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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걸어서 하늘까지3: 칠성공소에서 연풍성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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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9-20 ㅣ No.714

[순교자성월 특집] '걸어서 하늘까지' (3) 칠성공소에서 연풍성지까지(청주교구 도보순례)


순교의 길 걷고 또 걸으면 어느새 가슴 가득 찬 행복

 

 

걷고 또 걷는다. ‘과연 이 지점이 나올 것인가’라는 의심을 할 때쯤이면 영락없이 표지판이 나타나 다음 지점을 가리키며 잠깐의 희망을 갖게 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옷장을 연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반바지를 꺼낸다. 챙이 넓은 모자를 찾아 눌러쓴다. 얼음물을 한 통 싼다.

 

지도와 묵주를 챙긴다. 양말과 운동화를 챙겨 신는다.

 

자, 이제 다 됐다.

 

 

청주교구 신앙선조들과 함께 하는 도보성지순례

 

청주교구엔 ‘신앙선조들과 함께 하는 도보성지순례 프로그램’이 있다. 연풍성지에서 배티성지까지 총 84.6km. 하루에는 어림도 없는 거리다. 그래서 칠성공소와 연풍성지 즉, 도보성지순례의 첫 구간인 14.9km 거리를 걷기로 했다. 신앙선조들과 함께 하는 도보성지순례라. 제목이 그럴듯하다. 칠성공소까지는 운전을 해 내려가기로 한다.

 

충북 괴산군 칠성면 도정리 215-1번지. 서울에서 출발해 고속도로를 달리며 수많은 생각을 한다. 도보순례는 처음 해보는 것이지만 나름대로 자신이 있다. 근래 들어 다이어트를 한답시고 청계천 주변을 열심히 걸었기 때문이다. 길이 그렇게 순탄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칠성공소에 도착하다

 

일곱 개의 별. 칠성공소의 이름이 예쁘다. 도정리라는 마을도 처음이다.

 

최영원(요한) 공소회장님과 공소 신자들이 처음 보는 일행을 반갑게 맞아준다. 도보순례와 일반적인 성지순례의 차이 하나, 그것은 ‘친교’다. 순례의 길에서 반갑게 만나는 얼굴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거쳐 갔느냐고 물었더니 ‘100여 명’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10여 명은 이곳에서 하루를 묵고 다시 순례를 떠났다고 했다.

 

칠성공소에서 농로를 따라 걸으면 도보순례코스를 알리는 빨간 리본을 볼 수 있다.

 

 

시원한 매실음료를 한 병씩 들려준다. 작은 공소에서 오히려 매실음료를 얻어먹자니 송구스럽다. 순례의 길을 응원하는 작은 에너지다.

 

발걸음을 재촉한다. 해가 더 높이 뜨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사진을 찍어주기 위해 함께 떠난 동기 기자와 발을 착착 맞춘다. 공소 가까이에 있는 원두막에서 한 할머니가 농을 건넨다.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길을 떠나다

 

칠성공소에서 농로를 따라 가다보면 빨간색 리본이 팔랑거린다. 청주교구 도보성지순례코스라고 적힌 이 빨간색 리본이 나타나면 무엇보다 반갑다. 농로를 따라 이번에는 국도로 나선다.

 

이곳 순례의 길은 ‘34번’ 국도로 통한다. 옆에 농로가 있다지만 제대로 조성돼 있지 않아 국도로 걷는 편이 편하다. 하지만 몇 톤이나 되는 화물차량들이 쌩쌩 달리는 바람에 두려움이 컸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안전하게 순례할 수 있도록 여러 배려가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는 걷고 또 걷는다. 태성 삼거리를 지나 다시 장바우 삼거리, 배상교차로에서 또 언덕. 걸으면서 ‘과연 이 지점이 나올 것인가’라는 의심을 할 때쯤이면 영락없이 표지판이 나타나 다음 지점을 가리키며 잠깐의 희망을 갖게 한다.

 

잡담을 하지 말라고 했으나 함께 간 동료 기자와 많은 이야기를 한다. 순례의 길에 서서 서로 마음을 열고 일상에 쫓겨 이야기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순례에 대해서, 신앙에 대해서, 직업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만큼 길은 줄어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걸었을까. 양쪽 뺨이 화끈거린다. 두 다리가 후들거린다.

 

 

도착

 

연풍성지에 도착했다. 병인박해 당시 연풍 관아에 끌려간 교우들이 모진 고문 끝에 목숨을 바친 곳이다. 내가 걸어온 길이 박해의 고통으로 쓰러져간 그분들과 함께였다는 말인가.

 

 

연풍성지에 도착했다.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연풍 관아에 끌려간 교우들이 모진 고문 끝에 목숨을 바친 곳이다.

 

오늘 도보성지순례의 주제를 다시 돌아본다. ‘신앙선조와 함께 하는 도보성지순례’.

 

내가 걸어온 이 길이 박해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으며 쓰러져간 그분들과 함께였다는 말인가. 나는 왜 이 길을 걸어왔을까. 그들이 심어준 복음의 씨앗으로 피워낸 꽃이 2009년의 내 모습인가.

 

청주교구에서 알려준 대로 ‘황석두 루카 성인 묘’를 참배하고 경당으로 들어섰다. 경건해야할 경당이라지만 여러 생각을 할 것도 없이 들어서자마자 마루에 길쭉하게 드러누워 버렸다.

 

십자가 앞에서 기도만 해봤지, 드러누운 것은 정말로 처음이다. 방명록에는 이미 도보순례를 마치고 왔다 간 사람들의 흔적으로 빼곡하다. 부끄럽지만 도보순례를 확인하는 구간별 도장도 살포시 찍어본다.

 

가을을 상징하는 순교자성월이지만 아직 해가 긴 것이 다행이다. 뉘엿뉘엿 지는 해가 경당 안으로 쏟아진다.

 

햇볕만큼 마음을 꽉 채운 지금 이 무엇이 ‘행복’이 아닌가 싶다.

 

[가톨릭신문, 2009년 9월 20일, 오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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