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월)
(백)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수도 ㅣ 봉헌생활

까말돌리 연합회의 창설자 성 로무알도의 삶과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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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11-25 ㅣ No.469

[영성의 향기] 까말돌리 연합회의 창설자 성 로무알도의 삶과 영성

홀로 외로이 그러나 여럿이 함께



까말돌리 연합회의 창설자 성 로무알도는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 지방의 세르지오(Sergio) 공작 가문에서 951년경에 태어났다. 소년시절 수준 높은 교육을 받고 전도유망한 청년으로 자라났으나 토지 소유 문제로 논쟁이 붙어 아버지가 숙부를 살해하자 어머니가 그를 클라세(Classe)에 있는 성 아폴리나레(Apollinare) 수도원으로 피신시켰다. 그곳에서 그는 수도성소를 느껴 20세 되던 해에 입회했다. 하지만 하느님을 온전히 갈망하는 고독한 삶을 갈구했기 때문에 공동체 수도생활에 만족하지 못하였다. 3년 후, 더 엄격한 수도생활을 원하던 그는 아빠스의 허락을 받아 베네치아에 살고 있는 은수자 마리누스(Marinus)를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그는 고행과 금식 그리고 시편기도를 엄격히 실천했던 스승을 시봉하면서 은수생활을 배워나갔다. 특별히 요한 카시아누스(Joannes Cassianus) 저서인 『이집트 수도자에 관한 강의』에 심취하여 나름대로 은수생활에 필요한 규칙을 만들어 실천했다.

978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총독 베드로 오르세올로(Pietro Orseolo)가 마리누스와 로무알도 성인을 설득해 피레네(Pyrenees) 산맥에 위치한 쿡사(Cuxa)의 성 미카엘 수도원으로 보냈다. 그들은 수도원 경내 외딴 곳에 은수처를 지어 은거하면서 공동체생활(Cenobium)과 은수생활(Eremita)을 겸하였다. 얼핏 보면 여럿이 함께 사는 공동체 생활과 홀로 떨어져 사는 은수생활은 상반된 생활방식처럼 보이지만, 두 생활방식을 겸하는 것은 각각의 생활방식이 지닌 단점을 보완해 주었다. 10년 후, 988년 성인은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자신의 죄를 속죄하려고 결심한 아버지에게 용기를 북돋아 세베로(Severo) 수도원에 입회하게 하였다.

평소 로무알도 성인을 흠모하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오토(Otto) 3세는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를 성 아폴리나레 수도원의 아빠스로 임명하였다. 성인은 2년 후에 아폴리나레 수도원의 아빠스 직을 사임하고 은수생활을 위하여 페레움(Pereum)의 교외로 물러났다. 높은 성덕을 쌓은 성인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고 또한 그의 가르침에 따라 은수생활에 투신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는 이탈리아 북부지역에 많은 은수처를 세웠고, 또 다른 은수처를 세우기 위해 헝가리로 갔으나 갑작스럽게 병이 도져 하느님의 뜻이 아님을 직감하고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그는 토스카나 지방으로 내려와 아펜니노(Apennino) 산맥의 깊은 골짜기에 숨어들었다. 1012년 아레쪼(Arezzo) 인근에 있는 까말돌리(Camaldoli) 숲속에 성인이 세운 은수처는 후일 까말돌리 수도회(나중에 베네딕도회의 연합회로 편입됨)의 모원이 된다. 하지만 은수처에서도 고독과 평온을 누릴 수 없었다. 개혁되지 않는 수도원들로부터 부정한 파문을 당하면서 중상모략과 핍박이 이어졌고 심지어는 제자의 비방으로 교수형 위협까지 받을 정도로 수치를 감내해야 했다.

성 로무알도는 1027년 6월 18일과 19일 밤사이, 발 디 카스트로 은수처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거처의 문을 잠그도록 하고 모든 형제들을 물러가게 한 후 은수처의 고독과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1032년 그는 복자품에 올랐으며, 1595년에 클레멘스 8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인의 무덤은 파브리아노(Fabriano)의 성 비아죠(Biagio) 성당에 있다.

성 로무알도는 높은 완덕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하느님께 대한 형언할 수 없는 불타는 열정으로 관상 중 탈혼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특별히 신?구약의 숨은 신비들을 이해하는 데 탁월했으며 예언의 은사를 받아 여러 일들을 예견하기도 했다. 성인의 은수생활은 하느님 현존의 강력한 증거가 되었다. 성인은 수도자들이 각 은수처에서 홀로 수행하면서도 공동체 유대를 갖는 형식의 수도생활을 주창하였다. 이상적인 수도생활의 방식은 공동체생활과 은수생활이 조화롭게 결합된 형태로 형제적 친교를 나누면서도 은수처의 독방 안에서 그리스도와 인격적 관계를 맺으며 완전한 금욕생활을 실천하는 것이다. 성인은 당시 수도자들뿐 아니라, 서민 대중들의 삶에도 크게 영향을 주고 있었던 베네딕도 수도규칙의 진가를 발견했다. 성인은 관상과 고독에 대한 헌신적인 정진이 수도승 삶의 본질이어야 한다는 전제 아래, 공동체와 은수처 그리고 노동과 관상의 관계를 베네딕도 수도규칙에 비추어 규명했다.

성인의 가르침에 따라 수도원(“Ad hoc nos” 1105년 설립)과 은수처(“Gratias Deo” 1113년 설립)에서 수행하던 은수자들은 1099년 교황 파스칼 2세에 의해 단일 연합회로 통합되었다. 현재 이들 대부분은 성 베네딕도회 까말돌리 연합회에 속해 있으며, 일부는 1520년에 복자 바오로 쥬스티노(Paolo Giustino)에 의해 창설된 몬테 꼬로나(Monte Corona) 은수 까말돌리 연합회란 명칭을 가진 독자적인 수도회로 남았다. 까말돌리 연합회의 문장은 두 마리의 비둘기(공동체 생활과 은수생활)가 성령의 도움으로 성혈이 담긴 성작 위에 일치하는 모습을 담은 형상이다. 까말돌리 연합회 회원들은 2012년 3월 10일 로마의 성 그레고리오 알 첼리오(S. Gregorio al Cielio) 수도원에서 교황 베네딕도 16세와 함께 연합회 설립 1000주년 기념 축하행사를 가졌다. 까말돌리 연합회에서는 설립 1000주년 기념 선교사업으로 여자 은수 수도원의 한국 진출을 계획하고 있다. 모국의 많은 젊은 여성들에게 성 로무알도의 가르침에 따라 이상적인 수도생활에 정진할 기회가 하루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분도, 2012년 겨울호(제20호), 글 최성혜 마르타 수녀(까말돌리 수도회, 로마 성 안토니오 수도원), 사진제공 최성혜 마르타 수녀, 박현동 블라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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