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20일 (금)
(녹)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예수님과 함께 있던 여자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레지오ㅣ성모신심

허영엽 신부의 나눔: 부모님의 기억은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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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12-12 ㅣ No.607

[허영엽 신부의 ‘나눔’] 부모님의 기억은 은총입니다

 

 

지난 9월 말, 동창 신부님의 어머니 장례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성북동성당에 갔습니다. 조용한 주택가 한 가운데 위치한 성당은 아담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자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들어진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시작 성가와 함께 제대 앞으로 고인의 시신이 운구 되었고, 이어 영정사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꽃에 둘러 싸여 환하게 웃는 모습이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습니다. 장례미사가 진행되는 중, 갑자기 아버지와의 마지막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보통 시간이 흐르면 희미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법인데, 나에게 있어 부모님에 대한 기억은 오히려 더 분명해지니 말입니다.

 

길가 플라타너스 나무의 잎들이 찬란하게 빛나던 초여름날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당시 신학교 4학년이었던 나는 1학년이었던 동생을 데리고 외출을 했습니다. 청량리 바오로병원에 입원하고 계신 아버지의 병문안을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병원에 도착해 아버지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학교로 돌아갈 시간이 되어 인사를 드리고 막 나오려는 순간, 아버지는 우리를 향해 힘들게 몸을 일으키셨습니다. 아마도 아버지는 우리를 더 자세히 보시려고 그렇게 하셨던 것 같습니다. 혹은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나와 동생은 서둘러 인사를 드리고 병실 문을 급하게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나는 이 순간을 두고두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병문안을 다녀온 다음 주 수요일 아침, 학기말 시험기간 중이었습니다. 아침식사 후에 동생과 함께 신학교 학장 신부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어리둥절해 있던 우리에게 학장 신부님은 나지막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버님이 그동안 편찮으셨나? 아버지께서 조금 전에 선종하셨네.” 순간 갑자기 나의 두 다리가 땅속으로 푹 꺼지는 것 같았습니다. 부모를 여의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다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한참동안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아무 것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태연한 척 동생을 바라보았습니다. 짧은 순간에도 아버지가 무척 아끼셨던 동생이 충격을 받을까봐 걱정이 되었습니다.

 

다음 날 입관식에서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났습니다. 아버지는 보통 때처럼 마치 낮잠을 주무시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본당 연령회 회원들이 정성스레 염습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아버지의 머리카락이 조금 헝클어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빗을 꺼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머리카락을 빗어드렸습니다. 요즘도 가끔 그때를 상상하곤 합니다. 아버지가 누운 침대 곁으로 걸어가 아버지의 힘없는 손을 잡아드립니다.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카락도 곱게 빗어 드립니다. 그러면 어느새 아버지는 잠이 곤히 드십니다.

 

 

부모님의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나는 갑자기 맞이한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례식을 마치고도 한동안 아버지와 함께 갔던 장소를 찾곤 했습니다. 대축일이면 고해성사를 보러 갔던 명동성당과 재미있는 영화를 보았던 극장들. 처음으로 소설책을 사주셨던 청계천의 헌책방, 자주 들렀던 빵집, 늘 볼거리가 많았던 충무로 골목을 가보았습니다. 하루는 아버지와 함께 앉았던 장충단 공원의 벤치에 종일 앉아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산소보다 추억이 서려 있는 장소에 가면 아버지를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에 돌아오던 길에 신당동성당 입구에 새겨진 성경말씀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 그 말씀을 보는 순간 나는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아버지가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어디를 그렇게 헤매고 다니니? 난 늘 네 곁에 있는데.” 나는 그날 성당에 앉아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날 이후부터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아버지가 늘 나와 함께 하심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철이 들면서 세상을 떠난 부모님이 더욱 그리워지는 것은 모든 자식들의 공통된 마음입니다. 부모님에 대한 기억은 세월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슴속에 새롭게 피어납니다. 그것은 아마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앞으로도 이해하지 못할 그분들의 크신 사랑 때문일 것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모든 것을 수용하고 용서하고 희생하는 무조건적인 사랑,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인생의 진리를 조금씩 깨닫게 될 때에는, 그분들은 이미 우리 곁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후회와 회한만 짙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며 영원한 생명의 시작임을 압니다. 이 세상에서의 시간 동안, 매일매일 성실하게 살면서 부모님께 못 다한 사랑과 효도를 기도로 돌려드리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주님 앞에서 다시 만날 그날을 그려봅니다. 자비로우신 주님, 세상을 떠난 부모님들에게 영원한 빛을 비추소서.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아멘.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8년 12월호,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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