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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인] 유다인 숨겨주다 처형된 울마 가족 9명 시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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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9-14 ㅣ No.2194

유다인 숨겨주다 처형된 ‘울마 가족’ 9명 시복 된다


폴란드 울마 부부와 일곱 자녀,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다인들 숨겨주다 처형

 

 

전쟁 중에 유다인들을 숨겨주다 발각돼 전원 즉결 처형된 울마(Ulma) 가족. 위크토리아 부인의 배가 만삭인 것으로 미뤄 발각 직전에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울마 가족 추모박물관 제공

 

 

폴란드 남동부의 작은 마을 마르코바에서 10일 아주 특별한 시복식이 거행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다인들을 숨겨주다 발각돼 나치 독일에 의해 살해된 유제프ㆍ위크토리아 울마 부부와 자녀 7명 등 울마(Ulma) 일가족 9명이 이날 동시에 복자로 선포된다. 자녀 중에는 엄마 뱃속에서 9개월을 보내고 막 세상으로 나오려던 태아도 있다. 교회가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까지 시복 대상에 포함시킨 유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목숨 걸고 유다인 숨겨줘

 

가장인 유제프 울마는 마을에서 인정받는 농부이자 가톨릭 청년단체 활동가였다. 1942년 나치에 쫓기던 유다인 8명이 찾아와 보호를 요청하기 전까지 울마 가족은 별 탈 없이 행복하게 살았다. 유제프는 그들의 애원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민족과 종교를 떠나 모두 똑같은 하느님 자녀인데, 단지 유다인이라는 이유로 끌고 가 학살하는 나치의 광기에 치를 떨던 의인이었다. 당시 독일군 점령지에서 유다인을 보호하다 발각되면 사형에 처해졌다. 유제프는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을 1년 반 넘게 농장 다락방에 숨겨줬다. 집이 마을 외곽에 있어 장기간 은닉이 가능했다.

 

하지만 1944년 3월 24일 한 부역자의 밀고로 들통이 났다. 독일군과 비밀경찰은 그날 농장에 들이닥쳐 유다인 8명과 울마 가족 9명을 밖으로 끌어내 즉결 처형했다. 가장 어린아이는 젖먹이였다. 총살당한 유다인 중에 3살짜리 소녀도 있었다.

 

목격자 증언에 따르면 그날 독일 경찰 간부는 마을 남성 서너 명에게 마차를 끌고 따라오라고 명령했다. 간부는 농장으로 향하면서 마부들에게 “유다인을 돕는 ‘폴란드 돼지들’은 어떻게 도살되는지 보여주겠다”고 소리쳤다. “총소리와 비명, 절규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쓰러진 위크토리아 부인의 다리 사이에서 신생아의 머리를 봤다”는 등의 증언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울마 가족은 한동안 지역 사회에서 영웅은커녕 비극적으로 몰살당한 가족으로만 기억됐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울마 부부의 영웅적 덕행에 대한 증언이 나오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부부는 숨죽이면서 유다인들을 숨겨주고 먹여 살렸다”고 말했다. 특히 이 지역 출신인 국립추모연구소 마테우스 슈피트마 부소장이 오랜 세월 울마 가족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다. 슈피트마 부소장은 OSV와의 인터뷰에서 “부부는 자신들이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유다인들이 수용소로 끌려가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며 “그들의 신앙이 그런 위험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영감을 줬다”고 말했다.

 

 

유다인 돕다 희생된 폴란드인 상징

 

지역 사회에서 시복 얘기가 나온 것은 2000년 이후다. 슈피트마 부소장은 2003년 본당 신부로부터 시복 준비 얘기를 듣는 순간 “벼락을 맞은 것처럼 놀랐다”고 회고했다. 이후 그는 교구와 본당, 지역 주민들과 함께 울마 가족을 추모하는 기념비를 세우고 출판물을 발간했다. 2016년 추모박물관 개관식에는 안제이 두다 대통령까지 참석해 관심을 보였다. 교황청은 시복심사 과정에서 울마 가족의 목숨을 건 이웃 사랑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전해졌다.

 

슈피트마 부소장은 울마 부부가 전쟁 중에 많은 자녀를 낳아 기른 점에도 주목했다. 그는 “그 집에는 늘 웃는 아이들과 그들을 매일 먹이고, 씻기고, 옷 갈아 입혀 키우는 부모가 있었다”며 “그때는 폴란드 역사상 가장 좋았던 시기가 아니라 최악의 독일 점령기였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오늘날 출산과 양육이 자신들 경력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는 부부들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울마 가족의 희생은 사실 폴란드보다 이스라엘이 먼저 기렸다. 이스라엘은 이미 1995년 울마 가족에게 ‘열방의 의인(Righteous Among Nations)’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나치의 유다인 대학살(홀로코스트) 기간에 목숨을 걸고 유다인을 구한 비유다인에게 부여하는 칭호다.

 

연구 자료에 따르면 홀로코스트 중에 폴란드인 30만 명 이상이 사형 위험을 무릅쓰고 유다인들을 보호했다. 이 가운데 나치에 적발돼 처형된 사람은 약 1000명이다. 유다인들은 중세 후반기부터 동유럽, 특히 폴란드로 많이 이주했다. 십자군 전쟁과 흑사병 대유행 기간에 서유럽에서 쫓겨난 유다인들이 주로 찾아간 피난처가 폴란드였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9월 10일, 김원철 기자]

 

 

유다인 돕다 희생된 폴란드 일가족 시복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처형, 울마 부부와 일곱 자녀 모두 시복

 

 

- 교황청 시성부 장관 마르첼로 세메라로 추기경(왼쪽 두 번째)이 9월 10일 폴란드 마르코바에서 울마 가족의 시복식을 주례하고 있다. OSV

 

 

[외신종합]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다인 가족을 보호하다 나치에게 살해된 폴란드의 ‘울마 가족’이 9월 10일 시복됐다. 교회 역사상 태중의 아이를 포함해 일가족이 시복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폴란드교회에 이날은 ‘기쁨의 날’이었다.

 

교황청 시성부 장관 마르첼로 세메라로 추기경은 울마 가족의 고향인 폴란드 마르코바에서 요제프 울마와 빅토리아 울마 부부, 그리고 이들의 일곱 자녀를 시복했다. 울마 가족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두 유다인 가족을 보호하다 나치에 의해 처형됐다.

 

세메라로 추기경은 “울마 가족이 시복된 오늘이 나치의 악행을 기억하는 날이 아니라 기쁨의 날로 기억되길 바란다”면서 “종이에 기록된 복음이 울마 부부의 증거와 순교로 현실이 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나치는 1942년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폴란드 지역에 살고 있는 유다인을 모두 죽이는 ‘라인하르트 작전’을 시작했다. 나치는 울마 가족이 살고 있던 마르코바 지역에서 7월 말 경부터 유다인을 학살했다. 이 지역에서 120여 명을 집단수용소로 보냈으며, 그해 12월 14일에는 숨어지내던 54명이 총살됐다. 마르코바에는 이 외에도 울마 가족의 보호 아래 살던 8명을 포함해 29명이 계속 숨어 있었다.

 

하지만 한 경찰관의 밀고를 받은 나치는 1944년 3월 24일 울마 가족의 집을 수색해 숨어 지내던 유다인 8명을 죽였다. 그리고 44살이던 요제프와 31살로 임신 중이던 빅토리아를 차례로 사살했다. 그리고 나머지 6명의 자녀들도 같은 방법으로 죽였다.

 

세메라로 추기경은 “유다인을 보호한 울마 부부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한 것”이라며 “하느님의 뜻에 따라 괄시 받고 배척되던 유다인들을 그들의 집으로 받아들인 것”이라고 말했다. 울마 부부는 사울 골드만과 그의 네 아들, 골다 그륀필드와 딸 레슬라, 동생 레아 디드너를 감춰줬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같은 날 성 베드로 광장에서 삼종기도를 주례하며 이날 시복된 울마 가족을 기억했다. 교황은 “박해받던 유다인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일 때문에 1944년 3월 24일 나치에 의해 일가족이 처형됐다”면서 “이들은 당시 시대에 만연한 증오와 폭력을 복음적 사랑으로 거부했다”고 말했다.

 

이어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어두운 시기에 한줄기 빛이 됐던 이 폴란드인 가정이 선익과 봉사로 어려움에 빠진 이들을 돕는 열정을 되살리는 모범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가톨릭신문, 2023년 9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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