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5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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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지] 아름다운 순례길을 가다2: 길을 배우다 - 그 아름다움에 겸손을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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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9-19 ㅣ No.710

'아름다운 순례길'을 가다 (2) 길을 배우다 - 천호로 가는 길


파란 하늘, 푸른 숲, 물소리, 바람소리... 그 아름다움에 겸손을 배우다

 

 

새벽 4시 30분. 새벽 예불 시간을 알리는 북소리에 잠이 깼다. 이어서 맑은 목탁 소리가 새벽 하늘을 가른다.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도 들린다. 땅에 괸 물에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소리인가. 피곤함이 씻은 듯 사라지고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새벽 산사의 색다른 체험이다.

 

아침 6시에 공양을 한 후 잠시 대웅전에 들어가 반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구도자가 된 것 같다. 순례란 길을 찾아나서는 일(求道)이 아닌가. 그러니 순례자는 구도자인 것이다. 엉뚱한(?) 생각에 잠긴다.

 

7시 30분, 송광사를 뒤로 하고 둘째날 순례를 시작한다. 하천을 끼고 30분쯤 올라가자 왼쪽으로 갈림길이 나오고 그 길을 오르면 바로 작은 못(수류지)이다. 수류지가 끝나고 조금 더 가니 산속으로 이어지는 임도(林道)가 오른쪽으로 나 있다. 이제부터 본격 산행길이다. 그러나 길이 잘 닦여 있는 데다 가파르지 않아 가볍게 산책하는 기분이다.

 

싱긋한 풀냄새. 비가 그치면서 산봉우리를 감쌌던 구름들이 서서히 걷힌다. 십여 분쯤 걸었을까. 갑자기 뭔가 앞을 막아선다. 숲이다. 거대한 숲이 나를 집어삼킬 듯이 압도한다. 이런 체험은 난생 처음이다. 한동안 멍하니 숲을 바라보다 다시 걷는다.

 

파랗게 갠 맑은 하늘, 물기를 함빡 머금은 채 나그네를 호위하는 짙푸른 숲, 작은 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소리, 새소리, 벌레소리, 바람소리….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솟구친다. 걷기 시작한 지 2시간이 지났지만 조금도 힘들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마침내 고갯마루에 도착했다. 오전 10시였다.

 

그런데 내려가는 길이 잘 보이질 않는다. '잘 살펴보면 비탈길이 있고 그 길을 따라가면 된다'는 말을 들었는데…. 다시 한 번 살펴보니 사람이 다녔던 샛길 흔적이 어렴풋이 나 있다. 그 길을 따라 내려간다. 불과 30여m쯤 내려가자 흔적이 끊어진다. 망설이다가 계곡으로 향하는 비탈을 선택했다. 그게 문제였다.

 

길인 것 같아서 헤쳐가다 보면 꽉 막혀 있고, 막힌 곳을 헤치고 더 가다보면 또 막혀 있다. 돌아서서 다른 길을 찾아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헤매기를 40여 분, 아무리 노력해도 길을 찾을 수 없다. 궁리 끝에 처음 내려오기 직전 고갯마루까지 되돌아가기로 했다.

 

덤불과 넝쿨을 어렵사리 헤치고 내려온 길인데다 힘이 빠져서 다시 올라가는 길은 몇 배나 힘들다. 다섯 걸음을 채 떼지 못했는데 숨이 목에까지 차오른다. 등에 진 배낭까지 합세해 주인을 괴롭힌다. 길을 오를 때 그토록 정겹게 들리던 새소리 벌레소리가 나를 조롱하는 듯하다. 40여 분을 고생한 끝에 겨우 고갯마루로 되돌아왔다.

 

3개월 전 이 길을 답사한 적이 있는 천호성지 도보순례 담당 이영춘 신부와 통화한 후 어렵사리 길을 찾았다. 찾았다기보다 뚫었다. 임도와 연결되는 곳까지 내려오니 낮 12시가 넘었다. 40분이면 될 길을 1시간 20분이나 숲과 싸우며 헤매다 2시간 만에 내려온 것이다. (독자들은 이 길을 걸을 때 아무 문제없을 것이다. 길을 닦아놓고 표지판을 설치한 후에 순례길을 공식 선포할 것이기에.)

 

몰골이 말이 아니다. 온 몸이 땀투성이고 곳곳이 상처투성이다. 바지와 신발은 진흙투성이가 됐다. 계곡물에 셔츠와 바지, 신발을 대충 헹궜다. 반바지로 갈아입고 샌들을 신었다. 젖은 옷가지는 배낭 위에 걸치고 터덜터덜 걸어가니 영락없는 패잔병이다.

 

다시 1시간을 더 걸어 한고산천을 건넌다. 고산 시내에서 점심을 해결하고는 고산성당과 고산향교 앞을 거쳐 다시 고산천 제방길을 따라 천호로 향했다. 곧게 뻗은 제방도로가 인상적이지만 한여름 오후 햇살이 너무 뜨겁다.

 

오전에 겪었던 일들이 가슴을 옥죄듯이 아스라하게 떠오른다. 불과 몇 시간 사이에 천당과 지옥을 오간 기분이다. 도대체 뭐가 잘못 됐을까? 임도를 따라 산에 오르며 아름다움에 취해 그 다음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 길을 더 자세히 물어보고 더 신중을 기했더라면 산속을 그토록 헤매는 고생은 하지 않았을 것인데…. 너무 쉽게 덤벼들었다. 겸손하지 못한 것이다.

 

이 산길에서 배운다. 길을 배운다. 탄탄대로가 펼쳐져 있다고 너무 기뻐하지도 말 것이며, 자신감에 넘쳐 주위를 무시하지도 말 것이다. 길에 서면 늘 겸손할 것이다. 인생 길도 마찬가지다.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본다. 자신감에 차 있어서 잘 된 경우보다 겸손하지 못해서 잘못된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이 길은 천호로 가는 길이다. 천호성지는 170년 된 교우촌이 있는 곳이고, 순교성인들을 비롯한 순교자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어우삼거리를 지나 마을길로 접어든다. 걸음은 자꾸만 더뎌진다. 샅이 쓰라리고 샌들을 끄는 발바닥엔 물집이 잡힌다.

 

비봉공소 옆 가게에서 막걸리 한 병을 사서 고산에서부터 오후 순례길을 함께 하고 있는 이영춘 신부와 나눠 마신다. 남은 4km는 막걸리 기운으로 간다. 천호성지 토마스 쉼터에 도착하니 6시 50분이다. 대단히 길고 고단한 하루였다. 천호로 가는 길이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평화신문, 2009년 9월 13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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