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기해박해 성인들의 순교지 당고개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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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9 ㅣ No.616

[한국 교회 사적지 순례] 기해박해 성인들의 순교지 당고개 성지


당고개는 어떤 곳이었나

서울시 용산구 신계동에 가면 높은 건물들 사이에 아기자기한 공원과 같은 성지를 마주하게 된다. 황토 토담을 돌아 대문을 통해 들어서면 소박하고 단아한 한옥을 볼 수 있다. 성지 전체를 둘러보고 있노라면, 마치 어머니의 품 안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편안하다. 순교자들의 신앙을 묵상하고 기도할 수 있는 곳이자 쉼터 같은 곳, 이곳은 당고개 성지이다.

‘당고개’라 하면 보통 서울 지하철 4호선 당고개역을 떠올린다. 그러나 당고개 성지는 용산전자상가와 구 용산구청 사이에 있다. 가까운 거리에 서소문 밖 성지와 새남터 성지가 있다. 옛날 고개마루턱에 당집이 있어 당고개라고 불렀다고 한다.1) 조선 시대 고지도 및 사료에는 ‘당현’(堂峴) 또는 ‘당고개’(堂古介)라고 표기되어 있다.2) 당고개는 문배산(文培山) 기슭의 고개였다. 문배산은 용산의 한 줄기로 일명 ‘문평산’(文平山)이라고도 불렀다. 용산구 문배동은 이 문배산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문배산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용산선(龍山線)이 부설되면서 이전되었다고 한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일제가 그곳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3)의 신사(神社)를 지어 놓았는데, 광복 후에 없어졌다고 한다.4)

당고개는 조선 시대 형장들 가운데 한 곳이었다. 조선 시대 서울에서 형장으로 잘 알려진 곳은 서소문 밖, 새남터, 당고개였다. 당고개는 용산의 큰길이었으므로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을 것이다. 즉 군중에게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줄 수 있는 형장으로서 적격의 장소인 셈이다. 또한 문배산에 공동묘지가 있어 시신을 매장하기가 용이하다는 이점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당고개에서 처형이 이루어졌던 것 같다. 전쟁에서 패한 장수, 주인을 죽인 노비 등이 교형(絞刑) 혹은 참형(斬刑)으로 처형되었다.


기해박해 순교자들

박해시대 당고개에서 신자들은 순교의 선혈을 흘렸다.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그곳에서 신자 10명이 순교하였다. 1839년 12월 27일(음)에는 박종원(朴宗源, 아우구스티노) · 홍병주(洪秉周, 베드로) · 권진이(權珍伊, 아가타) · 이경이(李璟伊, 아가타) · 손소벽(孫消碧, 막달레나) · 이인덕(李仁德, 마리아) · 이성례(李聖禮, 마리아)가 순교하였다. 이어 12월 28일에는 홍영주(洪永周, 바오로) · 이문우(李文祐, 요한) · 최영이(崔榮伊, 바르바라)가 순교하였다.

그런데 본래 형장은 당고개가 아니라, 서소문 밖이었다. 잘 알려졌듯이, 서소문 밖은 한국 천주교회의 최대 순교지이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당시 신자들 대부분이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기해박해 때도 많은 신자들이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1839년 4월 12일(음)에 이광헌(李光獻, 아우구스티노) · 남명혁(南明赫, 다미아노) 등 9명이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이후 11월 24일(음)까지 처형된 32명도 모두 서소문 밖에서 참형을 받았다.5) 이러한 전례로 볼 때, 박종원 등의 처형도 서소문 밖에서 이루어질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형장은 바뀌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다음의 사료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자.

ⓛ 이 처형과 다음 처형은 서소문 밖에서 했어야 한다. 그러나 상인들이 대목 장을 방해하지 않도록 다른 곳에서 하기를 청하였고, 그래서 당고개 또는 새남터라 불리는 곳에서 실시되었다.6)

서소문 밖의 상인들이 반대했다. 당시 서소문 밖은 서울의 4대 시장의 하나로, 주요한 상업 지대였다.7) 그들이 반대한 이유는 연말 대목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형일은 음력 12월 27일과 28일로, 새해를 앞둔 시점이었다. 상인들은 연말 대목에 처형이 집행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조정에 형장을 옮겨줄 것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또 다른 자료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②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사학(邪學) 죄수 가운데 이미 자세히 조사한 자들의 수가 적지 않은데, 모두 부대시(不待時)8) 죄인에 해당합니다. 일찍이 섣달그믐[歲除]이 멀지 않았을 때는 도성 문밖에서 법을 집행하는 것이 편치 않으므로 특별히 하교하길 ‘초기(草記)를 들여 사장(沙場)에서 거행하라’고 한 예가 있습니다. 이제 이에 의거하여 해당 관서에 분부하는 것이 어떨지요” 하니, 윤허하였다.9)

그런데 최근에 1839년 12월의 형장이 새남터였을 가능성도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10) “한국천주교회사” · “기해일기” 등에는 박종원 등이 모두 당고개에서 순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까지는 이와 같은 교회 측 자료를 근거로 1839년 12월의 형장이 당고개라고 여겨왔다. 반면 “비변사등록”에는 형장이 ‘사장’(沙場), 즉 새남터라고 되어 있다(②).11) “일성록”에는 12월 27일에 신자 7명이 사장에서 참수되었다고 되어 있고, “승정원일기”에는 12월 28일에 신자 3명이 사장에서 참수되었다고 되어 있다. 관찬 사료에는 형장이 사장, 즉 새남터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이 자료들과는 달리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에는 12월 27일의 형장이 ‘당고개 또는 새남터’라고 되어 있는 내용도 있다(①). 이처럼 자료에 따라 형장이 당고개 또는 새남터로 되어 있다. 현재로서는 당고개인지, 새남터인지를 명확하게 단언하기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1839년 12월의 형장이 당고개뿐만 아니라 새남터일 가능성도 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순교자들 중에서 이성례를 제외한 9명은 1925년 7월 5일에 시복되었다. 그들은 1984년 5월 6일 서울에서 열린 시성식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의 모친인 이성례는 감옥에서 어린 자식이 굶어 죽어 가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약해져 거짓으로 배교하는 말을 하고 풀려났다. 그러나 이후 다시 체포되었을 때는 배교를 취소하고 순교의 원의를 잃지 않았다. 이성례는 현재 시복시성 작업이 추진 중에 있다.12)


순교 성지를 조성하다

당고개는 오랫동안 천주교회의 관심 밖에 있었다. 그러는 사이, 용산 지역의 개발로 인해 점차 당고개의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0년대 초, 서울대교구 순교자 현양위원회(이하 ‘순교자 현양회’)는 순교지 당고개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순교자의 얼을 되살리려는 노력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순교자 현양회는 1983년 11월 당고개 입수 교섭에 나섰고, 1984년 3월 23일 임대를 신청하여 29일에 허가를 받아 4월 19일에 성지 개발 신청을 냈다. 이러한 개발 사업은 1984년 5월 6일에 열린 시성식에서 당고개 순교자 9명이 성인으로 시성됨으로써 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다. 1986년 6월 17일에 성지 조성을 위한 공사에 착수해 9월 17일에 준공식을 하였고, 12월에는 성지 부지 530평을 매입하였다.13) 순교자 현양회는 서울대교구 가톨릭 여성연합회의 지원을 받아 순교 기념제대를 설치하고 1987년 1월 31일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추기경의 집전으로 축성 미사를 봉헌하였다. 이로써 서울대교구와 순교자 현양회의 맘과 노력으로 시작된 당고개 성지 조성 사업은 마무리되었다.14) 순교자 현양회는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푸른 군대)의 기증을 받아 ‘파티마의 성모상’을 세우고 1987년 3월 25일 오기선(吳基先, 요셉) 신부의 집전으로 축성 미사를 봉헌하였다. 이어 1988년 12월 8일에는 순교 현양탑을 세워 순교 성지로서의 모습을 새롭게 하였다.15)

이와 같이 일신한 당고개 성지는 1990년 9월 15일자로 용산 본당의 관리 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1년 후인 1991년 3월 30일 관할구역 조정으로 성지 관리가 삼각지 본당으로 이관되었다.16) 삼각지 본당은 당고개 성지를 개발 및 관리하기 위해 본격적인 움직임에 착수하였다. 이를 위해 우선 1991년 5월, 관리위원회를 구성하는 한편, 6월 6일 첫 미사를 시작으로 매월 첫 목요일 낮 12시에 정기 미사를 봉헌하였다.17) 이어 9월 29일에는 서울대교구 보좌주교 김옥균(金玉均, 바오로) 주교의 집전으로 14처 축성식을 거행하였다.19) 그리고 1996년 10월 3일에는 가톨릭 조형예술연구소가 고증을 거쳐 제작한 순교자 성상(聖像) 축복식을 거행하였다.20)


훼손 위기에 처한 당고개 성지

삼각지 본당의 노력으로 당고개 성지가 알려지면서 점차 그곳을 찾는 순례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그런데 1999년 1월, 당고개 성지는 서울시의 재개발 계획에 의해 훼손될 위기에 처했다. 서울시는 신계동 지역의 재개발 계획을 발표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기념 제대와 순교 현양탑, 십자가의 길 14처, 성모상 일대 부지가 재개발 지구에 포함되었다. 즉 성지 대부분이 훼손될 것임이 분명했다.21)

삼각지 본당은 서울시와 용산구에 공문을 보내 이의를 제기하였고, 서울대교구 제1지구와 협력하여 성지 훼손을 저지하기 위한 공동 대책을 모색하였다.22) 이처럼 성지의 훼손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서울시는 1999년 1월 7일, 당고개 성지를 원형대로 보존하는 방안을 연구 ·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성지를 원래대로 보존하고 주변 지역 일대를 공원 녹지로 조성하여 보존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서울시는 곧바로 용산구에 당고개 성지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재개발 계획을 다시 세우라는 지침을 내렸다.23)

이와 같이 서울대교구와 삼각지 본당의 노력으로 당고개 성지의 훼손을 막을 수 있었다. 당고개 성지 사태는 무분별한 개발에 맞서 성지 및 교회 문화유산을 어떻게 보존하고 관리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24)


새롭게 조성된 당고개 성지

당고개 성지는 용산 지역의 개발로 새롭게 변모하게 되었다. 서울시의 용산 뉴타운 및 국제 업무 단지 개발 등과 맞물려 새롭게 바뀌게 된 것이었다. 서울시는 당고개 성지를 비롯한 그 일대를 역사공원으로 조성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매주 목 · 토요일 정오에 성지에서 봉헌되던 미사는 2008년 4월 6일을 끝으로 개발이 끝날 때까지 중단되었다. 그 대신 삼각지 본당에서 미사가 봉헌되었다. 그리고 2002년 1월에 건립된 경당25)이 철거되었고, 성지에 있었던 성모상 등의 성물들도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26)

개발이 진행되는 동안, 2010년 9월 서울대교구는 기금 마련을 위한 특별 헌금을 시행하였다. 또한 그해 12월, 절두산 순교성지 내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에서는 당고개 성지에 설치될 성물을 미리 전시하는 기획전을 개최하였다.27) 3년간의 기다림 끝에 2011년에 기념 성당 신축 공사를 마무리하고 6월 5일 당고개 성지에서 다시 미사를 봉헌하기 시작하였다.28)

마침내 당고개 성지가 새 단장을 마쳤다. 이를 축복하기 위해 2011년 9월 4일 정진석(鄭鎭奭, 니콜라오) 추기경의 주례로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신계 역사 공원 내에 자리 잡은 성지는 지하 기념 성당과 1층 야외 마당 등으로 조성되었다. 특히 성당 내 · 외벽이 눈에 띄는데, 충청북도 진천 교우촌에서 직접 발굴해 온 옹기 조각들로 꾸며진 것이다.29) 10월 23일에는 이해인 수녀의 묵상시 ‘당고개 성지에서’를 새긴 시비(詩碑)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삼각지 본당은 제62회 본당의 날을 기념해 시비 제막식에 이어 성극 ‘이성례 마리아 낭독극’ 무대도 마련하여 신자와 순례객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30) 현재 당고개 성지는 신자들뿐만 아니라 비신자들도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쉼터 같은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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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의 고개”,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0, 142쪽.
2) “정조실록” 정조 10년(1786) 5월 23일에 ‘용산의 큰길은 즉 당고개를 말한다’(龍山大路, 卽堂古介)라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堂古介’라고 기록된 사례들을 찾을 수 있다.
3)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출병한 일본의 무장(武將).
4) “서울의 고개”, 142쪽.
5) 차기진, ‘서소문 밖 형장과 천주교인 사형’, “조선시대 서울 한양도성 서소문과 천주교 박해”((사)서울문화사학회 창립 25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 2011, 44-47쪽.
6)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p.492(샤를르 달레 저, 최석우 · 안응렬 역주, “한국 천주교회사” 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531-532쪽, 주 58에서 재인용).
7) 고동환, ‘18세기 서울의 상업구조 변동’, “서울학 연구 총서” 7,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1998, 128-129쪽.
8) “부대시참”(不待時斬)의 준말로, 법으로 정한 시기를 기다리지 않고 참형을 집행하는 일을 말한다. 참형은 추분(秋分) 이후부터 춘분(春分) 이전 사이에 집행하게 되어 있는데, 역모 등의 큰 범죄는 이에 구애받지 않았다(“한국 한자어 사전” 권1, 단국대학교 부설 동양학연구소, 1995, 101쪽).
9) “비변사등록” 1839년 12월 27일(차기진, 앞의 글, 2011, 44쪽에서 재인용).
10) 방상근, ‘서소문 밖 · 당고개인가, 새남터인가? - 1801 · 1839년, 서울의 마지막 신자 처형지’, “교회와 역사” 400호(2008. 9), 한국교회사연구소, 45-49쪽.
11) 새남터와 관련해서는 양인성, ‘순교자들의 선혈이 살아 숨쉬는 성지 - 새남터’, “교회와 역사” 440(2012. 1), 22-29쪽을 참고할 것.
12)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자료집” 5집,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2008, 317-345쪽.
13) “한강성당 25년사”, 천주교 한강교회, 1996, 38-39쪽.
14) ‘당고개 개발 마무리’, <가톨릭신문> 1987년 2월 8일자.
15) “한강성당 25년사”, 39쪽; ‘당고개’, “한국의 성지”, 크리스챤 출판사, 1988, 34-35쪽.
16) “용산 본당 60년사”, 천주교 용산교회, 2002, 185-186쪽.
17) 삼각지 본당 홈페이지; ‘당고개 성지 개발 활발’, <가톨릭신문> 1992년 6월 14일자.
18) ‘당고개 성지 14처 축성’, <가톨릭신문> 1991년 10월 6일자.
19) ‘당고개 성지 개발 활발’, <가톨릭신문> 1992년 6월 14일자.
20) ‘당고개 성지에 순교자 성상 봉헌’, <가톨릭신문> 1996년 10월 13일자; ‘당고개 성지에 순교자상 건립’, “경향잡지” 1544호(1996. 11).
21) ‘당고개 성지 사라질 위기’, <평화신문> 1999년 1월 10일자.
22) ‘당고개 성지 사라질 위기’, <평화신문> 1999년 1월 10일자.
23) ‘당고개 성지 훼손 않겠다’, <평화신문 1999년 1월 17일자; ‘당고개 성지 훼손 말라’, <가톨릭신문> 1999년 1월 17일자.
24) ‘교회 유적 문화재 지정 서둘러야 한다’, <평화신문> 1999년 1월 17일자.
25) 삼각지 본당 홈페이지 참고.
26) ‘당고개 성지 개발 위한 마지막 미사’, <평화신문> 2008년 4월 13일자.
27) ‘당고개 성지 개발 헌금’, <가톨릭신문> 2010년 8월 29일자; ‘미리 만나는 서울 당고개 순교성지 성물들’, <가톨릭신문> 2010년 12월 12일자.
28) ‘당고개 순교성지 미사 3년만에 재개’, <평화신문> 2011년 6월 12일자.
29) ‘당고개 순교성지 새 단장하고 봉헌식 열어’, <가톨릭신문> 2011년 9월 11일자.
30) ‘당고개 성지에 이해인 수녀 시비 제막’, <가톨릭신문> 2011년 10월 30일자.

[교회와 역사, 2012년 3월호,
양인성(대건 안드레아,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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