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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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아일랜드 글렌달로그: 두 개의 호수가 만나는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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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9-23 ㅣ No.717

세계 교회 신앙유산 순례 - 아일랜드 글렌달로그


두 개의 호수가 만나는 계곡

 

 

낙농과 목축업 국가인 아일랜드는 한국에 잘 알려진 나라가 아니다. 아일랜드는 사계절 온통 초록색의 찬란한 향연이 벌어지는 곳이다. 50가지가 넘는 초록의 고운 빛은 여리고 어린 연두색에서부터 한여름의 싱싱함과 열정이 살아 숨 쉬는 바다처럼 깊고 짙은 초록까지, 마치 아일랜드의 바다 물빛처럼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히 녹아들게 한다.

 

켈트 문화로 더 잘 알려진 아일랜드는 오래된 가톨릭 국가로 많은 성지가 있다. 대부분 아일랜드의 성지는 친근한 아일랜드 사람만큼이나 화려하지도 웅장하지도 않지만 오랫동안 사람의 마음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잔잔한 여운이 있는 곳들인데 그 중 한 곳이 글렌달로그(Glendalough)가 아닌가 한다.

 

내가 속한 성 골롬반 외방선교수녀회는 중국 선교와 아시아 선교를 위해 아일랜드에서 창립된 국제 수녀회로 수녀회 모원이 아일랜드 위클로 주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다. 글렌달로그도 같은 위클로 주 안에 있어 모원을 방문하는 수녀들, 특별히 아일랜드를 처음으로 방문하는 수녀들에게 이곳은 오리엔테이션에 들어가는 단골 코스이다.

 

첫 서원 후에 페루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나는 모원에서 열린 젊은 수녀들의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고, 그 프로그램을 통해 글렌달로그 성지를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두 개의 호수가 만나는 계곡

 

수도인 더블린에서 글렌달로그가 있는 위클로까지는 버스로 약 2시간 남짓 걸린다. 위클로는 아일랜드에서 기후가 좋고 경관이 빼어난 곳으로 유명해서 아일랜드의 정원이라고 불린다. 산과 호수가 조화를 이루는 글렌달로그에는 성 케빈의 수도원과 성당이 있고, 이곳을 지나 두 개의 호수가 있는 아름다운 계곡에 들어서면 시공을 초월하여 금욕과 고독 안에서 기도에 몰두하던 6세기의 케빈 성인의 수려한 모습을 만날 것만 같다.

 

글렌달로그는 ‘두 개의 호수가 만나는 계곡’이라는 의미인데 전승에 따르면 한 천사가 성 케빈을 이 거룩한 곳으로 인도하였다고 한다. 성 케빈은 그가 쓴 글 안에서 두 개의 호수가 만나는 글렌달로그에서 무시무시한 호수 괴물과 싸움을 벌이는 장면에 대해 설명한다. 여기서 그가 싸운 무시무시한 괴물은 바로 양심성찰을 통해서 바라본 자기 자신, 자신 안에 있는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유혹과 도전으로 해석된다.

 

‘성 케빈의 무덤’으로 알려진 동굴 안에서 그는 기도와 금욕생활로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데 그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그를 따르는 공동체가 생기게 되고 수도 공동체가 세워진다.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두 호수의 고요와 성스러움은 사람을 압도하고 경건하게 한다. 수도원을 중심으로 성당과 공동체의 일터, 그리고 성경을 필사하고 공부하던 곳과 손님 숙소, 약국 그리고 농부들의 집이 그 둘레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글렌달로그가 세워질 무렵에는 바이킹이 빈번하게 출몰하여 그들은 둥글고 좁고 높은 탑을 지었고, 바이킹이 침범해 오면 탑 위로 올라가서 올라갔던 사다리를 치워 들어오는 입구를 막았다. 그나마 건물의 잔해가 지금까지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은 건물이 석조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바이킹들이 지붕까지 둥글게 돌로 덮는 석조 기술이 뛰어난 아일랜드의 석공을 납치하려고 침입했다는 말까지 나왔다.

 

 

고요와 침묵 속에서

 

은수자였던 성 케빈에게 수달 한 마리가 연어를 가져다주었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그는 동물들과 교감이 뛰어난 성인이었다. 자연을 감싸 안은 것처럼 자리 잡은 공동체의 건물들도 그렇고, 사람의 마음을 평화롭고 성스럽게 하는 웅장하면서도 침묵과 고요를 가득 품은 두 개의 호수와 자연을 통해서 성령의 감도하심과 우리 안에 힘과 감동을 주시는 하느님의 손길과 음성을 생생하게 느끼고 듣게 된다.

 

두 개의 호수는 정겹게 흐르는 작은 호수와 힘차게 자라는 갈참나무가 감싸 안은 위쪽 큰 호수로 이루어져 있다. 호수는 물이 차고 맑아서 물밑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이다. 호수 물에 발을 담그고서는 케빈 성인이 고행했던 동굴을 올려다보자니 마치 성 케빈의 매처럼 날카롭고 빛나는 눈이 호수 아래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아 마음이 서늘해졌다.

 

글렌달로그의 공동체가 모여 사는 곳에 들어가보면 케빈의 십자가를 볼 수 있다. 켈트 십자가를 통해서 보듯이 아일랜드 선교에 나선 이들이 토착 신앙인 태양신의 상징을 십자가에 접목시켜 토착민의 거북함과 위화감을 무마시켰다는 것을 들으면서 선교사들의 융통성을 만날 수 있었다.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통해

 

돌로 된 마을 안에서 눈을 감고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심장의 박동소리를 들어보라는 소리에 순례에 참여했던 우리 수녀들은 모두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눈을 감고 침묵 안에서 무언의 대화를 시작했다. 우리는 그렇게 글렌달로그의 마을 중심에 꼼짝 않고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다시 얼굴을 들어 풀이 여기저기 무성한 주위를 둘러보니 모든 것이 생명을 띠고 다시 살아 숨 쉬면서 나에게 말을 건네오고 있었다. 수세기의 침묵과 공백을 깨고 생생한 언어로 말이다.

 

글렌달로그를 찾는 이들이 내적치유를 체험하게 된다면, 아마 고요와 평화 그리고 이미 시대를 지났으나 성스러운 장소 안에 내제되어 있는 성스러운 기운과 그 안에 살았던 이들의 숨결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는 성지만이 갖는 흔하지 않는 감동과 아름다움을 통해서일 것이다.

 

잠언에서 말하듯 내가 길을 걸을 때 나를 인도하시고, 내가 잠잘 때 나를 지켜주시며, 내가 깨어있을 때 나의 벗이 되어주시는 주님을 모든 것 안에서 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통해서 만나는 것이다.

 

[경향잡지, 2009년 9월호, 우정숙 수산나(성 골롬반 외방선교수녀회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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