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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순교자들의 선혈이 살아 숨쉬는 성지 새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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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1-09 ㅣ No.615

[한국 교회 사적지 순례] 순교자들의 선혈이 살아 숨쉬는 성지 새남터


새남터는 어떤 곳이었나

새남터는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적인 순교 성지로 잘 알려져 있다. 서울시 용산구 이촌동의 옛 철도 공착장 인근으로, 새남터 성당으로부터 남쪽 150-200m 지점에 있다. 새남터라는 지명은 이 지역이 북쪽 한강변의 노들 나루터 인근에 위치한 낮은 모래 언덕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1) 반면 이 지역에서 오래 전부터 죽은 사람의 혼령을 천도시키기 위한 굿인 ‘지노새귀남’을 했던 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2) 조선시대 관찬 사료에는 새남터가 ‘노량사장’(露梁沙場)3), 혹은 이를 줄여 ‘사장’이라 기록되어 있다. ‘사장’은 모래톱이란 뜻이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옛 지도에는 ‘사남기’(沙南基)로 기록되기도 했다.

새남터는 본래 조선시대 군사들이 훈련을 했던 연무장(演武場)이었다. 예컨대, 숙종 17년(1691) 9월 2일, 숙종은 새남터에서 군영을 사열하고 군사들의 훈련 모습을 지켜보았다. 당시 새남터에는 훈련도감 · 금위영 · 어영청 · 수어청 등의 군영(軍營)들이 모여 함께 훈련하고 진법(陳法)을 연마하였다.4)

또한 새남터는 국사범(國事犯)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형장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서울에서 처형장으로 잘 알려진 곳은 서소문 밖, 새남터, 당고개였다. 새남터는 연무장이자, 군문이 있었던 까닭에 처형장으로 이용되었다. 죄인은 군영으로 압송되어 참수되었고, 그 머리를 높은 곳에 매달아 놓았다. 죄인을 효수할 때면 한양 5부(部)의 관원들은 백성들을 거느리고 미리 가서 대령했다.5) 이처럼 군민(軍民)들을 모았던 이유는 효수된 모습을 보고 경계하라는 의도였다.


순교의 선혈을 흘리다!

새남터에서 처음 순교한 이는 신유박해(辛酉迫害) 순교자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였다. 주 신부는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신문을 받은 뒤 1801년 5월 31일(음 4월 19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주 신부의 머리는 장대에 매달렸고, 그 시신은 닷새 동안 백사장에 버려졌다가 군사들에 의해 몰래 이장됨으로써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이후 새남터에는 성직자와 신자들의 순교가 줄을 이었다.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때는 제2대 조선 교구장 앵베르(L.-J.-M. Imbert, 范世亨) 주교와 모방(P. P. Maubant, 羅伯多祿) 신부 · 샤스탕(J. H. Chastan, 鄭牙各伯) 신부가 9월 21일(음 8월 14일)에 순교하였다. 이어 1846년 병오박해(丙午迫害) 때는 한국인 최초의 성직자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가 9월 16일(음 7월 26일)에, 현석문(玄錫文, 가롤로)이 9월 19일에 순교하였다.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는 제4대 조선 교구장 베르뇌(S. F. Berneux, 張敬一) 주교를 비롯하여 브르트니에르(S.-M.-A.-J. Bretenieres, 白) 신부 · 볼뢰외(B.-L. Beaulieu, 徐沒禮) 신부 · 도리(P. H. Dorie, 金) 신부가 3월 7일(음 1월 21일)에, 프티니콜라(M. A. Petitnicolas, 朴) 신부 · 푸르티에(J. A. C. Pourthie, 申妖案) 신부와 정의배(丁義培, 마르코)와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이 3월 11일에 순교하였다.6)

2008년 한 연구에 따르면, 1801년 12월 26일(음)에 처형된 홍익만(洪翼萬, 안토니오) · 김계완(金啓完, 시몬) · 손경윤(孫敬允, 제르바시오) · 김의호(金義浩) · 송재기(宋再紀) · 최설애(崔雪愛) · 장덕유(張德裕) · 이경도(李景陶, 가롤로) · 변득중(邊得中)의 순교자가 서소문 밖이 아닌 새남터였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1839년 12월에 집행된 신자들의 처형장이 새남터였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12월 27일(음)에는 박종원(朴宗源, 아우구스티노) · 홍병주(洪秉周, 베드로) · 권진이(權珍伊, 아가타) · 이경이(李璟伊, 아가타) · 손소벽(孫消碧, 막달레나) · 이인덕(李仁德, 마리아) · 이성례(李聖禮, 마리아)가, 12월 28일(음)에는 홍영주(洪永周, 바오로) · 이문우(李文祐, 요한) · 최영이(崔榮伊, 바르바라)가 순교하였다. 기존에는 그들이 당고개에서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비변사등록”을 통해 그들의 처형장이 새남터였을 가능성도 있다는 점이 밝혀졌다. 그리고 교회 측 기록인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에도 12월 27일의 순교자가 ‘당고개 혹은 새남터’라고 되어 있다. 요컨대, 1839년 12월에 집행된 신자들의 처형장은 당고개 혹은 새남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7)

이처럼 새남터에서는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그들 가운데 앵베르 주교 · 모방 신부 · 샤스탕 신부 · 김대건 신부 · 현석문은 1925년 7월 5일에 시복되었다. 이어 베르뇌 주교 · 브르트니에르 신부 · 볼리외 신부 · 도리 신부 · 정의배 · 우세영은 1968년 10월 6일에 시복되었다. 이들 11명은 1984년 5월 6일 서울에서 열린 시성식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는 1996년에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어 현재 시복시성 작업이 추진 중에 있다.


새남터와 관련된 이야기들

천주교회에서는 일찍부터 새남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제7대 조선 교구장 블랑(G.-M.-J Blanc, 白圭三) 주교는 주한 프랑스 공사인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 葛林德)에게 선교회가 새남터를 갖게 되면 좋겠다고 여러 번 말했다고 한다.8) 드 플랑시는 블랑 주교의 유지에 따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독판9)인 민종묵(閔種默)에게 1890년 4월 22일자 서한을 보내 새남터를 프랑스인의 묘지로 양도해 줄 것을 요구했다. 1886년 6월 4일에 조인된 조불조약(朝佛條約) 제4관 5절에는 조선 관원이 통상하는 각 지역에 적당한 장소를 넘겨주어 외국인의 묘지로 삼게 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드 플랑시는 이러한 조약문을 근거로 조선 정부에 새남터를 양도해 줄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프랑스 공사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아다. 드 플랑시는 1890년 8월 2일자 서한을 민종묵에게 보내 재차 새남터의 양도를 요구했으나 결국에는 뜻을 이루지 못했던 것 같다.10)

새남터를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새남터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신학교가 세워졌다. 1887년 원주 부엉골에 있었던 신학교가 용산으로 이전된 것이었다. 교수 신부와 신학생들은 새남터를 보면서 순교자를 공경하는 마음을 더욱 굳건히 하였다. 이와 관현해서는 오기선(吳基先, 요셉)의 회고담이 참고가 된다. 그에 따르면, 매주 목요일이면 대 · 소신학생 전원이 동작나루[銅雀津] 부근에 있는 신학교 별장(일명 ‘연벽정’)으로 산보를 갔다고 한다. 신학교에서 별장으로 가는 도중에 새남터를 경유하게 되어 있었다. 그럴 때면 교장인 기낭(P. Guinand, 陳普安) 신부는 신학생들에게 새남터를 거룩한 땅이라고 하면서 다시 박해가 일어난다면 자신도 그곳에서 기꺼이 순교하겠다는 다짐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11)


순교 기념탑의 건립

새남터를 순교 성지로 조성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된 것은 한국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이하 ‘현양회’)에 의해서였다. 현양회는 1946년 9월 16일 김대건 신부의 순교 100주년 경축 행사를 기점으로 정식으로 창립된 단체이다. 현양회는 창립 목적이 순교자 현양 운동이었던 만큼, 박해시대의 유물 수집과 함께 서울의 순교터 확보에 주력하였다. 그 결과 1949년 5월 7일자로 새남터 1,340여 평에 대한 점용(占用) 허가를 정부로부터 얻어냈다.12)

이처럼 새남터를 확보하게 되자, 1950년 그곳에 순교 기념탑의 설립 계획이 추진되었다. 1950년은 성년(聖年)인 동시에, 기해 · 병오 박해 순교 복자 79위의 시복 25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 해 2월 1일 서울에서 열린 주교회의에 참석한 주교들은 이 문제를 논의하였고, 2월 23일에 ‘새남터 순교기념탑 건설에 대하여’라는 연합 교서를 발표하였다. 1950년 봄에 새남터에 기념탑을 건립할 것이고, 전국 각 교구에서 그 비용을 부담할 것이라고 공표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 교구장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를 위원장으로 하는 건설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조사 결과, 새남터에는 기념탑을 세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쓰레기가 쌓여 있었고, 그 밑은 모래여서 기초 공사를 하려면 모래까지 걷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공사가 진행되지 못하는 가운데 그해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계획은 중단되고 말았다.13)

전쟁의 혼란 와중에 다른 이들이 새남터 성지에 대한 사용권을 얻어내는 일이 벌어졌다. 1954년 복자 첨례 때 새남터를 참배했던 서울교구 명수대 본당 청년회원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현양회에 알렸다. 현양회는 서울 가톨릭 총무원(이하 ‘총무원’)14)에 이를 알리면서 새남터 성지에 대한 사용권이 다시 서울 교구로 넘어올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고 요청했다. 총무원의 노력 끝에 1955년 4월 12일자로 새남터 성지에 대한 사용 허가를 다시 얻어낼 수 있었다.15)

천주교회가 바라던 사업인 기념탑 건립은 1956년에 이르러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정식 순교탑이 아닌, 임시 순교탑이었다. 주교회의는 정식 순교탑을 세우기에 앞서 우선 임시 기념탑이라도 세울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956년 7월 8일 김대건 신부 첨례 외부행사에 새남터 임시 기념탑의 제막식과 강복식이 거행되었다. 기념탑은 높이 약 14미터의 목조탑으로 앞뒷면에 ‘가톨릭 순교 성지’(-殉敎 聖趾)라고 적혀 있었다.16)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새남터의 관리를 맡다

임시 기념탑의 강복식이 끝난 뒤 현양회는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이하 ‘성직수도회’)에 새남터 성지의 관리를 맡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성직 수도회는 1953년 10월 30일 방유룡(方有龍, 레오) 신부에 의해 창설된 최초의 한국인 남자 수도회였다. 명칭에서 보이듯이, 성직수도회는 순교자 현양 및 순교정신 계승을 주요 목적으로 하였다. 성직수도회는 현양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1957년 6월 8일(혹 10월 15일) 김창호 등 3명의 수사를 파견하였다. 이것이 성직수도회의 첫 번째 분원이었다. 파견 수사들은 10여 평의 블록조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집을 건립하였다.17)

수사들은 새남터 주위의 판자촌에 있는 아동들을 위해 학교를 세웠다. 당시 새남터 주변에는 피난민들의 집들이 모여 있는 판자촌이 있었다. 판자촌에는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동들이 많았다. 수사들은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1958년에 초등 과정의 공민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정식 학교가 아니라 검정고시에 합격해야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비공인 학교였다. 하지만 학비가 무료였고 점심도 무료로 제공하였으며, 구호물자를 학생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수사들과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녀들, 일반 교사들 그리고 평양교구장 서리이자, 미국가톨릭구제회 한국지부장인 캐롤(G. Carroll, 安) 몬시뇰의 도움으로 학교가 운영될 수 있었다. 이후 공민학교는 1963년 7월 10일에 인가를 받았다. 하지만 1970년 3월 5일에 제12회 졸업생을 끝으로 학교는 폐교되었다. 이촌동이 개발 지구가 되어 빈민들이 봉천동과 신림동 등지로 떠나면서 학생 수가 감소하였기 때문이다.18)

한편 성지 관리를 맡은 수사들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있었다. 우선 해결해야 할 문제는 새남터에 대한 소유권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서울교구가 새남터 성지에 대한 사용권을 얻었다고는 하나 소유권은 서울시에 있었다. 게다가 새남터가 하천 부지여서 해마다 하천 부지 사용 허가를 갱신해야 하는 불편함도 있었다. 따라서 성지 관리를 위해서는 조속히 새남터의 소유권을 확보하는 것이 시급했다.19) 수사들이 공민학교를 운영한 보람이 있어서인지 성직수도회는 서울시로부터 연고권을 인정받아 1968년 3월 8일(혹 3월 4일)에 1,102평을 불하받았다. 그해 3월 20일부로 설립된 재단법인 천주교 한국천주교복자수도회 유지재단의 명의로 새남터 성지를 샀고, 1971년 12월 31일자로 등기를 마쳤다.20)

새남터 성지의 소유권은 확보했지만, 재원의 부족 등으로 성지를 가꾸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성직수도회는 당분간 유치원을 경영하면서 성지를 관리하기로 결정하였다. 1972년 3월 11일 새남터 유치원을 설립했고, 그 경영을 한국순교복자수녀회(이하 ‘복자수녀회’)에 맡겼다. 복자수녀회는 1946년 4월 21일 방유룡 신부에 의해 창설된 수녀회였다. 복자수녀회는 유치원 초대 원장으로 박복순(막달레나) 수녀를 임명하고, 1972년 3월 15일 새남터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그리고 유치원 건물 옆에 수녀회 분원도 설치하였다.21)


새남터 본당의 설립

복자수녀회는 1973년부터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이 되는 1984년까지 새남터를 개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높이 30미터의 순교자 기념탑을 세우고, 경당, 순교자 기념관, 도서실, 회의실, 교회사 연구실 등을 갖춘 현대식 2층 건물을 건립한다는 것이었다. 복자수녀회는 복자 축일인 9월 26일부터 30일까지 양화진 성당에서 공사비 모금을 위한 제1회 바자회를 개최하는 등 재원 마련에 힘썼다.22) 그러나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이러한 계획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성직수도회는 오랜 숙원이었던 새남터 성당을 건립하고자 했다. 1979년 8월 16일 새남터 성당 건설을 위한 종신서원자 회의를 개최하고 기념 성당과 기념관 건설을 추진하였다. 성직수도회는 도시 개발로 농장 운영이 불가능해진 인천교구 만수동 분원의 전답 일부를 팔아서 일차 경비를 마련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만수동 분원이 위치한 지역이 시 구획 정리 지구로 지정됨에 따라 당장 파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또한 구획 정리가 완성된 후에 파는 것이 좋다는 판단에서 새남터 성당의 건립 시기를 좀 더 미루기로 하였다.23)

이러한 가운데 서울대교구는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인 1981년 9월 3일(혹 8월 21일)에 한강 본당과 삼각지 본당에서 분리해 새남터 본당을 설립하였다. 본당 설립 당시의 신자 수는 75세대 300여 명이었고, 관할 구역은 서부 이촌동 전 지역, 한강로 3가, 원효로 4가 일부 지역이었다. 본당 설립 이전부터 새남터 성지를 관리해 오던 성직수도회가 본당의 사목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초대 주임 신부로 성직수도회의 방학길(方學吉, 마르첼리노) 신부가 임명되었다. 본당이 설립되자, 복자수녀회의 분원은 철수하였고, 새남터 유치원은 1982년 12월 31일자로 문을 닫게 되었다.24)

본당 설립 직후, 방 신부는 유치원에서 임시로 미사를 봉헌하였고, 옛 수녀원을 사제관으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새남터 본당은 성당 건립을 추진하여 1983년 9월 4일(혹 9월 6일)에 기공식을 개최하였다. 그리고 착공한 지 4년 만에 완공하여 1987년 9월 12일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새남터 성당은 종래의 서양식 첨탑형 성당이 아닌, 8각형 지붕에 기와를 얹은 전통적 한옥의 형태로 지어졌다. 한국적인 영성을 추구하는 성직수도회의 정신과 특징을 반영하여 성당 곳곳에 순교 성인의 얼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25)

새남터 본당은 새남터 순교 성인들의 순교정신을 본받기 위해 성인들의 성해를 모시기로 결정하였다. 1996년 4월 4일에 김대건 신부 등 9명의 성인 유해를 본당에 봉안했다. 이어 7월 14일에는 성당 1층에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을 맞아 본당 내에 성해 참배실을 마련하였다. 2000년 6월 25일에는 소성당 축복식과 함께 성인 유해를 소성당 제대로 옮기면서 성해 참배실의 운영을 중단했다.26) 그리고 2006년 9월 3일에는 가톨릭 순교 역사 체험 기념관인 ‘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 기념관’의 축복식을 거행하였다.27) 순교자들의 선혈이 살아 숨쉬는 성지 새남터에는 해마다 많은 순례객들이 성당과 기념관을 방문하여 가톨릭 신앙 선조들의 삶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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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차기진, <새남터>, “한국가톨릭대사전” 7, 한국교회사연구소, 4241쪽.
2) “서울지명사전”, 서울시사편찬위원회, 2009, 431-432쪽.
3) 노량을 ‘鷺梁’이라 쓰기도 했다.
4) “숙종실록” 숙종 17년(1691) 9월 2일.
5) “여지도서”(與地圖書), <경조보유>(京兆補遺), 호방(戶房).
6) “한국천주교회사” 3, 한국교회사연구소, 2010, 30-31쪽과 136-137쪽 및 259-261쪽.
7) 방상근, <서소문 밖 · 당고개인가, 새남터인가? - 1801년 · 1839년, 서울의 마지막 신자 처형지>, “교회와 역사” 400호(2008. 9), 한국교회사연구소, 45-49쪽.
8) <드 플랑시가 코스트 신부에게 보낸 1890년 4월 2일자 서한>(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9)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1882년 12월 4일 외교 통상 사무를 관장할 목적으로 설치된 중앙 관청이었다. 아문의 장관직명이 독판이었다.
10) “구한국 외교문서” 제19권(법안 1),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1969, 112-113쪽 및 125-126쪽.
11) 오기선, “다시 태어나도 사제의 길을”, 성 황석두 루가 서원, 1986, 35쪽.
12) 차기진, <한국 순교자 현양위원회>, “한국가톨릭대사전” 12, 9465쪽.
13)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50년사”,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2003, 124-126쪽.
14) 서울 가톨릭 총무원은 1954년 7월 22일 교구의 대외적인 사무 및 평신도 사도직 운동의 지도 등을 목적으로 설치된 평신도 사도직 단체였다(<서울에 가톨릭 총무원>, “경향잡지” 1038호, 1954. 9).
15)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50년사”, 127-128쪽.
16) <새남터에 임시 순교탑>, “경향잡지” 1061호(1956. 8).
17)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50년사”, 128-129쪽.
18)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50년사”, 129-131쪽.
19) <새남터 성지를 돌보자>, “경향잡지” 1146호(1963. 9).
20)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50년사”, 131-132쪽.
21) “새남터 성당 25년사”, 천주교 서울대교구 새남터교회, 2006, 84-85쪽.
22) <새남터 개발 계획 마련>, “경향잡지” 1267호(1973. 10); <새남터 순교성지 개발 사업에 아낌없는 성원을 부탁합니다>, “경향잡지” 1268호(1973.11).
23)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50년사”, 177-178쪽. 만수동 분원은 1961년 5월 25일 인천시 만수동에 설립되었다. 만수동 분원은 수도회의 안정적 수익을 위해 농장을 운영했다(앞의 책, 141-149쪽).
24) “새남터 성당 25년사”, 85-86쪽.
25) “새남터 성당 25년사”, 113쪽 및 128-129쪽.
26)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50년사”, 339쪽; “새남터 성당 25년사”, 153-155쪽.
27) ‘새남터 본당, 새남터 기념관 축복’, <가톨릭 신문> 2006년 9월 10일자.

[교회와 역사, 2012년 1월호,
양인성(대건 안드레아,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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