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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읽기: 제11, 12, 13권 아우구스티노의 우주 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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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2-21 ㅣ No.348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읽기 – 제11, 12, 13권] 아우구스티노의 우주 찬가

 

 

인간은 창조계의 작은 조각 하나

 

성경 다음으로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많이 읽혀 온 「고백록」의 전반부(제1-10권)는 자기 생애 전반을 회상하면서 “고백실에서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바치는 찬미가”였다. 이 책의 후반부(제11-13권)는 우주 한곳에다 “당신께서는 저를 지으셨고” 그 광활한 공간에서도 “저를 당신께서는 잊지 않으셨음”(13.1.1)을 두고, 이렇게 외치는 ‘우주 찬가’다. “주님은 위대하시고 크게 찬양받으실 분”(11.1.1).

 

그래서 “당신 창조계의 작은 조각 하나가 당신을 찬미하고 싶어”(1,1,1), 고백록」 제11권은 이런 기도로 시작한다. 곧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 1,1)는 구절의 절반, 곧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다.’는 문구를 놓고, “태초에 어떻게 하늘과 땅을 만드셨는지 듣고 싶고 또 알아듣고 싶습니다.”

 

(11.3.5). 제12권에서는 저 구절의 나머지 절반, 곧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문구를 성찰한다. 제13권은 「창세기」 첫 대목(1,1-2,4)을 주교가 신자들과 함께 읽어 내려가는 ‘영적 독서’라고 하겠다.

 

철학적 성찰에 가까운 제11권에서는 ‘태초에’가 시간의 시초라기보다 존재의 시원을 가리킨다고, ‘하느님의 말씀 곧 성자 안에서’라는 뜻으로 알아들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말씀이 “태초이시니 저희가 방랑하다가 돌아갈 적에는 그분께로 돌아갑니다. 그분이 태초이시고 … 이 태초에서 당신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8.10-9.11).

 

제12권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하늘과 땅’이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지 묻고서 ‘하늘’은 천사라는 영적 피조물을 의미하고, ‘땅’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제일 질료’(第一 質料)라고 부르던 것이며, 이것도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임을 역설한다. 교부의 창조 신학은 응당 삼위일체 신앙의 고백이기도 하다.

 

“보십시오, 저의 하느님, 여기서 삼위일체이신 당신께서 어렴풋이 제게 나타나십니다. 아버지, 당신께서는 저희 지혜이신 분의 ‘태초’ 안에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께서는 당신 아드님 안에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보십시오, 당신의 영이 물 위에 감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보십시오, 삼위일체이신 저의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13.5.6).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기 전에는 뭘 하시고

 

「창세기」에 따라 인간을 ‘피조물’로 규정하고 그리스도교 ‘창조 신학’을 완성한 교부가 아우구스티노다. 이 책 말고도 「마니교 반박 창세기 해설」(388년), 「창세기 문자적 해설 미완성 작품」(393년), 「창세기 문자적 해설」(401년)을 집필하였다.

 

하늘과 땅이 있고, 자기들은 만들어졌다고 외칩니다. 하늘과 땅은 자기를 스스로 만들지 않았다고 외칩니다. ‘우리가 존재함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존재하기 전에는 우리는 없었으니, 그렇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 생겨날 수 있는 것처럼 되고 만다’”(11.4.6).

 

이교도들이 흔히 주장하듯이, 세상은 ‘일자’(一者)로부터 필연적으로 유출된 무엇도 아니고, 타락한 물질이 응결되어 던져진 우연도 아니다. 인간은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고 합의하고 당신의 자유의사에 따라 만들어 하나뿐인 지구에 고이 가져다 놓으신 조물이다.

 

하지만 창조론에는 갖가지 시비가 따라붙게 마련. “어떻게 창조하셨느냐?”는 물음에는 “말씀으로!”라고 답한다. “당신께서는 그것들을 대체 어떻게 만드십니까? 하느님, 하늘과 땅을 어떻게 만드셨습니까? 당신께서 말씀하시자 생겨났고 당신 말씀으로 그것들을 만드신 것입니다”(11.5.7). “뭘 갖고 만드셨느냐?”고 힐문하면 ‘그냥 말씀만으로’ 만드셨다고 한다. “당신께서 생기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다 생겨납니다. 당신께서는 오로지 말씀을 하시면서 만드십니다”(11.7.9).

 

“그래도 뭔가 재료가 있었을 게 아니냐?”고 따지면 “아무것도 없이, 다시 말해서 무(無)로부터”라고 대답한다. 창조주이신 만큼 영원히 존재하던 재료(물질)로 세상을 빚어 만들었으리라는 이원론을 배척한다. “당신께서는 무엇을 만드셨는데 무로부터 만드셨습니다. 당신 외에 무엇이 있어서 그것으로부터 저것들을 만드실 만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당신께서 존재하셨고, 다른 것은 무였으니, 그 무로부터 당신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12.7.7).

 

그럼 “무엇 때문에 만드셨느냐?”는 장난기에는, 뭔가 아쉬워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착하셔서 만드셨다는 답이 나온다. “당신에게는 당신께서 선(善)이신데, 저런 것들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든, 또는 무형한 것으로 남아 있든, 당신의 선에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무엇이 부족하여 그것들을 만드신 것이 아니고 오히려 당신 충만한 선하심에서 만드신 터에 말입니다”(13.4.5).

 

“세상을 언제 만드셨느냐?”는 물음에는 못된 저변이 깔려 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기 전에 하느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더냐? 피조물을 조성하려는 의지, 전에는 한 번도 조성한 일이 없는 것을 조성하려는 새로운 의지라는 것이 발생했는데 어떻게 하느님이 영원하시다는 말인가? 하느님의 의지는 그분의 실체에 속할 테고, 그 실체에 전에 없던 무엇이 발생하였다면 그 실체가 정말 영원하다고 말할 수 없다. 또 만일 피조물이 존재하게 만드는 하느님의 의지가 영원하다면, 피조물 또한 왜 영원하지 않다는 말인가?”(11.10.12)

 

여기서 아우구스티노의 철학 사상에서 가장 난해한 시간론(時間論)이 나오는데 그런 공부는 철학도들에게 넘길 만하다. 요컨대, 시간은 피조물과 함께 창조되었고, 피조물이 있기 ‘전에는’ 시간도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기 전에 하느님께서는 뭘 하시고 계셨더냐?’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하느님, 당신께서 모든 세기의 제작자요 조물주이신데, 당신께서 모든 시간의 작동자이신데, 시간 그 자체도 당신께서 만드셨고, 따라서 당신께서 시간을 만드시기 전에는 시간이 지나가는 것도 불가능하였는데, 당신께서 그때는 무엇을 하고 계셨느냐는 말은 무엇 때문에 하는 것입니까?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는 ‘그때는’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11.13.15). 시간 자체가 하느님에게서 창조되었고 시간은 유한한 사물이 갖는 존재론적 차원이다, 그것도 인간의 의식에서만 감지되는!

 

 

해넘이가 없는 안식일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노는 마지막 제13권에서 ‘6일 창조’의 피조물들이 영성생활에 어떻게 해당하는지 풀이하면서 최고선이신 하느님께도, 천사와 영혼에도, 모든 미물에게도 실존의 중심(重心)은저 ‘심연의 물 위를 감돌던’ 하느님의 영, 곧 사랑이라고 역설한다.

 

“제 중심은 저의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어디로 이끌리든 그리로 제가 끌려갑니다. 불은 위로 향하고, 돌은 아래로 향합니다. 제 중심을 향해 움직이면서 제자리를 찾습니다. 당신 선물로는 저희가 불타오르고 위로 이끌려 갑니다. 타오르면서 갑니다. 선한 의지가 저희를 그곳에 데려다 놓을 것이니 그곳에 영원히 머무는 일 외에 저희가 바라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13.9.10).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듯이, 시간도 영원의 한 조각이듯이, “당신을 찬미함으로써 즐기라고 일깨우시는 이는 당신이시니, 당신을 향해서 저희를 만들어 놓으셨으므로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안달하기”(1.1.1) 마련이다. 따라서 각자가 올리는 ‘찬미의 고백’은 ‘하느님의 오늘’ 곧 ‘저녁이 없고 해넘이도 없는 안식일’이라야 끝을 본다. “당신께서 지금 저희 안에서 일하시듯, 그때도 당신께서 저희 안에서 쉬실 것입니다. 저 일들이 저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당신의 것이듯이, 저 때는 그 안식이 저희를 통해서 이뤄지는 당신의 것이 될 것입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언제나 일하시고 언제나 쉬십니다”(13.37.52).

 

그러니까 ‘자아’와 ‘하느님’이라는 두 과녁을 두고 일평생 탐구하던 교부, 죽음의 침상에서 “멍청하게도 나는 다 알아듣고 싶었어.”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아우구스티노가 저 영원한 생명의 안식일에 깨달았음 직한 바가 「고백록」 마지막 장(13.38.53)에 기술되어 있다.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저희가 보는 것은 그것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보고 계시기 때문에 그것들이 존재합니다. 또 저희는 그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밖으로 보고 그것들이 좋기 때문에 안으로 봅니다. 그 대신 당신께서는 그것들이 만들어져야 하리라고 보시자마자 바로 만들어져 있음을 보셨습니다. 어느 인간이 이런 깨달음을 인간에게 베풀어 주겠습니까? 어느 천사가 천사에게 베풀어 주겠습니까? 어느 천사가 인간에게 베풀어 주겠습니까?”

 

* 한 해 동안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읽기’를 집필해 주신 성염 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 성염 요한 보스코 - 「신국론」과 「삼위일체론」을 번역하고, 최근 「고백록」을 펴냈으며, 지금도 지리산 자락에서 아우구스티노의 원전 번역에 몰두하고 있다. 1986년 교황청립 살레시오 대학교에서 라틴 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와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 주교황청 한국대사(2003-2007년)를 지냈다.

 

[경향잡지, 2017년 12월호, 성염 요한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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