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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교회사 속 여성 - 여명(정조 말 - 순조 즉위): 여성 공동체와 남성 연대, 죽음까지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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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3-19 ㅣ No.1011

[한국 교회사 속 여성 - 여명(정조 말 - 순조 즉위)] 여성 공동체와 남성 연대, 죽음까지 동행

 

 

주문모 신부와 교회 초석을 받치고

 

여성 공동체는 삯바느질과 침모, 유모, 김치 장사 등을 하며 신부를 모셨다. 신자들도 필요한 물품을 공동체로 들고 왔다. 주문모 신부는 조선말과 풍속을 알게 되자 이내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했다. 신자들이 주 신부의 말을 알아듣기 어려워할 때는 강완숙이 통역했다. 주 신부는 사목을 나가고 지방으로 방문도 떠났다. 주 신부가 외출할 때는 강완숙만이 그 행선지를 알고 있었다.

 

이때는 이미 신부의 존재가 조선 조정에 알려진 때로, 끊임없이 사찰하여 체포가 날마다 잇따랐다. 주 신부에게 길을 안내했던 윤유일 등은 물론 청양의 김풍헌과 이도기 등 순교자들이 해마다 줄을 잇고, 이승훈과 정약용 등이 교회를 떠나 침묵하고 있을 때였다.

 

주문모 신부는 금식과 극기를 하며 자기 직분에 혼신을 다했다. 일에 매달려, 먹거나 자는 시간도 겨우 낼 정도였다. 밤에는 성직을 행하고 낮에는 책을 번역하며, 「사순절과 부활절을 위한 안내서」 등을 저술하기도 했다. 주 신부는 교회의 조직화를 위해서도 노력했다. 그는 1797년 명도회를 설립하고 정약종을 회장에 임명했다. 그리고 신자들의 회합 장소나 집회 주관자 등을 결정하고 북경 교회와도 연락을 이어갔다.

 

교회는 점차 성장하여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기 직전에는 4천 명이었던 신자 수가 1801년에는 1만 명으로 증가했다. 한국 교회는 서서히 기틀이 잡혔다. 주 신부가 한 일과 초기 신자들이 이룬 일 가운데 여성 공동체의 공으로 돌릴 수 있는 일은 몇 퍼센트가 될까?

 

 

열린 공동체, 얼굴 없는 이들의 친구

 

조직이 든든하면 폐쇄적이기 쉬운 법이다. 그런데 박해 시대 천주교 공동체는 오히려 정반대의 특색을 띠었다. 전국이 하나의 튼실하고도 개방적인 공동체였다. 정약종이 한글로 쓴 「주교요지」는 바로 자신들 외의 얼굴 모르는 다른 계층을 고려한 작업이었다. 여성 공동체는 주 신부뿐 아니라 교회의 남성들도 적극 도와 함께 일했다.

 

강완숙의 인맥은 남성 교우들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에게 천주교를 전한 홍낙민은 시가 친척이다. 강완숙의 남편 홍지영은 지체 있는 양반가 서손이었다. 홍지영은 홍낙민의 서팔촌손(庶八寸孫)이었다.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한 홍낙민은 이승훈, 정약용과 함께 활동하며 신유박해 때 순교했다.

 

그는 교회 창설 이전 스스로 천주교 신앙을 실천했던 홍유한의 7촌 조카였다. 그의 가문에서는 셋째 아들 홍재영을 비롯해 여러 명의 순교자가 배출되었다.

 

초기 천주교 신자들은 혼인 관계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다. 홍낙민의 아들 홍재영은 이벽의 누이와 정약현(정약종의 큰형) 사이에서 낳은 딸과 혼인했다. 정약현의 다른 딸은 황사영의 부인이고, 정약현의 여동생은 이승훈의 부인이다. 정약종의 조카사위인 홍재영은 황사영과 동서지간이었다. 한편, 박종악 관찰사의 보고에 따르면 홍지영은 정조의 모친 혜경궁 홍씨와 인척이다.

 

또한 강완숙에게는 아들 홍필주의 혼인을 통한 사돈쪽 인맥도 있었다. 홍필주는 당대 영의정인 채제공의 서손을 교육시켰던 홍익만의 사위였다. 그는 정약종, 이승훈, 황사영 등에게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했다. 그의 집은 초기 천주교의 신앙 단체였던 명도회의 집회 장소 가운데 한 곳이었다. 그는 1802년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홍익만의 또 다른 사위는 이현이었는데, 이현의 숙부는 성화를 그렸던 이희영이다. 홍익만은 홍교만과 사촌지간이었는데, 홍교만의 아들 홍인은 황사영과 친구였다.

 

물론, 강완숙의 활동에는 이 같은 친인척 인맥보다는 그들 사이의 상호 존중이 밑바탕이 되었다. 강완숙이 교회의 일을 해 나가는 데에는, 신부에게 절대적으로 공경하는 마음과 강완숙에게 지닌 주문모 신부의 깊은 신뢰가 큰 동력이었다. 강완숙은 늘 “신부님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걸고 오셨는데, 우리는 신부님을 위해 해 드린 일이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그 마음으로 신부의 의도와 역할을 정확히 이해한 강완숙은 목숨을 걸고 교회 일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관계는 교회를 대표하던 인물들 사이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깊은 존경과 사랑으로 조선 사회에서 남녀 ‘교우’ 또는 ‘교형’이라는 낯선 길을 터득했다. 조선 땅에 유일한 신부가 과붓집에서 6년 동안 살아 낸 것은 당시 신자들이 절제 위에 세운 고고한 ‘협동 작품’이었다.

 

 

무너진 교회는 각지로 터 찾아 나서고

 

순조가 즉위하고 신유박해(1801년)가 일어났다. 함께 생활한 신자들은 죽음까지 함께했다. 사람들이 같은 날 죽는다면 대부분 사고다. 그렇지만 천주교 신자들은 같은 시간, 같은 장소, 또는 같은 해에 같은 지향으로 주님께 돌아갔다. 그리고 당대 공동체는 와해되었다.

 

강완숙은 살아서 충실했던 만큼 죽음에 대해서도 한결같았다. 관리들은 주 신부의 은신처를 알아내려고 여러 차례 그의 주리를 틀었다. 그러나 혹형을 가하던 관리들조차 강완숙은 여자가 아니라 귀신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더욱이 강완숙은 옥중 관리들 앞에서조차 천주교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쉬지 않고 주장했다.

 

그의 해박한 지식에 관리들도 “유식한 여인네, 비길 데 없는 여인.”이라며 혀를 찼다. 그 때문에 관리들은 자신들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잔인한 형벌을 강완숙에게 가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초자연적인 인내를 마주하고 말았다. 강완숙은 약해지려는 아들 홍필주를 격려해 끝까지 동행하게도 했다. 이 같은 굳셈은 함께하는 이들에게서 퍼 올려진 ‘선물’이었으리라.

 

1801년 7월 3일, 강완숙과 동료 네 명은 서소문 형장으로 끌려갔다. 그들은 서로 격려하며 하느님께 찬미를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기뻐했다. 형장에 이르러 강완숙은 사형을 주재하는 관리에게 사형 죄수들은 상의를 벗기지만 자신들은 옷을 입은 채로 죽겠다고 청하여 허락받았다. 강완숙은 십자 성호를 그은 뒤 맨 먼저 머리를 형리에게 내밀었다. 그의 나이 마흔하나였다.

 

이어 강경복, 문영인, 김연이, 한신애가 차례로 주님께 목숨을 바쳤다. 그들의 강렬한 사랑과 열린 마음은 민들레 홀씨처럼 퍼져 나갔다. 몸이 없어졌기 때문에 그 씨앗은 몸에 갇히지 않고 훨훨 날아갔다. 그래서 우리도 ‘이 무리’에 들게 되었다.

 

강완숙은 옥에서 주문모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고 자기 옷자락에 선교사의 사도적 업적을 썼다. 그러나 이 옷 조각을 맡았던 이는, 이후 30년이나 와해되어 버린 교회 상황에서 이를 제대로 보존하지 못했다. 우리가 ‘이 무리’에 완전히 합류할 때 강완숙의 그 신실한 메시지도 들릴 것이다.

 

*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 영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이며 대구 문화재 위원과 경북여성개발정책연구원 인사위원을 맡고 있다. 수원교구 시복시성위원회 위원이며 안동교회사연구소 객임 연구원이다. 한국가톨릭아카데미 겸임 교수를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9년 3월호,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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