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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수도생활의 도전: 하느님 먼저 챙기고 - 축성생활, 그 신비와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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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11-25 ㅣ No.471

[수도생활의 도전] 하느님 먼저 챙기고 - 축성생활, 그 신비와 수행



언어보다는 실제를

역사적으로 ‘축성’이라는 말은 수도자들의 삶을 가리키는 단어로 초세기부터 사용되어 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서는 여전히 ‘수도생활’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고, ‘축성’(consecratio)이라는 단어는 네 곳에서밖에 나타나지 않지만(교회헌장 44ㄱ; 46ㄴㄷ; 수도생활 교령 5) 축성생활의 신학적 의미를 여러 차원에서 심화함으로써 수도생활의 신학적 위상을 획기적으로 강화하였다. 이어서 새 교회법전(1983)과 요한 바오로 2세의 권고 『봉헌생활』(vita consecrata)(1996) 이후 ‘축성생활’이라는 용어가 ‘수도생활’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의미로 널리 쓰이게 된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용어위원회는 2012년 라틴어 ‘vita consecrata’의 우리말 번역에 대해 남녀 수도자 장상연합회의 의견을 참고하여 ‘봉헌생활’과 ‘축성생활’ 두 용어를 함께 사용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은 1997년 동일한 단어를 ‘봉헌생활’로 번역하기로 했던 결정에 대해 부분적이나마, 수도자들 사이에 공유되던 아쉬움에 대한 경청과 숙고에서 나온 보완책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기에 여기에서는 ‘축성생활’이라는 단어를 쓰기로 한다.

라틴어 ‘vita consecrata’를 우리말로 옮기는 문제는 단지 언어학적 이해를 넘어 신학적 실제에 대한 이해가 요구된다. 어차피 인간 언어는 실제를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더구나 번역에서는 그 한계가 더욱 좁아진다. 따라서 우리는 용어 자체에 매이기보다는 그 용어가 의도하는 신학적 실제를 이해하고 하느님께서 초대하시는 그 삶에 충실하려는 노력이 더 중요할 것이다. 이 글은 그런 노력을 돕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름의 두 차원

Consecratio라는 명사는 원래 신적 세계와 맺는 관계를 가리키는 용어로, ‘거룩하게 하다’, ‘신화(神化)하다’, ‘성스럽게 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consecrare에서 나왔다. ‘성스럽다’는 말은 모든 종교의 공통된 용어로 “종교적 목적으로 분리되어 따로 보존된 어떤 것”을 묘사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특히 하느님의 세계, 그리고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거나 의미하면서 그분과 직접 연결된 것에 쓰는 말이다. 축성(Consecratio)의 개념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될 때 그리스도를 따름(Sequela Christi)과 긴밀히 관계하며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먼저, 신적 차원의 신비적 의미로서 Consecratio는 하느님께서 당신이 선택하여 부르신 사람을 성령을 통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나누는 사랑의 친교라는 거룩한 영역에 들게 하시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는 하느님께서 그 사람에 대해 주도하시는 자유롭고 고유하며 독점적인 행위로서 축성의 객관적 측면을 이룬다. 이로써 축성된 사람은 하느님의 온전한 소유가 되며 그분과 인격적 관계 안에 들게 되는 것이다. 곧 하느님께서 그를 온전히 차지하시고,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을 위해 그를 따로 보존하시며, 깊은 개인적 친밀함 안에서 내면으로부터 그의 존재를 변화시키신다. 이는 단연 으뜸으로 ‘축성된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그를 형성하시기 위함이다.

도덕적, 수덕적 의미에서 Consecratio는 부름받은 사람이 자유롭고 의식적인 응답으로 하느님께서 자신을 차지하시도록 내드리는 행위이다. 곧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내주시는 하느님께 인간이 전적인 사랑의 행위로써 자신을 바쳐드리는 봉헌인 것이다. 이는 하느님의 활동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행위이자 하느님의 초대에 대한 인간의 구체적, 실천적 응답이다. 따라서 은총을 활용하여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위한 노력으로서 주관적, 수행적(수덕적) 차원이 된다. 이 자유롭고 인격적인 응답은 인간 전 존재를 통하여 이루어지며 이 응답을 통해 비로소 축성이 구체화된다. 이런 의미의 봉헌은 인간의 주도에 의한 봉헌, 곧 예물이나 시간을 바치는 봉헌과는 달리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택에서 시작되는 축성을 전제로 하여 실현되며 보통 평생에 걸쳐 수행된다.

공의회는 몇 가지 신학용어를 충실히 구별하는데, 인간이 하느님께 자신을 내드리는 행위를 가리킬 때는 ‘헌신하다’(devovere)나 ‘자신을 넘겨주다’(mancipare)를 사용하고, ‘축성하다’(consecrare)라는 동사는 하느님의 행위에만 쓴다(교회 헌장 44 참조). 결국 축성은 하느님의 일이요 봉헌은 인간의 응답이다. 이 두 차원이 이루는 하나의 실제가 Consecratio의 개념이다. 따라서 ‘vita consecrata’는 엄밀한 의미에서 ‘축성봉헌 생활’로 번역됨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편의상 ‘축성’을 하느님의 행위와 인간의 응답을 모두 포함한 복합적 실제로 이해하는 입장에 따라 ‘축성생활’로 칭한다.


나눌 수 없는 하나, 하지만…

이상의 두 가지 의미는 서로 구별되는, 그러나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곧 축성생활이라는 용어는 ‘축성’이라는 말이 지닌 이상의 두 가지 차원의 의미를 다 포함하면서 삶의 통일성을 나타낸다. 실제로 축성은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의 열매이다. 두 자유와 두 의지가 개입하는 이 만남은 하느님의 선택과 이에 동의하는 인간의 응답으로써 사랑의 계약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축성생활은 이렇게 갈라놓을 수 없는 두 차원을 아우르는 총체적 실제이다.

그러나 축성하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성령 안에서 한 사람을 선택하고 부르시어 자연적 상태에서 신적 영역으로 옮겨가시고, 당신 계획을 위하여 ‘거룩한 분’이신 당신과 특별한 관계 안에 그를 세우신다. 따라서 축성은 우선적으로, 또 본질적으로 사람을 향한 하느님의 움직임이지 하느님을 향한 사람의 움직임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을 ‘축성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에 의해 ‘축성된다’(consecratur). 인간 편에서는 축성은 선택이 아니고 은총의 선물인 것이다. 물론 하느님의 주도권이 인간의 공헌을 없애지는 않는다. 하느님의 선택이 인간의 자유의지와 대화하지 않는다면 개인적, 인격적 축성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수도생활의 바탕에는 축성이 자리한다. … 축성은 하느님의 행위이다. 곧 하느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부르시고 특수한 방식으로 당신에게 자신을 바치도록 당신을 위해 그를 따로 보존하신다. 동시에 그분은 축성에서 인간의 응답이 자신의 전부를 내맡기는 깊고 자유로운 위탁을 통해 표현되도록 은총을 부여하신다. 거기에서 나오는 새로운 관계는 순전히 선물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광과 축성된 사람의 기쁨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맺어진 상호적 사랑과 충실성의 계약이요, 친교와 사명의 계약이다.”(『본질적 요소』 5항)


하느님 먼저, 신비 먼저

하느님의 선택과 인간의 응답을 통한 사랑의 계약이라는 축성의 두 요소는 세례성사와 혼인성사, 그리고 성품성사에서 이루어지는 축성에도 똑같이 들어 있다. 따라서 평신도도 성직자도 ‘축성봉헌된 자’로서 이 두 차원을 산다. 그럼에도 현재 교회에서 ‘복음적 권고의 서약을 하는 삶의 형태’(만)을 ‘축성생활’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적절한 일이다. 하지만 이 삶의 형태에 고유하고 적절한 명칭이 아직 없어서이다. 서양말에서나 우리말에서나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러한 사정에서는 또한 수도생활에 대한 강력한 암시가 엿보인다. 수도자들은 축성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우선성과 수위성을 다른 두 신원보다 더 직접적이고 명시적으로 보여 주도록 부름 받고 있다는 암시이다. 사실 그리스도교의 수도생활은 다른 어떤 종교들에서처럼 깨달음을 향한 비움과 극기의 수행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여정으로서 하느님과 맺은 관계에 근거한 신비적 요소, 곧 은총의 삶이 우선적이요 본질적이다. 그리스도교 수도생활은 다른 종교에서처럼 스스로 깨우치고 자기 힘으로 헤쳐 나가는 힘든 수행의 길이 아니다. 오히려 성령의 사랑과 은총이 내 초라한 수덕적 노력을 이끌어 주시도록 하느님을 믿고 자신을 내맡기는 삶이다.

교회 안에서도 극기와 고행으로 분투하여 성덕에 도달하려는 인간 주도의 수행적 차원이 우선시되던 시대나 사도적 활동이 더 주목받던 시대에는 수도생활이 주로 인간이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행위로 간주되었고, 그래서 ‘봉헌생활’로 불리는 것이 일면 당연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공의회는 고맙게도 수도생활의 신비적 차원을, 곧 존재적 차원을 재발견하여 심화해 주었다. 이런 맥락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수도자들에게 말한다. “교회는 여러분을 무엇보다 우선 ‘축성된’ 사람들로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 독점적인 소유로 축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축성은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광대한 공동체 안에서 여러분의 자리를 규정합니다.”(『구원의 은총』 7항)

따라서 축성된 자의 가장 큰 관심사는 하느님이며 하느님이어야 한다. 수도생활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축성생활은 하느님을 갈망하고 찾고 하느님을 체험하며 일치하라는 특별한 부르심과 은사를 받은 삶이다. ‘축성생활’이라는 용어가 회복된 것은 다행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언어 자체가 아니라 실제이다. 그 실제를 깊이 인식하고 그에 충실하려면 우선 각자의 삶과 공동체의 삶에서 하느님의 우선성을 드러낼 일이다. 하느님을 먼저 챙길 일이다. 이 시대는 신비와 영성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아니, 우리 스스로 알든 모르든 저 깊은 곳에서는 하느님을 필요로 한다. 축성생활자들은 모든 사도적 활동 이전에 바로 축성의 이 신비적 차원을, 하느님의 현존을 육화하는 일이 첫째 임무일 터이다. 바로 이것이 축성생활 고유의 새로운 복음화가 아닐까. 수도자를 포함한 모든 축성생활자들이 부디 이 세상에 하느님의 존재를, 그분의 사랑스럽고 자비로운 현존을 가시적으로 더 잘 드러내 보여 주기를!

[분도, 2013년 여름호(제22호), 글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성삼의 딸들 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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