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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문헌ㅣ메시지

현대교회의 가르침: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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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7-06 ㅣ No.573

[현대교회의 가르침] (22) ‘교회의 선교 사명’ (1)


그리스도가 세운 교회, ‘성령’ 인도로 복음 선포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재위 1978~2005)의 1990년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Redemptoris Missio)은 현대 교도권의 가르침 중 거의 유일하게 신학적 · 사목적 · 교리교육적 · 선교적 차원을 모두 망라해서 종합적이고 포괄적인 전망을 제시하는 매우 중요한 문헌이라 할 수 있다. 이 회칙은 기본적으로 복음 선포를 위한 교회의 선교 사명을 말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서 신학적으로도 중요한 핵심 개념과 원리들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거의 사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의 ‘새로운 복음화’(New Evangelization)를 위해서도 여전히 유효한 성찰과 전망을 드러낸다. 사실, ‘교회의 선교 사명’은 현대의 조직신학과 선교신학 논문들 중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교황 문헌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는 2013년 11월 발표되어 현재 프란치스코 교황(재위 2013~)의 올 8월 방한을 앞두고 한국교회에서 광범위하게 읽혀지고 인용되는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Gaudium Evangelii)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전제 문헌이라 할 수 있다. 즉, ‘복음의 기쁨’에 담겨져 있는 신학적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선교 사명’을 먼저 정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두 문헌 사이의 연속성을 깨닫고 이해하며, 다른 한편으로 과거에 비해 현재 무엇이 어떻게 더 발전되어왔는가를 살펴본다면, ‘복음의 기쁨’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이해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 중개와 그 외의 참여적 중재들 

 

‘교회의 선교 사명’ 제1장(4~11항)에서는 모든 복음 선포의 중심에 위치한, 유일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을 제시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유일성과 보편성을 명확하게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이십니다. 따라서 아무도 성령의 감도로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느님과 친교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5항) 

 

그런데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 중개와 관련하여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개념 하나가 제시된다. 그것은 바로 ‘참여적(참여된) 중재’(participated mediation) 개념이다. “그리스도의 유일하고 보편적인 중개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여정에 장애가 되기는커녕 하느님께서 몸소 정해 주신 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이 사실을 온전히 알고 계십니다. 다양한 종류와 정도로 참여하는 중재 형태들이 배제되지는 않지만, 그러한 중재 형태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중개에서만 의미와 가치를 얻으며, 결코 그리스도의 중개와 같거나 그것을 보완할 수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5항) 

 

이 신학적 개념은 교회 안과 밖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구원을 향한 모든 열망과 기획과 노력이 결국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 중개 안에 종속적으로 참여되고 수렴되어 그분을 통해서만 진정 성취되고 종국적으로 완성될 수 있는 것임을 드러낸다. 사실, 우리가 여러 가지 직무와 방법으로(교회 지도자, 사목자, 신학자, 수도자, 교리교사, 선교사, 봉사자 등의 차원에서) 복음 메시지를 전하고 헌신하는 것도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 중개에 모두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성모 마리아의 중개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 중개에 종속되는 임무임을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의 「교회 헌장」 62항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힌다. “실제로 어떠한 피조물도 강생하신 말씀, 곧 구세주와 결코 똑같이 헤아려질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교역자나 신자들이 여러 모양으로 참여하듯이, 또 하느님의 유일한 선성이 피조물들 안에서 실제로 갖가지 모양으로 퍼져 나가듯이, 구세주의 유일한 중개도 피조물들 가운데서 그 유일한 원천에 참여하는 다양한 협력을 가로막지 않고 오히려 불러일으킨다. 마리아의 이러한 종속적인 임무를 교회는 의심 없이 믿고 끊임없이 체험하며, 신자들의 마음에 권장하여 어머니의 이러한 도우심과 보호로 중개자, 곧 구원자를 더욱더 가까이 따르자고 한다.” 

 

그런데 ‘교회의 선교 사명’ 5항에서는, 특히 그리스도인이 복음 선포 및 종교 간 대화의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타 종교 전통의 구원 의미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식별을 위한 규범으로서 이 ‘참여적(참여된) 중재’ 개념이 미리 제시된 것이라 분석 가능하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다운 교회를 모르는 선의의 타 종교인들의 구원 가능성을 개방적으로 인정하고 타 종교 전통의 구원론적 함축성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 중개에 대한 참여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사목 헌장」 22항에서 천명하듯이, “성령께서 하느님만이 아시는 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이 (그리스도) 파스카 신비에 동참할 가능성을 주신다”고 우리는 믿기 때문이다.

 

 

선교의 주역이신 성령 

 

‘교회의 선교 사명’ 제3장(21~30항)은 ‘선교의 주역이신 성령’에 관해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진 교회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생명의 활력을 얻으며 그 역동적 사명을 수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명 전체의 으뜸 주역이신 성령께서는 당연히 만민 선교를 인도하신다는 설명이 이루어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성령 안에서 땅 끝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장엄한 파견 명령을 받았다. 그리하여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기적을 행하는 사도들의 활약상이 잘 드러난다. 

 

사실, 성령께서는 온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선교사로, 복음 선포자로 만드신다. 성령에 의한 내적 친교(2코린 13,13 참조)로 이루어지는 교회 공동체는 또한 세상을 향해 파견되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교회 공동체의 성령론적 본질이다. 성령에 의한 교회적 친교는 곧 성령의 인도를 따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적 사명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친교와 일치를 주관하시는 성령께서는 세상 안에서도 신비로이 현존하시고 작용하시며 그리스도인의 복음 선포를 이끄신다. 복음 선포는 우선적으로 이 세상의 반복음적·비복음적인 가치에 대한 예언자적 고발이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증거이다. 그리고 이러한 복음 선포 중에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세상 안에 뿌려져 있는 그리스도 ‘말씀의 씨앗들’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에서 드러나는 ‘완성론’ 혹은 ‘성취론’적 선교관과도 같이, 세상 안에 묻혀 있는 이 ‘말씀의 씨앗들’을 정화하고 성장하게 함으로써 또한 복음화가 촉진되고 이루어진다. 

 

‘교회의 선교 사명’ 28항은 이러한 복음화 작업을 ‘성령의 보편적 현존과 활동’이라는 신학적 원리를 통해 설명한다. “성령께서는 특별한 방식으로 교회와 그 구성원들 안에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현존과 활동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보편적인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성령께서 종교적인 활동들을 포함한 인간의 활동들 안에, 그리고 진리와 선과 하느님께 이르려는 인간의 노력 안에서 발견되는 ‘말씀의 씨앗’을 통하여 모든 인간의 마음 안에 작용하고 계심을 상기시킵니다. 성령의 현존과 활동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와 역사, 민족, 문화, 종교에도 영향을 줍니다. 실제로 성령께서는 역사적 순례의 도상에 있는 인류를 이롭게 하는 모든 고귀한 생각과 활동의 원천이십니다. 성령께서는 다양한 풍습과 문화 안에 있는 ‘말씀의 씨앗들’을 뿌려서 그 씨앗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성숙에 이르도록 준비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성령의 보편적 활동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특별한 활동과 분리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실제로, 교회에 생명을 주시고, 교회가 그리스도를 선포하도록 재촉하시며, 모든 개인과 민족에게 선물을 주시어, 교회가 이 선물을 발견하고 대화를 통하여 받아들이고 증진하도록 이끌어주시는 분도 언제나 교회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이십니다. 어떠한 형태의 성령의 현존도 존경과 감사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이러한 현존을 식별하는 일은 교회의 책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주시고자(요한 16,13 참조) 교회에 당신 성령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 박준양 신부는 1992년 사제로 서품, 로마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교의신학 전공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의신학 교수로 봉직하고 있는 박준양 신부는 신학과사상학회 편집위원장 및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총무, FABC 신학위원회 전문신학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4년 7월 6일, 박준양 신부]

 

 

[현대교회의 가르침] (23) ‘교회의 선교 사명’ (2)


그리스도 따라 걷는 것이 선교 영성의 핵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재위 1978-2005)는 1990년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Redemptoris Missio)을 통해, 오늘날 복음화 사업의 장애물로 ‘열성의 부족’과 ‘그리스도인들의 악표양’, 그리고 ‘종교 무차별주의’ 및 그 외 ‘복음화를 방해하는 핑계들’을 지적한다.(36항 참조) 그것은 바로 현대의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도전이며 어려움이다. 그리고 이는 현재의 프란치스코 교황(재위 2013- )이 권고 「복음의 기쁨」을 통해 지적하듯이, 거의 사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계속 발견되는 문제들이기도 하다.

 

 

복음화 사업의 장애물과 그 극복 

 

첫째, ‘열성의 부족’은 인간 내면에서 비롯되는 요소이기에 그만큼 더욱 심각한 어려움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피로나 환멸, 타협, 무관심,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쁨과 희망의 결여”로 나타난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의 악표양’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과거와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의 분열, 그리스도교 국가들의 신앙 상실, 사도직 성소의 감소, 그리스도의 모범에 따라 살지 않는 신자들과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의 악표양” 등은 교회의 선교 활동에 커다란 장애가 되는 것이다. 셋째, ‘종교 무차별주의’는 “그릇된 신학적 견해에 근거하고 ‘모든 종교가 다 나름대로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낳게 하는 종교적 상대주의를 그 특징으로 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복음화를 방해하는 핑계들’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요한 바오로 2세가 지적한, 이렇듯 선교를 방해하는 여러 심각한 문제들을 현 교황 프란치스코는 「복음의 기쁨」을 통해 다음과 같이 거듭 설명한다. 즉, 이기적인 나태(81-83항), 무익한 비관주의(84-86항), 교회 안에 침투한 영적 세속성(93-97항), 분열과 싸움(98-101항), 기타의 문제들(평신도의 역할과 책임 부족, 여성의 소외, 청소년들의 떠남, 성소의 부족과 감소 등: 102-107항)을 우리는 오늘날 대면하고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신앙적 확신이 필요하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의 선교 사명」에서 말한다. “이 확신은 신앙에서, 곧 교회 선교의 주역은 우리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시라는 신념에서 옵니다. 우리는 협력자들일뿐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고 나서는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하고 말해야 합니다.”(36항)

 

 

만민 선교의 범위 

 

「교회의 선교 사명」 제4장은 만민 선교의 범위에 대하여 설명한다. 사실, 그리스도의 보편적 명령 덕분에 만민 선교에는 원칙적으로 그 한계가 없지만, 실질적인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범위를 정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요한 바오로 2세는 말한다.(37-38항 참조) 

 

선교 활동은 일반적으로 특정한 지역과 관련해서 규정되어 왔다. 이런 관점에서, 전통적인 ‘지리적 기준’은 다소 불명확하고 늘 잠정적이긴 하지만, 여전히 선교 활동이 나아가야 할 경계를 가리키는 유효한 지표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현대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급속한 도시화와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들의 팽창을 고려해야 한다. 물론,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선택’이란 측면에서, 버림받고 소외된 지역을 항상 특별히 생각해야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풍속과 생활양식과 더불어 새로운 형태의 문화와 커뮤니케이션이 더 폭넓은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는 대도시들”에 선교 역량을 집중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미래를 위한 선교를 말할 때, 결코 젊은이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교회의 미래인 그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또 현대 세계의 새로운 현상인 많은 이민자와 난민자들에 대한 사목적 배려가 선교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나아가, 이러한 집단 이민의 원인이 되는 빈곤 현상에 대한 교회적 관심과 배려 또한 요구된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필요한 복음 선포의 새로운 영역으로서, 현대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내는 새로운 문화 안에 그리스도교 메시지를 통합시키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하겠다.

 

복음화를 위해 파견되신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고서는 선교를 이해하거나 수행할 수 없다. 사진은 안동교구 신기동성당 벽화 ‘복음 선포를 위해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예수님’,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부통(Andre Bouton, 1914-1980) 신부 작.

 

 

선포와 대화 

 

「교회의 선교 사명」 제5장(41-60항)은 구체적인 선교 방법으로 ‘증언(선포)과 대화의 관계’에 대하여 설명한다. 먼저, 복음화의 첫 형태는 삶의 증언임을 분명히 밝힌다. “증언의 첫 형태는 선교사와 그리스도인 가정, 그리고 교회 공동체의 삶 자체로서, 이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보여 줍니다. 모든 인간적 한계와 약점에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단순한 삶을 사는 선교사는 하느님과 초자연적 실재의 표징입니다. 실제로 교회 안의 모든 사람은 하느님이신 스승을 본받고자 노력하면서 이러한 종류의 증언을 할 수 있고 또 하여야 합니다. 많은 경우에 이러한 증언이야말로 선교사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42항) 

 

한편, 오늘날 요구되는 종교 간 대화는 복음화 사명의 일부라고 이해할 수 있다. “상호 인식과 상호 기여의 길이며 도구로 이해되는 대화는 만민 선교에 배치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대화는 선교와 특별한 연관이 있고 선교의 한 표현입니다. 사실 이 선교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모르거나 대체로 다른 종교에 속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합니다.”(55항) 

 

하지만 대화가 복음화를 모두 대신할 수는 없다. “교회는 구원 경륜에 비추어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일과 종교 간 대화에 참여하는 일 사이에 어떠한 대립이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둘을 교회의 만민 선교 안에 연결시킬 필요가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이 두 요소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지만, 서로 구별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 두 가지를 혼동하거나 이기적으로 이용하거나 서로 맞바꿀 수 있는 동등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55항) 

 

그렇다면 복음화를 위한 대화는 과연 어떤 정신과 자세로 이루어져야 하며 어떤 열매를 맺게 되는가? “대화는 계략이나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원칙과 요구와 품위를 지닌 활동입니다. 그것은 ‘어디서나 불고 싶은 데로 부시는 성령’(요한 3,8 참조)께서 인간 안에 이루어 놓으신 모든 것에 대한 깊은 존중을 요구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대화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비추는 진리의 빛’인 ‘말씀의 씨앗’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씨앗들은 각 사람 안에 그리고 인류의 종교 전통들 안에서 발견됩니다. 대화는 희망과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성령 안에서 열매 맺습니다. 다른 종교들은 교회에 긍정적인 도전이 됩니다. 그 종교들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현존과 성령의 작용의 표지들을 발견하고 깨닫도록, 그리고 교회가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깊이 성찰하고 모든 사람의 선익을 위하여 받은 계시의 충만함을 증언하도록 자극하는 것입니다.”(56항) 

 

이처럼 선교를 위한 대화는 매우 광범위한 영역에서 이루어지므로 구체적으로 여러 형태와 표현을 지닐 수 있다. “여러 종교 전통의 전문가들이나 공식 대표들 간의 교류에서부터 종교적 가치의 완전한 발전과 수호를 위한 협력에 이르기까지 그 영역은 다양합니다. 삶의 대화를 통하여 여러 종교의 신봉자들은 일상생활 안에서 각자의 인간적, 영적 가치들을 서로 증언하고, 더욱 정의롭고 우애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그러한 가치들을 따라 살도록 서로 돕습니다. 모든 신자와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은 비록 정도와 형태는 다를지라도 대화를 실천하도록 부름 받습니다. 이 영역에서는 평신도들의 기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57항)

 

 

선교 영성 

 

「교회의 선교 사명」의 마지막 제8장(87-91항)은 ‘선교 영성’에 대하여 말한다. 이는 그리스도론적이고 또한 성령론적인 선교 영성이다. “선교 활동에는 특수한 영성이 필요합니다. 이 영성은 특히 하느님께서 선교사로 부르신 모든 사람에게 해당됩니다. 이 영성은 무엇보다도 성령에 대한 완전한 순종의 삶으로 표현됩니다. 이러한 순종을 통해 성령께서는 내면에서부터 우리 자신을 형성시켜주시어 우리가 더욱더 그리스도를 닮게 하십니다. 성령의 은총과 힘으로 우리 안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반영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를 증언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순종은 우리가 선교 영성의 근본 요소인 용기와 지혜의 은사를 받게 해 줍니다.”(87항) 

 

결국, 선교 영성이란 한마디로 그리스도를 깊이 알고 그분을 닮아가는 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선교 영성의 본질적 특성은 그리스도와 맺는 긴밀한 친교입니다. 우리는 복음화를 위하여 파견되신 분이신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고서는 선교를 이해하거나 수행할 수 없습니다.”(88항) 그러므로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버지 하느님께 온전히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필리 2,5-8 참조)의 길을 따라 성실히 걸어감이 바로 선교 영성의 핵심인 것이다. [가톨릭신문, 2014년 7월 13일, 박준양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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