고 작은 사건들 속에서 하느님 성령의 자취를 알아보는 법을 아십니다. 이렇게 정의와 온유의 힘, 관상과 다른 이들에 대한 관심의 힘이, 교회 공동체가 마리아를 복음화의 모범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복음화는 인간적임 힘과 계획으로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하겠다.”(묵시 21,5)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 친히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성모마리아와 함께 이 약속을 향하여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며 성모님께 기도합시다. 

 

교황님이 남기신 기도의 한 구절을 함께 바쳐봅시다. 

 

경청과 관상의 동정녀, 사랑의 어머니, 

영원한 혼인잔치의 신부, 교회의 지순한 모상이시여, 

교회를 위하여 전구하시어 

교회가 스스로 자기 안에 갇히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세우려는 열정에 불타오르게 하소서. 

 

※ 좋은 글을 나눌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님께 감사드립니다. [2015년 2월 15일, 연중 제6주일 청주주보 4면,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대전교구 총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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