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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한국천주교 창설주역 가운데 권일신, 권철신, 이승훈에 대한 순교 사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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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9-28 ㅣ No.718

수원교구 주최 제3차 한국순교자 시복시성을 위한 세미나


한국천주교 창설주역 가운데 권일신, 권철신, 이승훈에 대한 순교 사실과 그 평판에 관하여

세 사람의 신앙과 공적 등에 대한 새롭고 폭넓은 시각 필요

 

 

- 한국순교자 시복시성을 위한 세미나 종합토론에서 최인각 신부가 발표하고 있다.

 

 

수원교구 시복시성위원회가 주최한 제3차 한국순교자 시복시성을 위한 세미나가 19일 정자동주교좌성당에서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 가운데 권일신ㆍ권철신ㆍ이승훈에 대한 순교사실과 그 평판에 관하여'를 주제로 열렸다.

 

발제자과 논평자들은 세 사람에 대한 신앙과 순교평판에 대해 폭넓게 논의했다. 순교ㆍ배교 여부에 관심을 집중하기보다는 그들의 신앙에 대해 좀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심상태 몬시뇰 등 6명의 사제ㆍ학자가 발제를, 여진천(배론성지 주임)ㆍ장동하(가톨릭대학교)ㆍ배달하(원주교구 대하본당 주임)ㆍ김성태(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신부, 차기진(양업교회사연구소) 박사, 조광(고려대) 교수가 논평을 담당했다. 다음은 발제문과 논평 요약이다.

 

 

이승훈 베드로의 교회 활동과 신앙고백 : 순교 여부와 관련하여 - 원재연 박사(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한국 교회사 연구에서 이승훈(베드로)은 교회창립의 원공(原功)과 신앙부인의 원죄(原罪)를 동시에 덮어쓴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이승훈이 1785년, 1791년 두 차례 공개적으로 배교를 선언했지만 일시적인 박해 위협에서 벗어나려는 '거짓 배교 선언'에 불과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승훈이 신앙 때문에 죽었으나 배교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았다는 평가와 달리 박해자와 척사론자들은 그가 "스스로 그리스도교 신앙 때문에 죽는다"는 사실을 외형적으로 입증해주는 결안(結案)을 남겼다고 말한다. 그의 후손은 유시(遺詩)를 구전으로 전하며 순교사실을 확신했다.

 

이승훈은 조선교회 창설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던 수많은 천주교 서적들을 가져와서 교리를 보급하고 신앙공동체를 확산시킨 '원죄' 때문에 박해자들의 칼날을 피해 살아날 가능성이 없었고 어떤 변명을 해도 박해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를 배교자로 죽음을 맞이했다고 단죄하는 것은 성급하고 안이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천주교 수용과 전파의 토대를 구축한 권철신과 권일신 - 서종태 박사(호남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권철신은 천주교를 수용하는 데 필요한 사상적 토대를 구축함으로써 천주교의 수용 및 전파에 큰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천주교를 전파할 때 천주교를 수용해 한국 교회를 창설하고 지방 각지에 신앙공동체 설립을 주도한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권철신의 제자이거나 그의 학문적 영향을 받은 이들이었다.

 

권철신의 아우 권일신은 1784년 겨울에 입교, 그의 가족들에게 천주교를 믿도록 권유했다. 이후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흔들림 없이 교회에 남아 교회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슬기롭게 난국을 헤쳐 나갔다.

 

1785년 추조적발사건과 1791년 제사를 금지하는 구베아 주교의 사목서한으로 이벽과 이승훈이 교회를 멀리할 때도 흔들림 없이 교회에 남았다. 권일신은 천주교가 널리 전파되고 안정적으로 발전해 갈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한 공로가 크다.

 

 

사료를 통한 권철신ㆍ권일신의 생애와 신앙에 대한 재구성 - 박광용 교수(가톨릭대학교)

 

권일신은 조상제사 문제 발생 이후, 반대파들에 의해 '교주'라고 고발될 당시까지도 사대부로서 거의 유일하게 남았던 초기 교회 지도자로서, 당시 교회의 기둥이었다는 평판은 사실로 인정된다. 그가 작성한 회오문(悔悟文)으로는 진정한 배교여부를 확인할 수 없으니 그의 심복제자들이 이후 교회의 기둥으로서 성직자 영입을 달성했다는 사실들을 더 적극적으로 평가해야할 것이다.

 

권철신의 경우 저명한 서학 교우라는 사실을 죽을 때까지 적극 벗어버리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권철신은 네 번째 문초에서 윤유일의 북경 왕래 및 주문모 신부 영입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관에 고하지 않았다는 지정불고를 인정하고 받아들였고 2차 심문 후에는 노령과 지병으로 형이 정지됐지만 그 당일에는 심문하는 장의 한도인 30도를 맞고 나흘 뒤에 후유증으로 죽음에 이르렀다. 이는 곧 '주재자에 대한 올바를 흠숭' 문제인 성직자 영입 문제에서 자신의 죽을 자리를 찾았다는 의미로서, 그 이전 언사에 관계없이 이 자세가 시종일관된 것임을 말해준다.

 

 

한국천주교회 창설 주역의 생애와 순교사실과 그 평판에 관한 연구 - 류한영 신부(양업교회사 연구소 소장)

 

문초기록에 의하면 권일신은 1791년 11월 8일 형조에 투옥되어 일곱 차례 신문을 당하면서 신앙을 용감하게 증거하고 제주도 유배에 처해졌다. 권일신은 정조 임금의 회유 지시로 15일에 회오문(悔悟文)을 썼고 유배지는 예산으로 바뀌었다. 그는 죽음 직전에 순교사실을 의심하게 하는 일시적 허물을 남겼지만 일관된 그의 활동과 신앙의 증거는 하느님의 은총 속에 생을 마감했다고 볼 수 있다.

 

권철신은 직접 전도는 하지 않았으나 그가 천주교를 믿고 있다는 사실 자체로 대중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다블뤼 주교는 그의 평소 삶과 덕행, 구전에 전해지는 순교에 대한 의지 등을 고려해 그의 죽음을 순교로 판단했다.

 

이승훈은 1785년 추조적발 사건 이후 집안의 박해에 굴복, 자기 변호문인 벽이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 후 집안과 친구들의 박해 속에서도 인내하며 신앙을 지켰다. 이승훈은 인간적 연약함과 보유론적 입장의 유지로 인해 신앙을 배반하고 회개하기를 반복하다 끝내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께 바치게 됐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창설주역에 대한 시복시성을 위한 교회법적 구성요건 - 최인각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권철신ㆍ권일신ㆍ이승훈은 조선 사회 최고의 지성인이자 지도자들이었으며 조선 교회 최고의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이 자신만 살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가성직제도, 북경에 서신 전달, 성직자 영입, 그리고 한국교회 전체를 위한 고민 등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세 사람의 신문내용과 결의안을 보면 표면상으로 신앙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그들이 신앙을 부정하고 배교했는가?'를 반문하면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박해자들이 세 사람에 대해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겉으로만 그렇게 한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조선에 하느님 백성을 돌보고 보호하며, 교회를 충실하게 유지하는 평신도 사목자로서 본분에 충실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 세 사람이 보여준 태도는 이들이 갖고 있던 천주에 대한 신앙, 나라에 대한 충성, 부모에 대한 효도, 그리고 사목자로서 하느님 백성에 대한 사랑이 종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를 살리고자 하는 상생의 철학과 영성을 갖고 있던 이들이었다.

 

 

이승훈ㆍ권철신ㆍ권일신의 죽음과 순교 문제 재조명 - 심상태 몬시뇰(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장)

 

한국교회 창설 주역인 이승훈ㆍ권철신ㆍ권일신이 신앙을 부인하고 교회를 멀리했다고 전해지는 당시 관변 기록을 근거로 단칼에 무 베듯 그들의 처신을 나약하고 부끄러운 배교로 규정하는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이들이 1791년 이래 처하게 된 상황의 심각성에 주목해야 한다. 북경에 밀사를 파견해 한국교회 사정을 보고하고 성직자 파견을 간청해 낭보를 기대하던 이들에게 조상제사 금지 훈령이 떨어진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망연자실했을지 헤아릴 필요가 있다. 그들은 다른 신도들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대역무도한 죄인으로 곧바로 참수형에 처해지고 50살에 장 100도에 해당하는 엄형을 받은 끝에 삶을 마쳐야 했다. 모두 그리스도 신앙 때문에 그들이 겪어야 했던 일이었다.

 

한국교회 창설 주역인 세 사람의 치열했던 구도적 도정을 뒤밟아 따르며 그분들의 고결한 삶과 장렬한 죽음에 부합하는 영광스러운 자리를 마련하는 일에 우리 후손 모두 적극 동참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논평

 

교회 역사에 나타나는 사건과 인물은 역사적 연구와 함께 신학적 판단이 한데 이뤄져야 한다.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의 죽음이 배교와 순교의 범위로만 한정돼 논의되고 있는 느낌이다. 한 쪽에서 배교로 이해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신앙 증거자의 죽음(순교)으로 대응한다. 배교와 순교의 범위를 벗어나 창립주역 세 명이 오늘날 한국 교회와 신앙인들에게 모델이 될 수 있는 점을 밝혀보았으면 한다.

 

권철신, 권일신의 죽음은 조상제사문제와 직결돼 있으며 당시 교회가 조선의 전통문화와 효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는 문제점의 결과이기도 하다. 구베아 주교는 조선교회 탄생을 기적적 사실로 인식했으므로 권철신과 권일신은 기적의 주인공이다.

 

시복ㆍ시성을 논의할 때는 불가피하게 순교여부에 관한 문제가 부각될 수밖에 없다. 순교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 실제로 죽음을 당해야 하고 △ 그 죽음이 신앙을 반대하던 사람들에 의해 초래돼야 하며 △ 진리를 옹호하기 위해 죽음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권철신과 권일신의 죽음을 검토해 보면 첫 번째, 두 번째 조건은 부합하지만 마지막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평화신문, 2009년 9월 27일, 정리=임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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