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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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신석복 마르코와 구한선 타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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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10-17 ㅣ No.724

한국 교회 124위 순교자전 - 신석복 마르코와 구한선 타대오

 

 

얼마 전 배론성지를 찾아온 경남 창원의 순례자들을 만났는데, 이분들한테서 마산교구 지역에서 순교한 순교자들의 행적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신석복 마르코(1828-1866년)는 밀양 명례에서 농사를 지으며 누룩과 소금행상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밀양에서 김해에 가려면 낙동강을 건너야 했는데, 명례에 나루터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곳에는 일찍부터 사람들이 붐볐고, 피난교우들도 정착하여 살았는데, 신석복은 이들의 권면으로 신자가 된 듯합니다. 형제들은 그가 순교할 때에 신자가 아니었지만 훗날 모두 입교하였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들은 창원 마포에 장사하러 간 그를 며칠을 기다리다가, 행상에서 돌아오는 그를 김해 한림면 가산리 길에서 체포하였습니다. 그러고는 밀양으로 데리고 가서 하루를 지냈는데, 혹독한 심문을 하였습니다. 이튿날 형제들이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빼내려 하였지만 그는 형에게 “일 푼전(分錢)이라도 주지 말라.”고 완강히 거절하였습니다.

 

대구로 압송된 그는 경상감영에서 배교할 것을 강요당했고, 교우촌 정보를 얻으려는 그들에게 혹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신앙을 지켰고, 함구하였습니다. 그는 9일간 감옥에 있으면서 세 차례 형문을 받았습니다. 이때 “천주학을 하느냐?”고 묻자, “하나이다.” 하였습니다. “너를 놓아도 하겠느냐?”고 묻자, “나가도 하겠나이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옷이 온통 피로 젖고 뼈가 부러지고 성한 곳이 없던 그는 1866년 2월 15일(음) 39세의 나이로 순교하였습니다.

 

그의 아들 신영순 이냐시오가 대구로 가서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부친의 유해를 모셔왔지만, 지방 유지들의 반대로 고향에 안장할 수가 없어서 낙동강 건너 한림정 뒷산 노루목(김해시 한림면 장방리 장항)에 안장하였습니다. 진영성당에서 순교자의 묘가 야산에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1975년 12월 1일 본당 묘역(김해시 진영읍 여래리 247번지)으로 이장하였습니다. 그의 아들 영순 이냐시오의 네 아들 가운데 막내가 신순균 바오로 신부(1935년 서품, 1948년 선종)입니다.

 

구한선 타대오(1844-1866년)는 함안군 대산면 미나리골(평림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이곳은 남강 하류로 늪지대이고 낙동강을 만나는 지점과 가까운 곳입니다. 여름이면 넘치는 물 때문에 살기를 꺼려했고, 미나리꽝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총명했던 그는 어려서 유학서적과 잡서를 많이 읽고 요술로 신장(神將) 부리는 법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교우를 만나 천주교를 배운 뒤 다블뤼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어른이 된 뒤 소촌[文山] 교우촌에 있다가 1861년 입국한 이후 경상도 선교를 담당했던 리델(Ridel, 李福明) 신부를 만났고, 리델 신부와 함께 고성 통영 교우촌을 지나 거제도까지 전교하였습니다.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진주 집에서 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리델 신부의 복사였던 그는 혹심한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20여 일 갇혀있으면서 언문으로 좋은 말을 모아 글을 지어 진주영장의 아내에게 올렸더니, 석방되면서 형장 20도를 맞았습니다.

 

이때 매를 맞으면서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영장이 아프지 않도록 헐하게 매를 친다며 “헐장(歇杖)한다.”고 호령하자, 사령이 “만일 더 치면 죽겠나이다.” 하였습니다. 이때 영장이 구 타대오에게 “그런데도 너는 어찌 아프다는 말이 없느냐?” 하고 묻자, 그는 “제 늙은 어머니가 문 밖에 있으매 아프다는 소리를 들으면 기절하겠기에 못하였나이다.” 하였습니다. 영장이 “그러면 어찌 천주학은 하였느냐?” 묻자, “부모를 효도하고 공경하라고 하였기에 하였나이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죽음 직전까지 간 그를 포졸들은 거리에 내다 버렸습니다. 교우들의 도움으로 집으로 돌아왔지만 몇 달 뒤 매를 심하게 맞아 생긴 상처의 독 때문에 순교하였습니다. 죽은 뒤 이마 위에 ‘품’(品)자로 붉은 점이 박혔다고 합니다. 그는 하기리 새대[新垈] 마을 입구 신씨(愼氏)들 묘소 내 구석진 곳에 묻혔습니다. 1959년 함안성당 제찬규 신부는 대산공소 회장과 순교자의 처조카로부터 순교자의 아들이 부친의 묘를 사토(莎土)하는 것을 보았다는 증언을 토대로 그의 묘를 찾아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알려진 그의 묘를 대산 교우들은 해마다 9월에 참배하였습니다. 1976년 9월 대산본당 정중규 신부는 순교자의 무덤이 외교인 묘역 안에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현재 위치인 함안군 대산면 평림리 가등산 자락으로 이장하고 무덤 앞에 비를 세워 순교자의 넋을 기렸습니다. 2002년 5월부터 성역화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신석복 마르코 순교자의 묘를 찾아가는 길은 이러합니다. 남해 고속도로에서 진영IC를 나와 14번 국도, 진영읍내에서 진영역을 지나 1.5km에 진영성당 공원묘지가 있습니다.

 

구한선 타데오 순교자의 묘를 찾아가는 길은 이러합니다. 마산시에서 창녕방향 5번 국도, 칠원면소재지를 1.5km 지나 삼거리에서 좌회전, 의령방면 1041번 지방도로, 도둑고개, 대산초등학교, 학교 입구 100m 지점에 순교자 묘소 안내간판이 있습니다.

 

[경향잡지, 2009년 10월호,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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