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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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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1-28 ㅣ No.1215

[경향 돋보기 -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는 교회



“이 바보야!” 하시며 자책하시던 김수환 추기경

김 추기경이 그토록 염원하셨지만 이루지 못했다고 한탄하신 것이 있다. 바로 가난한 삶이다. 가난하게 살고 싶었지만 주교가 되고 대주교, 추기경으로 지위가 높아지면서 점점 가난한 삶을 살 수 없게 되었고 가난한 사람들과도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는 자책의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언젠가는 그것 역시 핑계였다고 자탄하시면서 “이 바보야!”라고 하셨다.

사실 추기경님이야말로 늘 가난한 이들의 친구이시지 않았는가. 가난한 이들의 가슴 아픈 얘기들을 정말 어버이처럼 들어주셨고 눈물을 닦아주신 참된 목자가 아니시던가! 그분이 선종하신 뒤 전 국민들이 보여준 애도의 물결은 그분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바로 보여주었다. 김 추기경에게 가난은 아무리 다해도 부족하게 느껴지는 복음적 삶이었던가 보다.


우리 곁에 오신 예언자 프란치스코 교종, 다시금 가난이 화두로

한동안 우리 교회는 가난을, 적어도 그 실제적인 가치는 없는 것인 양 도외시하고 살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된다. 물질 풍요의 시대에서 생존권을 위협받는 이들이 늘어나는 양극화된 이 사회에서 교회는, 복음화를 단지 신자 비율을 높이는 것으로만 여긴 측면이 없지 않았다. 이 상황에 혜성처럼 나타나신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가난을 화두로 던지셨다. 그분에게 가난은 우리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이고 교회 쇄신의 척도다.

그분은 말한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겪은 가장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기쁨은 가진 것 없는 매우 가난한 이들의 기쁨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복음의 기쁨」, 7항). “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바랍니다”(「복음의 기쁨」, 198항).

그분에게 가난은 전혀 낯설지 않다. 그분의 온유한 미소, 소박한 행보와 함께 친숙한 친구의 모습으로 떠오른다. “부유하셨지만 가난한 우리를 위해 스스로 가난하게 되셔서 우리를 부유하게 하신 주님의 그 가난”(2코린 8,9 참조)을 어찌 마다하겠는가 싶다.


왜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그래도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가 꼭 필요한가? 연대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 연대를 통한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이것은 교회의 본질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명실공히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야 하는데, 그 구체적인 표지는 가장 보잘 것 없는 한 사람까지 찾아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루카 15장 참조). 그렇지 않다면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자.’는 우리의 지향은 헛된 구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가난한 이들을 신앙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먼저 복음의 예수님을 자세히 살펴보자.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특별히 가장 작은이들과 동일시하신다. 가난한 이들에게 특별한 어떤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그들의 처지를 당신 것으로 하신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속된 존재라면, 교회는 그리스도를 보여주어야 한다. 곧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신앙인은 가난을 소홀히 할 수 없고 가난한 이와 기쁘게 연대를 꾀해야 한다. 우리의 연대는 먼저 가난을 살고 적어도 소박한 모습을 취하고, 가난한 이들을 진정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연대는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을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잘 들으려면 깨어있어야 한다. ‘참된 행복선언’에 가슴이 설레는 사람이고 일상의 사건들 속에서 하느님의 일을 감지하는 사람이다. 교종은 교회를 지칭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귀를 기울이시는 하느님의 도구”라고까지 말씀하신다.

이 시대 깨어있어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고 모든 삶을 던져 응답하신 분이 계신다. 바로 요셉의원을 설립하신 선우경식 선생이다. 선우경식 선생은 일찍이 의사로 안락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었음에도 당신이 만난 노숙인 등 가난한 이들을 위해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무료병원을 운영하며 그들을 친자식처럼 대하였다.

그분에겐 당연히 자녀가 없었지만 실은 루카 복음 15장의 작은 아들같은 자녀들이 수두룩했으니, 행려자, 알코올 중독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분은 약주를 즐기셨는데 어느 순간부터 술을 끊으셨다. 이유를 물어보니 바로 알코올 중독자들의 아픔에 함께하기 위한 것이라 했다. 이 시대 가난한 이와 함께하신 선생은 가난의 영성을 사신 예언자로 기억된다.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을 잘 듣게 되면 연민만이 아니라 분노하게 된다. 내몰린 그들의 가난에는 그들이 단순히 게을러서가 아니라 탐욕스럽고 불의한 분배구조가 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나눔은 연대의 기본이고, 구조적인 원인의 제거까지다

부끄러운 이야기 하나를 고백한다. 얼마전 사제관에 숨어들어 온 아이를 붙잡은 적이 있다. 가까스로 그 아이의 아버지와 연락할 수 있게 되어 전화를 걸었는데 신호음만 울리자 그 아이가 말했다. “술 퍼마시고 자고 있을 거예요.”

한참 뒤 연결이 되어 상황을 설명하고 “아이를 데려가라.”고 하자 그 아버지는 “걔는 안 되는 아이니 경찰서에 넘기든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 아이는 “여기가 어디냐? 상당히 넓고 좋다.”며 너스레를 떤다. 난 마음씨 좋은 아저씨처럼 아이를 훈계하고 돌려보냈다.

그런데 그날 밤 문득 이 사건이 떠올랐고, 난 내가 깨어있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나는 아이의 얘기와 그 삶에 대해 얼마나 경청하려 했는가? 엄마는 없고, 알코올로 지새우는 아버지, 그 아이가 보낸 힘든 나날들에 대해.

초등학생인데 벌써 가출한 아이다. 그렇다면 청소년 전담기관을 연결하여 제대로 도움을 받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난 성가시다는 이유로 아이의 아픔을 모른 척했다. 그리고 최소한의 온정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운동화 한 짝, 잠바 하나, 밥 한 끼 사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초겨울이었고 아이는 슬리퍼를 신고 운동복을 입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 아이에게 세상은 어떻게 비쳤을까? 성당의 신부라는 이도 무책임한 자기 아버지와 하나도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분노한다지만 구체적인 행동이 없다면 위선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먼저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에서 나눔과 사랑의 실천을 생각할 수 있다. 나눔에 대해 교부들의 날카로운 가르침을 들어보자.

“가난한 이들에게 필수적인 물건들을 줄 때,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의 것을 선물로 베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을 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비의 행위를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정의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그레고리오 1세 교황).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어 갖지 않는 것은 그들의 것을 훔치는 것이며, 그들의 생명을 빼앗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것입니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구체적인 행동으로 개인이든 교회 공동체든 수입의 일정액은 가난한 이들의 몫으로 확실히 떼어 나눌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연대는 빈곤의 구조적 원인까지 염두에 두는 것이고 어쩌다가 베푸는 자선행위 이상의 것으로 일상적인 형태가 되어야 한다. 시급한 요구들에만 응답하는 복지 계획들은 임시 방편이며 불평등의 구조적 원인에 맞서 싸워야 한다(「복음의 기쁨」, 188. 202항 참조).

이러한 까닭에 교회는 선의의 사람들과 연대하여 구조적 악을 타파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구체적인 노력의 하나로 주교회의 차원의 체계적인 연구와 선의의 각계 전문가들, 경제 정치인들의 자발적인 모임을 유도해야 할 것이다. 교종도 언급한 바 있지만 추수할 것이 많으나 일꾼이 적으니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을 보내달라고 청하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바른 일에 투신할 일꾼들을 보내달라 주님께 청하고 또한 그들의 양성에 힘을 써야 한다.

모든 신앙인은 사회문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공부하도록 하자. 애긍차원의 나눔에 앞서 정의의 실천이 막중함을 알아야 한다. 최근에 각 교구와 본당들이 사회교리 강좌와 실천운동을 나름대로 지속해서 추진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시편 저자는 정의 없이 구원이 없음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땅에서 충성이 움터 나오면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정의가 당신 앞을 걸어나가면 구원은 그 걸음을 따라가리라”(시편 85 참조).


연대를 위한 구체적인 노력

연대의 노력이 일시적이 아닌 일상적인 것이 되도록 하자. 교회 공동체가 구상하는 사목이나 사업 그리고 행사 등을 계획할 때 가난한 이들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이를테면 인권침해 소지도 있고 수용시설이 될 수 있는 대단위 복지시설보다는 작고 소박한 시설로 가야 한다.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고 본당이나 지구차원에서도 설치 가능한 작은 시설 운영은 자라나는 청소년과 교우들에게 좋은 교육적 효과도 있고, 자연스럽게 작은 이들을 위한 교회임을 드러내게 된다.

교우들이 사례금 형식의 봉투를 마련하기가 부담이 되어 봉성체나 각종 성사와 준성사를 청하기를 망설이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이 편안하게 느끼는 아버지 집이어야 한다. 또한 생활필수품으로 여겨지는 당연한 물품구매 때도, 여가와 취미생활을 즐길 때도, 가난한 이들을 염두에 두며 지나치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가난의 영성을 계속해서 심화시킬 필요가 있다. 복음의 가난한 예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프란치스코 성인이나 가난하게 사신 성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가난의 기쁨을 사는 이들의 삶을 발굴하여 소개하면 좋을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이나 선우경식 선생도 그 가운데 하나다.

가난의 영성은 삶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적어도 가난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뭔가 불편을 기꺼운 맘으로 감내하는 태도도 괜찮다. 유쾌하지 못한 경험도 복음으로 되새길 때 얻는 것이 많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 며칠 동안 장애형제와 함께 지내며 몸을 씻겨주면서 장애에 대한 낯선 느낌이 반감됨을 느꼈다.

하느님은 프란치스코 교종을 통해서 우리 마음 안에 작지만 가난의 매력을 씨앗으로 심으셨다. 작은 경향성이라도 귀하게 여기고 그 경향성을 싹 틔웠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나는 소박하게 설교하고 불편하게 이동하고 작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은총을 청한다. 이는 어쩌면 나의 가식적이고 게으르고 권위적인 태도가 복음을 구현하는데 장애가 됨을 잘 알기 때문인지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 교회의 쇄신은 이 가난의 영성 심화에 달렸다고 본다. 그렇다고 완벽한 가난의 영성을 욕심낼 필요는 없다. 수영을 배울 때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차츰차츰 익숙해지는 것처럼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 역시 가난한 이들 속에 있으면서 배울 것이다. 교종은 말한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복음화되도록 해야 합니다”(「복음의 기쁨」, 198항 참조).

연대는 일방통행이 아니다. 상호 도움을 주고받는 살아있는 관계여야 한다. 이를 위해 하나의 제안을 하자면, 우리 교회 특히 사목자들은 가난한 이들 한 그룹(또는 개인)을 지속적으로 만나는 것이 좋다. 곧 노동자들, 이주민들, 장애우들, 해고노동자들, 사회적 약자들로서 내몰린 이들을 지속적으로 만날 때, 연대의 의미와 함께 그들을 통해서 우리가 복음화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교종은 청소부들을 지속해서 만났고 그분들은 서로를 친구로 불렀다. 주님도 우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벗이라 부르지 않았는가.

마지막으로 가난한 이들이 교회의 주체로서 자리하며 지속적인 연대를 통해 성장할 수 있는 사목구조로, 소공동체를 추천한다. 교종은 가난한 이들을 교회 여정의 중심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하시며, 이것을 새로운 복음화라고까지 말한다(「복음의 기쁨」, 198항 참조).

소공동체로 엮어진 교회 공동체를 통해 구성원 모두가 복음을 듣고 삶을 나누고 할 수 있는 것을 함께하며 겨자씨같이 작지만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살게 된다. 소공동체는 작지만, 아니 작기에 모든 이를 아우르는 교회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작은 연대는 더욱 큰 연대로 나아갈 것이다. 눈먼 세계화에 맞서 인간적인 세계화, 참된 의미의 세계화가 우리가 바라는 연대일 것이다. 세상 모든 이가 형제자매들이지 않은가. 이런 가장 큰 연대는 가장 작은이 하나라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에서부터 출발한다.

‘부자와 라자로’에서 부자의 죄는 무엇일까? 자신이 조상님이라고 부르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있는 라자로를 생전에 도외시하고 모른 척한 것이다. 라자로는 남이 아니라 바로 그의 형제였다.

* 서춘배 아우구스티노 - 의정부교구 신부. 지금 광릉본당 주임신부로 있다.

[경향잡지, 2015년 1월호, 서춘배 아우구스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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