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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성경이 말해주는 기도: 구약성경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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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2-12 ㅣ No.1759

성경이 말해주는 기도

 

 

기도는 신앙인과 비신앙인을 구분 짓는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도 불가능이라는 벽을 만났을 때 기도를 하지만 신앙인의 기도는 그 대상이 명확하고 형식이 분명하며 기도하는 마음가짐이 비신앙인의 그것과는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곧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온전한 신앙인의 삶을 살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이 글을 보시는 모든 분들과 함께 우리가 보는 생명의 말씀에서는 기도를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으며 신앙인의 기도는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나눠볼까 합니다.

 

 

1. 구약성경의 기도

 

기도는 祈(빌 기)와 禱(빌 도)를 씁니다. 의미만 보면 단순히 나의 소원이나 바람을 신께 아뢴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성경의 기도, 특히 구약성경의 기도는 이보다 훨씬 더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 하느님과 인간의 인격적 만남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의 인격적 만남을 표현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단순히 인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는 것이 아닌 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하느님과 소통하는 모습이 구약성경에 나타납니다. 야곱과 아브라함은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창세 12,8; 21,33 참조) 기도를 했고, 그렇게 기도 중에 하느님을 뵌 사람들은 제단을 쌓거나(창세 4,26 참조), 기도 중에 주신 하느님의 명령에 충실하였습니다(창세 12,4 참조). 그러나 때로는 소돔과 고모라 땅 앞의 아브라함처럼 하느님께서 뜻을 거두시도록 질문을 드린다거나 그분을 설득하거나 그분께 청을 드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창세 18,23-32 참조). 심지어 야곱은 하느님과 흥정까지 하려고 하였습니다(창세 28,20-22 참조). 이러한 인간들의 기도에 하느님께서는 방문객으로 나타나시거나(창세 18,2 참조), 꿈속에 나타나셔서(창세 28,12-16 참조) 답을 주셨습니다.

 

노예가 주인에게 바닥에 엎드린 채로 소원을 아뢰듯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비교될 수 없는 서로의 위치를 뛰어넘어 인간이 청하고 설득하고 때로는 흥정까지 하며 간절히 바라는 일들에 대해 하느님께서 작은 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들어주시고 결코 잊으시거나 미루시는 일 없이 모두 다 답을 해주시는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듣고 들은 바에 대한 답을 정확히 주는 지극히 인격적인 만남을 우리는 ‘대화’라고 합니다. 기도는 대화입니다.

 

이처럼 구약성경의 기도는 단순히 소원을 아뢰고 그 소원을 들어주는 기도의 원초적인 의미를 뛰어넘어 하느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하느님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고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은 하느님과 자신이 친밀하고도 인격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결정적인 표지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 사이에도 가까워지려면 많은 대화가 필요한 것처럼 하느님과 사람이 가까워지는데도 많은 대화가 필요합니다. [2022년 2월 13일 연중 제6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8면, 이상욱 안드레아 신부(용안성당)]

 

 

- 마음을 모아 함께 하는 기도

 

예수님께서 둘이나 셋이 당신의 이름으로 모여서 기도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기도는 하나의 지향을 한 사람이 가지고 하는 것도 좋지만 여러 사람이 한 지향에 마음을 모아 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둘 이상이 모인 공동체가 한 가지 지향에 집중하여 기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혼자서 하는 기도라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바칠 수 있지만 공동체와 함께 하는 기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과 장소는 물론 기도의 형식도 하나로 통일되어 있어야 모든 구성원이 기도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기도의 공동체적인 모습을 지키기 위해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것이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서 기도가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돕는 중재자입니다. 하나 혹은 다수의 중재자가 거대한 백성을 시간과 장소, 그리고 형식 안에서 이끄는 것이 백성 모두가 기도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는 백성과 함께, 백성을 대신해서 기도하는 중재자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중재자는 모세입니다. 모세야말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기도를 중재하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특별한 자리를 주셨고(탈출 32,10; 33,6 참조), 그를 생각해서 이스라엘을 구해주기도 하셨습니다(탈출 33,17 참조).

 

두 번째 중재자는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들입니다. 정치와 종교가 하나로 일치되어 있었던 이스라엘에서 왕은 정치 지도자이면서 동시에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고 백성과 함께 기도하는 중재자이기도 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나탄예언자로부터 왕조에 대한 예언을 듣고 감사기도를 드린 다윗(2사무 7,18-29 참조)과 하느님께 성전을 봉헌하며 백성을 대표해서 장엄한 기도를 바치는 솔로몬(1열왕 8,22-53 참조)이 있습니다.

 

세 번째 중재자는 예언자들입니다.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전하는 일뿐 아니라 백성의 기도를 대신 또는 함께 바치는 직무도 수행했습니다. 특히 “민족과 도성을 위해 열심히 기도해 주는 분”(2마카 15,14)이라고 불리는 예레미야 예언자는 찬양이나 고백 혹은 간구 등 다양한 형식 안에 자신의 기도를 담았습니다. 백성들이 자신을 배척하는 어려운 상황 안에서도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께 간구했으며(예레 10,23; 14,7-9; 19-22; 37,3 참조) 때로는 백성을 원망하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도 하였습니다(예레 15,10 참조).

 

아모스 예언자 역시 불충실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시려는 하느님 앞에서 뜻을 돌이키시기를 간절히 청하는 중재의 기도를 올렸고(아모 7,1-9 참조), 호세아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불충실로 깨진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진심에서 우러나온 기도를 드려야 함을 촉구하였습니다(호세 7,14 참조).

 

또한 성조 아브라함도 예언자로 불렸는데, 곧 멸망할 소돔과 고모라 땅 앞에서 용서를 구했던 것처럼(창세 18,22-32 참조) 그가 백성을 대신하여 하느님께 간청하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구약성경은 개인의 기도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기도도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기도하는 이들 모두가 마음을 모아 중재자와 함께 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나와 신앙을 공유하는 이들과 함께 같은 시간과 장소, 일치된 형식으로 바치는 기도는 하느님께서 기쁘게 들어주시고 받아주심을 기억합시다. [2022년 3월 13일 사순 제2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8면, 이상욱 안드레아 신부(용안성당)]

 

 

- 시편

 

예비신자 교리를 받으시는 분들의 고민 중 하나가 바로 기도서에 나와 있는 여러 가지 기도를 숙지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가톨릭 기도서 안에는 다양한 지향의 기도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제 막 첫발을 떼신 입장에서 이렇게 다양한 기도를 한 번에 다 숙지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기도를 할 때 꼭 ‘가정을 위한 기도’만 해야 할까? 본당 신부님이나 수녀님을 위해서 반드시 ‘사제를 위한 기도’나 ‘수도자를 위한 기도’만 바쳐야 할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절대로 아닙니다. 하느님께 진심을 다해 바치는 기도라면 비록 침묵일지라도 훌륭한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정형화된 기도가 필요한 이유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 기도의 방향과 형식을 잡아주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이 같은 길잡이 역할을 하는 책이 바로 시편입니다.

 

시편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지향을 가지고 어떤 형식으로 기도했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책이며 시편 자체가 방대한 분량의 기도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백성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는 기도문이 되고, 취할 수 있는 가장 거룩한 행동은 전례와 음악이 되어 시라는 형태로 기록되어 이 책에 담겨 있습니다. 결국 시편은 인간이 모든 것을 다해서 하느님께 말을 걸고 또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모든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한 시편은 현실에서 인간이 처할 수 있는 다양한 상황에서 바치는 다양한 형태의 기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곤경 중에 있을 때 탄원 시를 지어 바치고, 곤경에서 벗어나면 감사 시를 바쳤으며,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탄식하면서 백성 전체의 목소리로(시편 44; 74; 77), 혹은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순례자의 목소리로(시편 42,5; 120―134) 기도하였습니다.

 

또한 시편의 기도는 다양한 상황에 맞는 기도의 양식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개인인지 공동체인지에 따라 개인 시와 공동 시가 나뉘고, 내용에 따라서 인간의 손을 벗어난 일을 하느님께서 돌봐주시기를 청하는 탄원 시, 지향이나 소원을 들어주셨을 때 바치는 감사 시, 마지막으로 전능하신 하느님과 그분의 영광을 소리 높여 외치는 찬양 시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께 바치는 인간의 언어라는 성격에 집중해볼 때, 시편은 단지 한 개인의 지향과 기도를 담는 것뿐 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가 된 지향과 감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공동체가 함께하는 전례 안에서 시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매일의 신앙생활 안에서 어떻게, 무엇을 위해 기도를 해야 할지 모를 때 시편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반드시 첫 장부터 시작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하시면 더 좋고요). 나보다 앞서 하느님을 믿었던 이들의 기도에 내 지향도 함께 실어 보낸다면 시편을 읽는 것 자체가 좋은 기도가 되지 않을까요? [2022년 4월 10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상욱 안드레아 신부(용안성당)]

 

 

- 바빌론 유배와 기도

 

철학자 칸트는 하루를 정확히 시간 배분해서 보낸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가 산책하러 공원에 나오면 사람들은 그를 보고 시계를 맞추었다고 하죠. 평생을 학문과 지혜를 탐구하는 학자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면서 그에 걸맞게 하루하루 규칙적으로 살아가는 인생의 방식을 터득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인생에는 일정한 방식과 그 뿌리가 되는 가치관이 있습니다. 이 방식과 가치관은 어지간해서는 바꾸기 쉽지 않고 대부분 바꾸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기존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린 커다란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바빌론 유배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이스라엘 땅에서 태어나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철저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역시 이스라엘 땅에서 죽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그들에게 바빌론 유배는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이 유배시기에 믿음의 중심이었던 성전이 무너졌고 성스러운 이스라엘 땅을 떠나 알지도 못하는 이교인들의 땅에 가서 터전을 일구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을 보면서 이스라엘은 바꾸어야 했습니다.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우리는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확신에 찬 가치관과 선민으로서 가졌던 우월의식, 이민족들에 대한 멸시 같은 삶의 방식을. 절대로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성전이 무너지면서 그들의 자신감도 무너졌고 낯선 땅으로 강제 이주해 가면서 이제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이민족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치관과 삶의 방식의 변화는 기도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성전을 잃고 유배의 삶을 살아야 하는 고통 속에서, 그들의 기도는 지난날의 불충실함에 대해 용서를 빌면서 하느님께서 이 참상을 기억하시어 다시 회복시켜 주시도록 희망하는 절절한 호소가 됩니다(애가 5장 참조). 에제키엘 예언자는 ‘새 성전에 대한 환상’(에제키엘서 40-48장 참조)으로 이 희망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한 가지 공통된 지향을 모든 백성이 마음을 모아 바쳐야 했으므로 이 시기의 기도는 제관들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적 예배에 적합하도록 그 형식이 다듬어졌습니다. 또한 기도가 끝나면 온 회중이 마음을 모아 ‘아멘’이라는 말로 응답을 하였고 율법을 낭독하기 전에 기도를 드리는 관례가 생겼습니다(느헤 8,6 참조). 자신들이 선택받은 민족으로서의 지위와 품위를 잃어버린 가장 큰 이유가 하느님께 대한 불충실이라고 생각했던 이스라엘은 철저한 공동체 의식과 제물과 제사의 강조(레위 22,17-25 참조), 안식일 준수 등과 같은 종교적 규정을 통해 다시금 충실한 백성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물론 기도가 이러한 종교적 규정 안에서 형식적으로 경직되기는 하였지만, 정해진 틀 안에서 반복적으로 행해진 기도(에즈 7,27-28; 느헤 2,4 등 참조)는 백성들에게 다시 거룩한 자유와 위엄을 가져다주었습니다(레위 22,31-33 참조).

 

이처럼 신앙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에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처지를 깨닫고 그에 걸맞은 기도 방식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렇지만 전에 없었던 새로운 방식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원래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가져야 할 덕목, 한마음으로 하느님께 충실해야 한다는 기본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위기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기본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2022년 5월 8일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8면, 이상욱 안드레아 신부(용안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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