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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전례ㅣ미사

[전례] 주일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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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8-22 ㅣ No.1017

[경향 돋보기] 거룩한 주일과 참된 쉼


주일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

 

 

하느님을 섬기고 예배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필자는 예전에 모 교구의 성서사도직 봉사자들을 따라 그리스, 터키 성지순례를 다녀온 적이 있다. 참가자들이 지도신부님, 수녀님과 함께 오랫동안 성실히 준비하였고, 매순간 기도하면서 바오로 사도의 발자취를 따라 다녀온 뜻깊은 여정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서로를 배려하는 아름다운 마음씨를 보여준 형제자매님들과 친절하게 안내하는 자매님 덕분에 잊지 못할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 여정을 잊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스탄불에 있는 성소피아대성당(지금은 박물관)의 건너편 ‘블루 모스크’라고 불리는 이슬람 성원을 방문했을 때의 기억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 순례단은 관례에 따라 신발을 벗고 들어가 허용된 구역에 앉아 파란 빛이 도는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내부를 구경(?)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자유로이 들어와 기도하고 있었다. 정장을 입은 말쑥한 신사와 허리가 굽은 백발 노인, 그리고 청바지를 입은 20대 초반의 청년이 스스럼없이 들어와 기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당시 내부의 중앙 부분에 어떤 사람이 앉아서 약간 높은 톤으로 마이크를 이용하여 쿠란을 낭송하는데 그 주위에 몇 사람이 흩어져 앉아 그것을 듣고 있었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필자에게는 마치 그것이 신명기 6장에 나오는 ‘이스라엘아, 들어라!’라는 말씀같이 느껴졌다.

 

그런데 낭송을 듣는 여러 사람들 중에서도 쿠란 낭송자 앞에 가장 가까이 앉은 사람의 모습이 유독 눈에 띄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얼굴을 잘 볼 수는 없었지만 그는 무릎을 꿇고 가지런히 두 손을 무릎에 올린 상태에서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었다.

 

필자는 그때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겸손하고 진실한 모습이 저런 것이 아닐까?’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다는 것은 저런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저것이 그 오랜 역사를 이어온 이슬람의 내적인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모습은 정말로 온몸과 마음을 다해서 자기의 전 존재로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순종하는 모습이었다. 필자는 그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흘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며 한없이 부끄러움을 느꼈다.

 

‘하느님을 경배한다는 것, 그분을 흠숭하고 그분을 섬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한마디 말도 없이, 그러나 정말로 분명하게 깨닫게 해주는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사실 그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그분 앞에 꿇어앉아 있었다. 말하자면 침묵 중에 그분 앞에 그냥 온전히 현존하였던 것이다.’

 

어렵게 말할 필요 없이 요점을 말하자면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섬긴다는 것, 곧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복잡하고 바쁜 이 세상에서, 하느님 아닌 수많은 것들이 하느님인 양 행세하며 우리의 혼을 빼놓는 오늘날, 네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끊임없이 우리에게 물고 늘어지는 이 시대에 ‘주일을 거룩히 지킨다.’는 것의 의미 또한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주일이 어떤 날이기에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진실한 예배자들을 찾으신다.’(요한 4,23-24)고 하셨다. 이렇듯 하느님을 온몸과 마음을 다해 영과 진리 안에서 ‘온전히’ 예배한 분은 예수님이시며(필리 2,6-1),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예수님을 본받아 ‘마음과 목숨, 정신과 힘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고자’(마르 12,30-31) 하는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 되시는 예수님은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요한 3,16)의 뜻을 따라 세상에 오시어 ‘아버지의 구원경륜을 이루시고자 자신을 죽음에 넘기셨고 부활하시어 생명을 새롭게 하신’(미사 성찬전례 감사기도 4양식) 분이시다.

 

이러한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 곧 그분의 전 생애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일이며 신비 그 자체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516-518, 606-608항). 특히 예수님의 지상생활에서 정점은 ‘부활’이며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역사의 알파요 오메가’이시다(“주님의 날”, 74항).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적으로 보자면 각자의 일생을 통하여, 또한 하느님 백성 전체로서 말하자면 주님의 재림까지 우리 구원의 이 신비를 기념하고 감사하며 이 신비에 따라 살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에게 해도 좋고 안 해도 그만인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를 기념하고 선포하는 것은 ‘우리가 왜 사는지’, 또 ‘우리가 왜 세상 안에서 그분의 백성으로서 존재하는지’에 대한 대답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듯 놀라운 신비를 끊임없이 기념하지만 특히 ‘주일’에 가장 분명하게 선포하고 기념한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주일은 ‘주님의 날’ 곧 우리를 위해 나시고 돌아가신 그분께서 부활하신 날이며(마르 16,2. 9), 부활하신 주님께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과 절망과 두려움으로 숨어있던 열한 사도에게 나타나신 날이기도 하다(루카 24,13-35; 요한 20,19-23).

 

초세기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을 천지창조 때 빛이 창조된 첫날(창세 1,3-5)과 자연스럽게 연관시켜 이해하였는데, 그것은 예수님이야말로 참된 빛(요한 8,12)이시며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것을 새롭게 창조한 ‘새 창조’(콜로 1,15-20)요 우리는 구분으로 말미암아 ‘새 피조물’(갈라 6,15)이 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로 그분과 함께 묻혔고 (부활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기 때문에(로마 6,3-5)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주일은 온 우주가 예수님을 통해 새로이 창조되었음을 기념하고 선포하는 장엄한 날인 것이다.

 

또한 예수님을 통하여 새 피조물이 된 이들에게 그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열매요 꽃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성령께서 강림하시고 예수가 메시아임이 선포되어 최초로 3천 명가량이 세례를 받은 날도 주일(사도 2,1-41)이라는 것을 되새겨본다면, 주일은 부활하시어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그분과 우리가 다시 만나고 그분의 성령이 강림하심을 다시 체험하는 날, 달리 말하자면 ‘매주 맞이하는 부활절과 성령강림일’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주님의 날”, 28항).

 

 

그리스도인들은 주일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

 

이런 뜻깊은 이유 때문에 자신들이 하느님의 새 백성임을 깨달은 그리스도인들은 초세기부터 온갖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안식일 다음 첫째 날, 곧 주간 첫날’인 주일에 모였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고 현존케 하는 성찬례(미사)를 거행하기 위해서, 곧 ‘빵을 떼어 나누기 위해서’(사도 20,7)였다. 이 놀라운 모습은 초세기 교회문헌들에서도 잘 드러나며(“디다케”, 14,1; “사도전승”, 22장)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어떤 강제적 규정이라기보다 우선 ‘내적 필요성에서 생겨난 양심의 의무’(“주님의 날”, 47, 81항)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주일을 그 의미에 맞게 경축하는 가장 분명한 방법은 교회가 초세기부터 꾸준히 그렇게 해온 것처럼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성찬례를 거행하는 것’이다. 이는 원칙적으로 주일 당일이나 그 전날 저녁 가톨릭 예식으로 거행되는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다(교회법 제1246-1248조). 이 성찬례에서 육화와 십자가의 희생 그리고 빵과 포도주의 형상을 통한 하느님의 자기 비움과 세상과 인간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심이 완전하게 드러난다.

 

또한 예수께서는 당신 백성의 삶, 찬미, 고통, 기도 등 ‘그들의 것을 당신의 희생제사에 합쳐’ 아버지께 봉헌하심으로써 성찬례에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하강과 상승이라고 비유할 수 있는 ‘놀라운 교환과 만남’이 일어난다. 주일 성찬례가 이런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아프리카 아비티나의 순교자들은 자기들이 “주님의 만찬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하였고 그 이유가 자기들이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이라고 고백하였던 것이다(“주님의 날”, 46항).

 

 

일상생활로 흘러 들어가는 주일의 신비

 

주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의무는 단지 성찬례 참여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성찬례 참여에서 기념한 우리 구원의 신비가 우리의 가정과 학교, 일터로, 곧 우리의 일상생활로 흘러 들어가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한 방법의 하나로 주일에 어린이와 청소년, 어른을 위한 신앙교육과 친교 프로그램, 순례와 애덕 실천 등을 계획하고 시행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사랑의 성사”, 73항).

 

또한 애초부터 가난한 이들과 나눔을 실천하는 날이기도 했던 주일(1코린 16,2에 그리스도인들은 성찬례를 거행하면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신 예수님을 본받아 ‘애덕과 신심과 사도직 활동’에 투신하도록 부르심을 받는다(“주님의 날”, 69-72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성찬례에서 기념하는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가 끊임없이 새롭게 경축되도록 만들어진 ‘전례주년’(그리스도 신비의 연례 주기)은 ‘한 해를 주기로 하여 강생부터 승천, 성령강림날까지, 또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까지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모든 신비를 펼쳐 음미하고 감사하며 되새겨 신자들이 구원의 은총으로 충만해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전례헌장, 102항), 주일은 그 중심이요 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휴식과 자유 없이 살 수 없다

 

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 주일은 궁극적으로 “지상에서 그 자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바라신 유일한 피조물”(사목헌장, 24항)인 인간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휴식과 자유는 인간에게 본성적으로 필요한 것이며, 주일은 그것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서 안식일은 하느님의 창조 업적(창세 2,1-3; 탈출 20,8-11)과 이집트 탈출이라는 구원 업적(신명 5,12-15)을 연결시키고 인간과 모든 피조물에게 휴식과 자유를 보장한다. 이런 창조와 구원 업적, 휴식과 자유가 예수님을 통해서 비로소 온전히 이루어졌기에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분의 날[주일]은 안식일의 의미를 완성하고 충만케 하는 것(“주님의 날”, 50-60항)이다.

 

주일에 인간은 노동을 쉬고 하느님 친히 원하신 대로(창세 2,2-3) 하느님 안에서 거룩한 휴식을 취하고 이를 방해하는 일과 영업 등을 삼가야 한다(교회법 제1247조). 이로써 인간은 자신과 다른 피조물들이 오직 하느님께 속해있음을 고백하고 자기 자신과 피조물의 존재 의미와 존엄성을 재확인하며 타인과 형제적 친교와 연대를 도모한다. 이는 단순히 노동력 향상을 위한 재충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오실 그분과 새 하늘 새 땅을 기다리는 희망과 신앙을 고백하는 예언자적 행위’(“주님의 날”, 68항)이기도 하다.

 

 

행복하여라, 그분을 주님으로 섬기는 이들!

 

그러나 안타깝게도 창조주의 위대한 업적을 기념하는 날이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날이며, 기쁨, 휴식, 형제애를 실천하는 하느님 백성의 날이기도 한 주일(“사랑의 성사”, 73항)의 이런 영성적, 사목적 의미를 흐리고 혼란하게 하는 일시적이고 이기적인 쾌락 그리고 신앙과 윤리에 어긋나는 피상적이고 자기파괴적인 오락과 문화의 유혹이 오늘날 우리 주위에 상존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시류에 맞서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함께 고민해야 할 일이다.

 

시골 본당신부 시절 필자는 어느 주일에 교중미사를 마치고 급한 용무로 나가던 중 신호등 앞에서 잠시 기다리게 되었는데 마침 신호등 옆에 있던 큰 개신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마치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때 교회의 문 앞에서 몇몇 청년들이 힘차게 기타를 치며 흥겹게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었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던 사람들도 화답하며 기쁜 얼굴로 서로 손벽을 치기도 하고 함께 찬송가를 부르기도 하였다.

 

참으로 복된 소식[福音]을 듣고 그것을 배부르게 먹어 힘과 용기가 충만하게 된 사람들, 그래서 하느님의 추곡을 가득 안고 세상과 사람들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는 성도(聖都)들의 모습이었다. 부럽기도 하고 시샘도 났던 기억이 생생하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기쁘게 했을까? 유명 목사님의 멋진 설교였을까? 문 앞의 청년들이 부른 우렁찬 찬송가 때문이었을까? 아마 그럴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보다는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게 무엇일까? 우리도 그렇게 될 수는 없는 걸까? 주일을 거룩히 지키려면, 아니 하느님만을 참으로 섬기고 경배하며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판에 박은 대답 몇 가지들을 정답처럼 단언하고 싶지 않다. 다만 그 이유를 우리 모두가 함께 찾아보자고 말하고 싶다. 진리는 의외로 가장 단순하고 가까운 곳에 있다는 말이 떠오르는 것은 웬일일까?

 

* 김훈 안토니오 - 청주교구 신부. 1996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교의신학을 가르치며 신학생들과 살고 있다.

 

[경향잡지, 2011년 7월호, 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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