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토)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사목신학ㅣ사회사목

[가정사목]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진정한 사랑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5-17 ㅣ No.1331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진정한 사랑

 

 

예의 있는 사랑

 

사랑은 관계에서 발생하는 태도라고 지난번에 말씀드렸습니다. 사랑의 관계는 흔히 ‘격의 없고 친밀한’ 관계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격의 없고 친밀한 관계가 예의 없는 관계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사랑의 관계일수록 예의가 더 필요합니다. 물론 여기서 ‘예의’는 딱딱한 형식의 태도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관계에서 예의는 이해와 배려의 태도, 때때로 인격적 거리를 둘 줄 아는 태도를 뜻합니다.

 

사랑은 삶을 공유하는 일이며, 삶 속에서 상대방과 하나가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타자의 삶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하지만 “다른 이의 삶에 들어가는 것은, 그 사람이 우리 삶의 일부가 되었다 할지라도, 신뢰와 존중을 더욱 다지는 감수성과 예의바른 태도가 필요합니다. 실제로, 사랑이 내밀하고 깊어질수록 상대방의 자유를 더욱 존중해주고, 상대방이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 때까지 더 기다려 줄 수 있어야 합니다.”(‘사랑의 기쁨’ 99항)

 

사랑은 집착과 간섭과 개입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독립적 인격으로 대하는 일입니다. “사랑은 불손하게 행동하거나 무례한 태도를 보이거나 엄격하게 대하지 않습니다.”(99항) 진정한 사랑은 공손과 존중과 인내와 예의 속에서 성장합니다.

 

 

친절한 사랑

 

사랑은 상대방을 향한 시선과 상대방에게 건네는 말을 통해 드러납니다. 사랑은 따뜻한 시선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사랑은 서로에게 용기와 힘을 주는 말들을 나누는 일입니다. 관계의 성숙을 위해서는 상대방을 향한 사랑의 시선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열등감을 감추려고 다른 이의 단점과 실수를 서슴없이 지적하는 부정적인 태도를 지닌다면”(100항) 사랑의 관계를 형성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상대방을 정확하게 사랑하기 위해서 상대방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상대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향한 따뜻하고 섬세한 눈길이 먼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상대방을 함부로 판단하고 재단하는 일이 사랑을 방해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비판한다”라는 말은 대부분 거짓일 경우가 많습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비평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 연습”이며 “섬세한 읽기”라고 말합니다.(‘정확한 사랑의 실험’) 좋은 비평이 섬세하고 애정 어린 읽기인 것처럼, 좋은 사랑 역시 상대방을 따뜻하고 섬세한 시선으로 읽어주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말을 나눕니다. 사랑은 서로에게 건네지는 사랑의 말을 통해 자랍니다. 따뜻한 사랑의 말은 사랑 그 자체를 성숙시키고 깊게 합니다. 사랑의 말은 대부분 격려와 긍정의 따뜻함을 담고 있습니다. 사랑의 말은 “위로와 위안이 되며 힘과 기운을 북돋아 줍니다.”(100항)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모든 신앙인과 신앙인 가정은 “사랑이 담긴 예수님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백성들에게 하신 사랑의 말씀들의 예를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마태 9,2)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마태 15,28) “일어나라!”(마르 5,41) “평안히 가거라.”(루카 7,50)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사랑의 말은 이처럼 용기와 위로와 희망을 주는 말입니다.

 

사랑은 예수님의 시선과 태도로 상대방을 대하는 일입니다. 사랑의 말은 예수님의 언어를 닮아있을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의 진정한 사랑은 우리의 시선과 말이 예수님의 시선과 말을 닮도록 노력하는 과정에서 형성된다는 의미입니다.

 

 

헌신하는 사랑

 

“다른 이를 사랑하려면 우리가 먼저 우리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101항)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타자를 사랑하는 것이 서로 모순되거나 양립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자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타자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은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거나 자기의 욕망만을 추구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의 부족함과 못남마저도 인정하고 긍정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신에게 인색한 사람은 타자에게도 인색합니다. 자신에게 넉넉한 사람이 타자에게도 넉넉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건강하게 배려할 줄 아는 사람만이 타자도 건강하게 배려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이에 대한 헌신보다 자기 사랑이 더 고귀한 것인 듯이 이를 앞세워서는 안 됩니다.”(101항) 자신에 대한 긍정과 타자에 대한 헌신은 늘 함께 갑니다. 자기 사랑과 타자 사랑이 분리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둘이 분리될 때, 그 사랑은 이기적 사랑이 되거나 오만한 사랑이 됩니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고 흔히 말합니다. 사실, 사랑의 아름다움은 받을 때보다 줄 때 잘 드러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을 빌려 이에 대해 강조합니다. “사랑받으려는 것보다 사랑하려는 것이 사랑에 더 맞갖는 것”이라고 말입니다.(102항) 그런 의미에서 참사랑은 어머니의 사랑을 닮아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언제나 사랑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참사랑은 무엇보다 예수님을 닮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무상으로 베푸는 것으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루카 6,35 참조) 다른 이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요한 15,13 참조) 최고의 사랑”(102항)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행위는 사랑의 정점입니다. 사랑은 예수님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인내하는 사랑

 

사랑은 인내를 요청합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약점과 잘못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엄격하게 반응하지 않는 인내”(103항)를 필요로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감정은 즉각적이고 즉흥적일 때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때때로 오해와 대화 단절과 관계의 어긋남에서 오는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관계의 비틀림이 지속되면 사소한 자극에도 분노가 치미는 내적 반응과 폭력적 반응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분노와 폭력은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합니다. “분노는 우리가 심각한 불의에 맞서도록 할 때에는 유익하지만 다른 이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스며들어 있다면 해롭습니다.”(103항) 정의와 분노는 연결될 수 있지만, 사랑과 분노는 연결될 수 없습니다.

 

감정은 자연스럽게 발생합니다. 감정의 발생을 이성과 의지로 막을 수는 없습니다. 분노의 감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분노의 감정이 발생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는 없지만 그 감정이 우리의 태도와 행동에 배어들게 하는 것은 절제하고 억제할 수 있습니다. 수양과 수련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갑작스럽게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감지하는 것과 그 화에 굴복하여 그것이 우리의 태도에 스며들도록 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104항) 사랑은 인내의 수련을 요청합니다. 분노라는 폭력적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관계의 평화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인내의 힘을 키울 수 있는 수덕적 훈련이 필요합니다. 사랑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5월호, 정희완 사도요한 신부(안동교구)]



136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