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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차별의 기미라도 보여서는 안 된다(성 소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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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04 ㅣ No.1376

[새로봄] 차별의 기미라도 보여서는 안 된다

 

 

‘소수(少數)’는 언제나 어느 곳에서 나 있게 마련이다. 사람의 경우도 그렇다. 개인의 생각이나 외양, 사회의 전통과 문화가 천차만별이지만, 그 가운데 ‘수량(數量)’에서 ‘무리’를 이루어 ‘다(多)수의 무리’와 ‘소(少)수의 무리’가 형성되는 경우가 있다. 문제는 ‘다수’와 ‘소수’의 관계다.

 

상호호혜의 관계를 맺고 공존·발전할 수도 있지만, 투쟁과 배타, 지배와 종속의 관계로 악화될 수도 있다.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될 변함없는 진실이 있다. 다수와 소수가 결코 ‘질(質)’의 개념이 아닌 ‘양(量)’의 개념이라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 양의 개념과 질의 개념이 뒤섞이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부정적인 예라 할 수 있겠지만, ‘다수’는 옳거나 정상이고 ‘소수’는 옳지 않거나 일탈이라는 태도와 이를 근거로 자행되는 터무니없는 배제와 단죄 행위 말이다.

 

예를 들어, 한 가족이 있다고 하자. 그 울타리 안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와 아버지, 형과 동생, 친인척이 있다. 여름 별미로 시원한 ‘콩국수’를 마련했다. 그런데 달리 특별한 이유도 없는데 누이는 원래 콩국수만 먹으면 탈이 나서 화장실을 드나든다. 그 누이가 소수인 한 명이라고 해서, 다수인 다른 식구들이 ‘그래도 콩국수를 먹어야 해, 너 말고 다 먹잖아! 너만을 위해 콩국수 말고 다른 별미를 준비해 줄 수는 없어!’ 한다면 그 가족은 어떤 가족일까?

 

시민 다수는 ‘남성(男性)’과 ‘여성(女性)’의 양성(兩性)만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남‘성’을 갖는 ‘남자 사람’과 여‘성’을 갖는 ‘여자 사람’이 따로 있다고 보며, 남녀가 사랑하고 관계를 맺는 것이 ‘자연’이라고 생각한다. ‘성 다수자’라 할 수 있겠다. 다수의 이 인식과 태도는 개인의 행동으로든 사회의 제도로든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사람과 관련하여 ‘외양’ 혹은 ‘생물학’의 관점에서는 남성 혹은 여성의 사람들만 존재한다. 그런데 분명 겉으로는 ‘남(男)’의 사람인데 ‘성(性)’으로는 ‘여(女)’의 사람이라고, 혹은 그 반대라고 느끼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남성’으로서 같은 성의 ‘남성’을, ‘여성’으로서 같은 성의 ‘여성’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다. 사회는 이 ‘사람’들을 ‘성 소수자’라 부른다. ‘성 다수자’와 ‘성 소수자’가 있는 셈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다수와 소수는 분명 ‘양’의 범주에 속한다. 이 ‘양’의 범주에서 ‘다수’는 언제나 그리고 반드시 정상이며 받아들여야 하고, ‘소수’는 비정상이며 배제해야 할까?

 

《가톨릭교회 교리서》(2357-2359항 참조)는 ‘동성애’에 관하여 가르치고 있다. ‘성 소수자’는 ‘사람’에 대한 논의이고 ‘동성애’는 ‘행위 혹은 성향’에 대한 논의이다. 때문에 이와 관련한 ‘성찰과 판단과 행동’에 있어 세심한 식별이 필요하다. 모든 인간은 누구도 예외없이 존엄하다. ‘성 소수자’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이 자리에서는 교리서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이른바 ‘성 소수자’(인간)에 대한 교회의 입장과 사목적 배려, 신앙인의 자세를 가늠해 보려 한다.

 

 

교회의 입장(2357항)

 

교리는 첫째, “동성애는 기나긴 시대와 다양한 문화를 거치며 갖가지 형태를 띠어 왔다. 동성애의 심리적 기원은 거의 밝혀져 있지 않다”고 밝힌다. 주목할 내용은 동성애(행위 및 성향)를 ‘시대’ 및 ‘문화’적 배경뿐만 아니라 ‘심리적 기원’ 곧 인간학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만큼 ‘행위’에 대한 성찰과 판단과 행동에서 ‘신중함’과 ‘겸손’을 요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둘째, 교회는 “동성애를 심각한 타락으로 제시하고 있는 성경에 바탕을 두어, 전통적으로 ‘동성애 행위 그 자체는 무질서’라고 천명해 왔다. 동성애는 자연법에도 어긋난다. … 동성의 성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인정될 수 없다”고 밝힘으로써 ‘특정 행위’를 용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성경과 전통’을 배경으로 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다. 성경 해석의 지속적 발전과 전통의 진화 때문에 그렇다. 사실 성경 해석(학)의 발전으로 창세기의 인간과 죄(성향과 행동)에 대한 이해는 그 지평을 확장시켜 왔다. 게다가 ‘전통’이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계승·발전하기 때문에 본래 개방성을 가진다.

 

두 번째로 주목할 대목은 ‘동성애 성행위’를 불용하는 것이지, 성 소수자(인간)를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다음의 성 소수자에 대한 교회의 사목과 신앙인의 태도에 바탕이 된다.

 

 

사목의 배려(2358항)

 

“상당수의 남녀가 깊이 뿌리박힌 동성애 성향을 보이고 있다. 그들의 경우는 스스로 … 선택한 것이 아니다. … 그들 대부분에게는 시련이 되고 있다.” 주목할 내용은 ‘성 소수자’(인간)를 바라보는 시선에 있다.

 

첫째, 대부분의 성 소수자가 그 ‘성향’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님에도 ‘시련’을 겪고 있다고 본다. 물론 ‘시련’의 배경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하다.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시련’과 ‘외부 조건이 강요하는 시련’은 구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그렇다면 시련을 겪는 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그들을 존중하고 동정하며 친절하게 대하여 받아들여야” 하며, “그들에게 어떤 부당한 차별의 기미라도 보여서는 안 된다.” 교회와 ‘성 다수자’라고 생각하는 신앙인이 가져야 할 자세다. 교회생활에서 그가 누구건 그를 존중해야 하고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를 ‘행동’으로 드러내야 한다. 신앙인 가운데에는 ‘성소수자’가 없을까? 분명히 있다.

 

 

성 소수자 신앙인의 자세(2358항, 2359항)

 

교리는 성 소수자에게도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들의 처지에서 겪을 수 있는 어려움들을 주님의 십자가 희생과 결합시키라는 요청을 받고”(2358항) 있으며, “점차 그리고 단호하게 그리스도교적 완덕에 다가갈 수 있고 또 다가가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성 소수자 그리스도인’은 “자제의 덕”과 “사심 없는 우정의 도움”과 “기도와 성사의 은총”으로 “정결을 지키도록”(2359항) 해야 한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우리 교리는 성 소수자를 존중하고 차별하지 말아야 하며, 성 소수자 그리스도인도 ‘완덕의 길’로 나서야 한다고 가르친다.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는 ‘이 교리’에 대해 침묵한다. 다른 사회 현안과 마찬가지로, 이 ‘교리’는 ‘골치 아프고’ ‘공동체에 분란만 일으키는’ 내용이기 때문에 교회가 ‘침묵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믿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는 사이 더욱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바로 고결한 ‘성’이 사람들 사이의 싸움거리로 전락하는 것 말이다. 그것도 진보니 보수니 하면서 집단 사이의 폭력적 싸움거리로 말이다.

 

* 박동호 안드레아 - 1990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얼마 전까지 신정동성당과 정의평화위원회에서 사목하였다. 현재 중견사제 연수 중이다.

 

[성서와함께, 2016년 10월호, 박동호 안드레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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