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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정지용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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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0-02 ㅣ No.954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정지용 시인 (상)


우리말 ‘운율’과 ‘정서’ 감각적으로 표현한 1930년대 대표시인

 

 

정지용 시인

 

 

어문 민족주의 토양에서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향수’ 제 2연)


다섯 연에 걸치는 긴 시 ‘향수’를 정지용은 1923년 3월에 잡지 「조선지광」에 발표했다. 이때 그는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이어서 5월에 일본으로 가서 교토에 있는 도시샤(同志社) 대학에 입학했다. 

 

정지용 시인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시 ‘향수’를 일본에 유학하기 직전에 써서 발표를 했다는 것은 주목할 일이다. 그가 시인이 된 것은 일본 유학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정지용이 휘문고보에 재학할 때 조선어 교사로 가람 이병기가 있었다. 이병기는 갑오경장 이후 조선어의 근대적 학문체계를 개척하고 언문(言文)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한 주시경의 제자였다. 

 

주시경이 중년의 나이에 신병을 얻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이병기는 휘문고보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1921년에 조선어연구회를 발족시키고, 자신도 말과 글을 통한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하며 시조시인으로도 활동했다. 민족문학사 안에 있는 전통시로 시조를 쓰면서 이병기는 외래 자유시에 못지않은 민족 언어의 리듬과 신선한 감수성을 주장했다. 이러한 스승의 영향 아래서 정지용은 민족의 언어와 정서를 돈독하게 키워 나가는 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정지용은 1902년 충북 옥천 농촌에서 태어나 17세에 서울 휘문고보에 입학했다. 입학시험에 합격은 했으나 입학금을 낼 형편이 못되었는데 신입생 88명 중 수석이었으므로 교비 장학금을 받아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입학 후 휘문고보 선배로 홍사용·박종화·김영랑, 후배로 이태준이 있었다. 이들이 뒷날에 모두 문단의 중진으로 진출하게 된다.

 

일본에 유학한 후 1926년 4월에 정지용은 기타하라 하쿠슈가 주재하는 잡지 「근대풍경」(近代風景)에 시 ‘카페 프란스’를 투고해 발표가 된다. 기타하라 하쿠슈는 당시 일본 문단의 원로 시인이었는데, 신인 정지용의 시를 문단의 중진 시인들과 같은 자리에 싣는 대우를 했다. 

 

이 데뷔작 ‘카페 프란스’에는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라는 탄식이 들어 있다. 이어서 다음 행에서는 “대리석 테이블에 닷는 내 뺨이 슬프구나!”라고 했다.

 

- 충북 옥천 정지용 생가에 있는 ‘향수’ 시비. 출처 위키미디어.

 

 

1930년대 문단의 중심으로

 

정지용은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재학 중인 1928년 7월 교토의 가와하라마치 교회에서 프랑스인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가톨릭신자가 된다. 나라도 집도 없는 슬픈 처지에서 의지할 데를 찾았을 수 있었다. 세례명은 프란치스코였다. 영문학 수업 중 전공은 19세기 영국 시인 윌리암 블레이크였다. “잉글란드의 푸르고 즐거운 땅 위에 / 우리가 예루살렘을 세울 때까지 / 나는 정신의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것” 이라고 블레이크는 시에서 말했다. 인간들 사이의 불평등을 거부하고 보편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이 블레이크의 사상이었다. 당시 도시샤대학에서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교수가 블레이크의 시에 대해 강의를 하고 있었다. 야나기 교수는 한국의 고대문화 특히 신라의 석굴암에 대해 최대의 예찬을 하며, 일본에는 그만한 수준의 문화재가 없다고 평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야나기 교수의 블레이크 시 강의가 또한 정지용의 유학 중 수업에 조화를 이루는 양상이다. 유학 생활의 한편으로 정지용은 재일본조선공교신우회 교토지부 서기로 열심히 활동했다. ‘공교’(公敎)는 개신교와 다른 가톨릭을 그리스도교 공식 종가(宗家)라는 뜻으로 부르는 말이다.

 

‘윌리암 블레이크 시의 상상력’이란 제목의 논문을 쓰고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정지용은 1929년 9월에 귀국해 모교인 휘문고보의 영어 교사로 부임한다.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후에 모교의 교사로 봉직한다는 조건으로 휘문고보가 정지용의 도시샤대학 학비를 대주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정지용 프란치스코의 귀국은 서울 종현(鍾峴, 명동) 성당으로도 발길을 들여놓는다. 그는 명동성당 청년회 총무 자리를 맡았다. 그 뒤 1933년에는 조선 천주교 5개 교구(만주의 연길교구 포함) 연합으로 창간하는 월간 「가톨릭청년」 편집에 참여한다. 

 

신학 철학 문학을 망라하는 내용으로 대사회 지성지 성격을 띠는 이 잡지는 아트지에 컬러 인쇄까지 하는 당시 조선 사회 최고급의 편집 체제였다. 이 「가톨릭청년」  잡지의 편집위원으로는 윤형중 신부 · 장면 · 장발 · 이동구 · 정지용이 함께 참여했다. 특히 일반사회 문단의 시인과 작가들로부터 작품을 받아 잡지에 싣는 일은 정지용 시인이 전담했다. 그 결과로 창간호에서부터 시작해 매월 「가톨릭청년」 문예면은 1930년대 문단의 주요한 발표 무대가 됐다. 이병기 · 정지용 · 이상 · 신석정 · 김안서 · 김기림 · 조운 · 유치환 · 이효상 · 이태준 · 박태원 · 김동리 · 김소운과 여러 문인들이 더 이 잡지에 등장했다. 이 문인들은 대체로 당시 ‘9인회’를 중심으로 해 문단을 주도한 진용이다. 

 

가톨릭신자가 아닌 문인들까지 천주교 잡지가 개방적으로 포용한 것은 “낡고도 새로운 교회”라고 공언하는 가톨릭의 면모이다. 또한 성경의 마태오 복음 8장에 있는 내용으로서, 신자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이 말씀하는 방법”이라고 풀이될 수 있다. 교회와 사회 사이에 대화의 다리를 놓는 것이 당시 「가톨릭청년」 잡지의 발행 취지였다.

 

* 구중서(문학평론가) - 1960년대부터 문학평론 활동을 계속해왔다. 서울대교구 가톨릭출판사 주간, 수원대 국문과 교수, 한국자가회의 이사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한국문학과 역사의식」, 「한국천주교문학사」 등이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0월 2일, 구중서(문학평론가)]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정지용 시인 (중)

 

신앙인 정지용, 절제·함축된 언어로 ‘믿음’ 드러낸 작품 발표

 

 

- 충북 옥천에 있는 정지용 생가.

 

 

일제치하 「가톨릭청년」의 역할

 

정지용은 휘문고보 학생 시절에 ‘요람’이라는 동인에 가담해 활동했고 문예반의 반장으로서 교지 「휘문」의 편집에 참여했다. 1919년 3·1 만세 운동 때엔 휘문고보 주동 2명 중 1명으로서 정학을 당했다. 

 

일본 도시샤대학 유학 시절에는 교토 지역 조선인 가톨릭신우회 서기였고,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후에는 서울 명동본당 청년회 총무를 거쳐 회장이 되었다. 정지용의 성품이 꾸준하고 부지런해 늘 어느 공동체에서든 살림꾼 역할을 맡아왔다.

 

월간 「가톨릭청년」 잡지의 편집위원이었지만 정지용은 문단의 유력한 시인 작가들을 필진으로 포섭하는 데서도 「가톨릭청년」의 편집장 역할을 하는 격이었다. 

 

당시 가톨릭교회가 일반사회 문화계에 활발히 진출하는 데 대해 문단의 한쪽 사회주의 경향 계열에서는 비판의 여론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때 가톨릭 쪽에서 정지용 시인이 대변인격으로 나서서 대응하는 논리를 폈다.

 

“「가톨릭청년」지가 문예전문지가 아니요 개인 중심의 잡지가 아니다. 다만 건전한 문화의 적극적 옹호자인 가톨릭교회는 문학인의 좋은 요람이 되어 줄 뿐이요 가톨릭의 2천 년간 교양의 원천에서 출발하였다.”(‘한 개의 반박’, 조선일보 1933. 8. 26.) 

과연 「가톨릭청년」은 문예 전문지가 아니고 종합 지성지였다.

 

- 정지용 동상. 출처 위키미디어.

 

 

“가톨릭은 자본주의와 협력하지도 않고 공산주의와 결탁한 바도 아니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는 1천여 명의 가톨릭 신부가 투옥되었다. 사회정의를 지향한다. 가톨릭교회가 인간 사회의 행복을 위해 공헌을 하지 않는다면 교회의 사멸을 의미한다는 레오 13세의 말씀을 준봉하여 우리는 민중의 생활투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가톨릭청년」 1934. 11.)

 

이러한 제목과 논지의 잡지 글들을 편집하면서 정지용 시인은 “가톨릭 2000년간 교양의 원천”으로 사회의 건전한 문화에 공헌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아울러 정지용 시인은 시를 쓰는 그의 본업에도 계속 충실했다.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뒤에 그는 지난날의 ‘향수’와 같은 전통 정서의 시로 ‘고향’을 썼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 산꿩이 알을 품고 /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 마음은 제고향 지니지 않고 /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1~3연).

 

그러나 같은 전통 정서이지만 ‘향수’의 생태적 읊조림에만 머물 수는 없었다. 역사의 현실이 세계의 근대 문명에 진입해 있다.

 

해외에 유학해 서양문학을 전공한 1세대로 김기림·박용철·이하윤·정지용 등이 이른바 해외문학파로 불리었고, 이들은 1930년에 「시문학」 잡지를 발행했다. 그리고 김기림을 필두로 해 1930년대 모더니즘 운동이 일어났다. 자연발생적 읊조림인 서정시에 머물 수 없고 지성과 세련된 감각의 언어로 시를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모더니즘 문예운동에도 정지용이 참여해 있었다.

 

 

시인의 일용할 양식

 

1930년대 초반 같은 시기에 「가톨릭청년」 잡지가 간행되었고, 정지용은 가톨릭 신자로서 다른 모더니스트들과는 다른 의식세계를 가지고 있었다. ‘가톨릭 2000년간 교양의 원천’ 의식이다. 그것은 종파적 근본주의라든가 호교의식이 아니고 인류 보편의 가치를 뜻하는 것이다.

 

정지용 시인은 「가톨릭청년」 지면에 여러 편의 신앙 시를 발표했다. 

 

“그의 옷자락이 나의 오관에 사무치지 않았으나 / 그의 그늘로 나의 다른 하늘을 삼으리라”(‘다른 하늘’ 부분) “얼굴이 바로 푸른 하늘을 우러렀기에 / 발이 항시 검은 흙을 향하기 욕되지 않도다 // 곡식알이 거꾸로 떨어져도 싹은 반드시 위로! / 어느 모양으로 심기어졌더뇨? 이상스런 나무 나의 몸이어!”(‘나무’ 부분)

 

- 1933년 발행된 「가톨릭청년」.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정지용의 이러한 시들은 절제와 밀도를 지닌 언어이다. 이러한 시에 연관해 정지용은 자신의 깊은 신앙을 산문으로 밝히고 있다.

 

“정신적인 것의 가장 우위에는 학문 교양 취미 그런 것보다도 사랑과 기도와 감사가 있다. 그러므로 신앙이야말로 시인이 일용할 양식이 아닐 수 없다… 숙련에서 자만하는 시인은 마침내 매너리스트로 가사 제작에 전환하는 꼴을 흔히 보게 된다. 고전적인 것을 진부로 속단하는 자는 별안간 뛰어드는 야만일 뿐이다. 꾀꼬리는 꾀꼬리 소리밖에 발하지 못하나 항시 새롭다. 숙련에서 운다는 것은 불명예이리라. 오직 생명에서 튀어나오는 항시 최초의 발성이어야만 진부하지 않는다. 시인은 완전히 자연스러운 자세에서 다시 비약할 뿐이다. 우수한 전통이야말로 비약이 발디딘 곳이 아닐 수 없다.”(‘시의 옹호’ 부분) 

 

1939년에 발표한 이 ‘시의 옹호’ 내용은 현대 가톨릭 사상계에서도 예사롭지 않게 옹골차고 심오하다. 

 

정지용 시인의 산문 ‘시의 옹호’에는 두 가지 요점이 있다. 하나는 ‘전통’에 대한 존중이다. 이것은 정지용의 경우 스승인 가람 이병기의 언문 민족주의이다. 「가톨릭청년」 잡지를 편집하면서도 정지용은 이병기의 ‘조선어 강화’를 계속 청탁해서 실었다. 이것은 민족문화 전통에 대한 옹호이다. 다른 하나는 “생명에서 튀어나오는 최초의 발성으로서 진부하지 않은 언어”에 대한 존중이다. ‘언어’에 대한 이와 같은 존재론적 인식은 원래 가톨릭 신학에 근거하는 것이다. 성경의 요한복음 초두에서도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다”고 했다. 가톨릭 신학자 카를 라너는 “존재 근원으로부터 오는 원초적인 산 언어”에 의해 진정한 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정지용 시인과 카를 라너 신부는 같은 또래 나이이다. 서로 모르는 사이였겠지만 그야말로 ‘2000년 교양의 원천’에서 서로 통했는지 모르겠다. [가톨릭신문, 2016년 10월 9일, 구중서(문학평론가)]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정지용 시인 (하)

 

해방 후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 민족 현실에 울분 토로

 

 

1930년 시문학 창립 동인. 윗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하윤, 박용철, 정지용, 변영로, 정인보, 김윤식. 충북 옥천군 제공.

 

 

사회와 민족의 현실을 보며

 

정지용 시인의 신앙은 계속 돈독해져 1937년에는 프란치스코회 재속회원(在俗會員)이 된다. 이때 함께 입회해 서울 백동(혜화동) 성당에서 착의식에 참여한 이들은 장면, 장발, 유홍렬, 한창우 등이었다. 해방 후 장면은 내각제 제2 공화국의 총리가 되고, 장발은 서울대  미대 학장이 됐다. 유홍렬은 교회사학자로 한국천주교회사를 썼다. 그리고 한창우는 경향신문 사장이 됐다. 

 

그리고 정지용은 1930년대 당시에 이미 문단의 대표 시인이 되어 있었다. 1930년대 문단에서는 모더니즘 운동이 일정한 성과는 거뒀지만, 유럽의 파시즘과 일본의 군국주의 통치 아래서 문학의 위상은 허약한 맨손이 되어 갔다. 역사 발전에 대한 낙관적 전망은 허사였고 얻은 것은 표현 언어의 말초화뿐이었다.

 

그러나 모더니스트 정지용 시인은 가톨릭신자로서 다른 모더니스트들과 다른 문학관을 가지고 있었다. 1937년 정초 조선일보의 ‘문학 문제 좌담’에서 정지용 시인이 말했다. 

 

“문학은 신변잡사를 그리기보다 사회적 관심과 민족적 사실에 대해 열정을 가져야한다.”

 

이러한 이상을 가지고 정지용 시인은 유망한 후진들을 배출하는 일에 힘을 썼다.

 

1939년에 월간 문예지 「문장」이 창간된 후 이 지면을 통해 신인들을 발굴했다. 박두진, 조지훈, 박목월 시인을 문단에 내보냈다. 이들이 해방 직후에 「청록집」(靑鹿集)이라는 합동시집을 내 청록파로 불리게 된다. 

 

일제가 조선어의 사용마저 금지하는 1940년대 초까지 청록파 시인들이 활동하는 것은 민족문학사의 주요한 대목이다. 청록파는 친일의 추세에 휩쓸리지 않고 자연을 예찬하며 박두진의 시 ‘해’에서 보듯이 역사의 부활 의지도 지녔다. 

 

이러한 시대 환경에서 정지용이 시집 「백록담」(1941)을 간행한 것은 일제 하 그의 마지막 작업이었다.

 

“가재도 기지 않는 백록담 푸른 물에 하늘이 돈다. 불구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쫓겨 온 실구름 일말에도 백록담은 흐리운다. 나의 얼굴에 한나절 포갠 백록담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기도조차 잊었더니라.”

 

산문시 형식으로 된 「백록담」은 토속의 전설을 담은 한라산 백록담의 정서를 정갈하게 그렸다. 그러면서 고단함과 쓸쓸함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아래서도 망각하지 않는 신앙의 ‘기도’를 떠올린다.

 

1941년 일제가 미국 공군기의 도회지 폭격에 대비한다는 소개령을 내려 정지용 시인은 경기도 부천의 소사 마을에 이사하고, 그곳에서도 천주교의 공소 예절에 열심히 참례하며 지냈다.

 

- 충북 옥천에 있는 정지용 문학관. 출처 위키미디어.

 

 

분단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민족 해방의 날이 왔다. 정지용 시인은 이화여전의 교수가 됐다. 그러나 해방은 환희의 봇물이 터진 것 같은 감격의 시간만은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미국과 당시 소련이 한반도의 허리에 38선을 긋고, 남쪽과 북쪽으로 새로운 점령자가 되어 들어왔다.

 

전쟁이 진행 중이던 1943년 11월에 연합국 정상들은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만나 종전 후의 문제들에 대한 원칙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특별조항을 두어 “종전 후 한국은 일본의 지배로부터 독립한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그 뒤 얄타 비밀협정을 거치면서 종전 후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해 점령하기로 변질이 되었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단체로 입국하는 것을 막아, 11월에야 임정 제1진이 귀국했다. 벌써 분단과 혼란이 고조돼 상해 임시정부의 귀국에 개선의 영예를 모아 주지 않았다. 이때에 정지용 시인은 서울 명동성당에서 임정 요인들을 환영하는 자리에 나아가 축시를 낭송했다. 

 

“그대들 돌아오시니 / 피 흘리신 보람 찬란히 돌아오시니 // 금의는 커니와 / 전진(前塵) 떨리지 않은 / 융의 그대로 뵈일 밖에 // 상기 불현 듯 기다리는 마을마다 / 그대 어이 꽃을 밟으시리 / 가시덤불, 눈물로 헤치시라.” (‘그대들 돌아오시니’ 부분) 

 

이역 중국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피 흘리며 투쟁한 영웅들이지만 이들의 귀국이 금의환향이 못되고 있음을 정지용 시인은 가슴 아파 했다. “먼지 묻은 전투복 차림채로 맞이하노니, 가시덤불을 눈물로 헤치며 들오시라”는 시였다. 정지용의 이 심경은 강대국 외세의 횡포와 동포의 남북 분단에 대한 통분이었다.

 

게다가 단독정부를 추진하는 남한 내부에서는 친일의 과오가 있는 이들이 재득세하는 부조리가 있어 시인의 양심에 상처를 입혔다. 정지용 시인은 시국의 현실에 스스로 고뇌하며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경향신문 주간직과 이화여대 교수직을 다 사임하고 녹번동 자택에서 은둔한다. 

 

1948년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서문에는 해방 후 정지용 시인의 심경이 가장 잘 나타난다.

 

“8·15 이후에 나는 부당하게 늙어간다… 일제 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런 것이다.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서문’ 부분) 

 

이렇게 순국 시인 윤동주를 찬양하고, 뒤이어 일어난 6·25 전쟁 속에서 정지용 시인은 분단의 십자가를 지고 어디엔가로 사라졌다. 그러나 정지용 시인의 문학적 업적과 올곧은 생애는 민족 문학사에 불멸의 풍요한 자산이 되어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0월 16일, 구중서(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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