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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사랑으로 열매 맺는 신앙의 해1: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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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1-10 ㅣ No.1092

[사랑으로 열매 맺는 신앙의 해]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2018년 우리 교구는 ‘사랑으로 열매 맺는 신앙의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올 한 해는 그리스도인이 받은 가장 큰 선물 가운데 하나인 ‘사랑’에 관하여 좀 더 깊이 묵상하려고 합니다. 이를 위해 사랑의 특징 하나하나를 잔잔한 어조로 노래한 바오로 사도의 ‘사랑의 찬가’(1코린 13,1-13)를 살펴볼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있어 ‘사랑’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부어 주신 능력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삶을 변화시키고 참된 자유와 기쁨을 만끽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선물하신 것이지요. 우리는 누구나 이 선물을 받았고, 사랑을 살며 사랑의 능력을 키워 나갈 수 있습니다. 독일의 영성가 안셀름 그륀 신부는, 바오로 사도가 ‘사랑한다면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사랑한다면 이러저러해야 합니다.’라고 표현하지 않은 점에 주목합니다. 즉 바오로 사도는 사랑을 우리가 지켜야 하는 어떤 도덕적 의무로 설명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부어 주시어 우리 안에 머물러 있는 능력이며 자질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저 사랑이 무엇인지 기술할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중요한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사실! 그러기에 사랑에 대한 묵상 여행을 떠나기 전, 우리는 우리 안에 부어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으로 우리가 변화될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주 단순하지만 깊은 체험에서 비롯된 사랑의 모습을 하나씩 이야기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첫 번째로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1코린 13,4)를 살펴보겠습니다. ‘참고 기다리다.’라는 말은 그리스어 ‘마크로티메이’(makrothyméi)로 표현되는데, 이는 ‘인내하다.’라는 뜻으로, 본디 ‘넉넉한 성품’, ‘너그러운 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참고 기다리는 사랑의 모습을 가장 먼저 하느님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은 ‘분노에 더디시다.’(탈출 34,6; 민수 14,18)라고 표현되며, 언제나 인간에게 회개할 기회를 마련해 주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참고 기다리는 자비의 하느님을 온전히 드러내신 예수님에게서 이 사랑의 특징을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속전속결’, ‘빨리빨리’ 등의 말을 자주 듣고 사용합니다. 모르는 것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하면 곧바로 답을 찾을 수 있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굳이 매장에 가지 않아도 인터넷 주문으로 하루 만에 물건을 받아볼 수도 있는 그런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느린 것’은 ‘틀린 것’으로 간주되고, ‘너그러운 마음’이나 ‘기다려주는 모습’은 마치 바보스런 태도로 폄하되기 일쑤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 마음은 점점 조급해지고 편협하게 살게 됩니다. 가깝게는 가족부터 직장 동료, 친구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옷차림이나 말투, 행동거지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답답한 마음이 앞서 고쳐 주려는 욕심을 내게 됩니다. 결국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며 타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거나 기다려 주지 못합니다.

 

영화 <집으로>(이정향 감독, 2000년)는 서울에 사는 일곱 살짜리 손자 ‘상우’(유승호)가 강원도 산골에서 혼자 살아가는 할머니와 함께 여름을 보내는 이야기를 잔잔하게 전해 줍니다. 도시에서만 생활하던 손자와 할머니의 뜻하지 않은 ‘동거’는 삐걱대기만 했지요. 그래서 손자는 할머니에게 늘 말대답을 하며 말썽을 피웁니다. 후라이드 치킨이 먹고 싶다던 손자를 위해 정성껏 닭백숙을 해다 주시는 할머니의 모습. 그런 정성에도 누가 물에다 닭을 빠뜨리라고 했냐며 투정부리고, 할머니의 소중한 비녀마저 팔아 게임기에 필요한 건전지를 사려고 했던 손자의 모습. 어찌 보면 우리 가정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사랑하지만 사랑이 열매 맺지 못하는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끝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보답을 바라거나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내어 주는 사랑’으로 끊임없이 기다려 줍니다. 손자는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 사랑을 조금씩 발견해 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손자가 ‘누가 나를 위로해주나.’, ‘누가 나를 기억해 주려나.’ 하고 생각하면서 너무나 큰 상심에 빠져 울먹이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다 그곳에서 언제나 참고 기다리며 묵묵히 사랑해 주신 할머니를 발견합니다. 이제 손자는 할머니를 더 많이 걱정하며 돌보아 드리는 사랑 가득한 손자로 변해갑니다.

 

참고 기다리는 사랑은 너그러운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상대방 안에 숨겨진 사랑의 능력을 발견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종종 우리는 미성숙한 행동으로 문제를 일으키거나 수업을 잘 따라가지 못하는 자녀, 생각지도 못한 모습을 보이는 배우자를 바라보게 되면, 겁을 먹거나 두려워하며 화부터 냅니다. 이러한 마음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내가 변화시켜야 하는 어떤 ‘것’으로 취급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 마음은 상대방에게 편협한 마음을 전염시키고, 그 사람 안에 담긴 사랑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참고 기다리는 사랑’은 결코, 잘못된 길을 걷거나 혹은 다른 이들이 우리에게 불의한 일을 저지를 때에도 맹목적으로 감내하는 태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내 안에 있는 사랑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드는 조급한 마음, 두려운 마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안에 숨겨진 편협함을 마주해야 합니다. ‘나는 왜 이렇게 조급한 것일까? 나는 왜, 무엇을 두려워하여 그토록 상대방을 힘들게 만드는 것일까? 나의 이 마음을 조금씩 너그러운 모습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라고 되물어야 합니다.

 

참고 기다리는 사랑은 쉽지 않은 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길 위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또 그 사랑을 전해 줌으로써 너그럽게 변해 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이해하며 받아 주고 또 기다려 주는 그런 사랑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소공동체와 영적 성장을 위한 길잡이, 2018년 1월호, 사목국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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