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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정진석 회고록23: 주님의 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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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1-10 ㅣ No.410

[추기경 정진석] (23) 주님의 은총


정진석 니콜라오 “네, 여기 있습니다!”

 

 

- 1961년 3월 18일 명동대성당에서 거행된 사제 서품 미사에서 첫 강복을 주는 새 사제들. 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정진석 신부다.

 

 

“정진석 니콜라오.”

 

“네, 여기 있습니다!”

 

혜화동 신학교에 들어온 지 7년, 진석은 신학교 과정을 마치고 드디어 사제품을 받게 됐다. 당시에는 보통 3월 19일 성 요셉 대축일에 맞춰 사제 서품식을 거행했는데, 마침 1961년 3월 19일은 성지주일이었다. 성주간 첫날 서품식을 할 수는 없어 그 해에만 토요일인 18일에 서품식이 진행됐다. 

 

진석은 수품성구로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한 21,15)를 택했다. 상본 앞면은 진석이 지은 첫 책 「장미 꽃다발」의 표지로 대신했다.

 

사제 서품 예식은 명동대성당에서 있었다. 수품 후보자 중 가장 먼저 이름이 불려 제단 앞에 섰다. 명동대성당 제대 앞에 서 있으려니 어려서부터 이곳에서 보미사(복사)를 했던 것부터 유년 시절 흔들리던 신앙을 되찾은 것까지 성당에서의 추억들이 마치 영화 필름처럼 머릿속을 지나갔다.

 

 

첫 기도는 복음화율 10% 

 

이윽고 성인 호칭 기도를 바치기 위해 모든 수품 후보자들이 땅에 엎드렸다. 아름다운 성가대의 기도 소리가 흘러나오고 마치 천국에 다다른 듯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진석은 엎드려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하느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 중 가톨릭 신자가 적어도 10%가 넘는 날을 본 후에 죽는 은총을 주소서. 저도 복음 선포에 제 힘껏 노력하겠습니다.” 

 

왜 그런 기도를 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중학생 시절 각 반을 돌아다니며 가톨릭 신자를 찾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을 뿐이다. 한 반에 한두 명도 되지 않아 실망하던 어린 진석의 꿈은 가톨릭 신자인 친구들이 많아지는 것이었다. 그 당시 가톨릭 교회의 신자 수는 전체 인구의 1%도 채 되지 않았기 때문에 10%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하느님께 떼를 쓰는 마음으로 기도했다.

 

1961년 3월 19일 첫 미사 후 대신학교에서 가족들과 함께한 정진석 신부. 정 신부 오른쪽이 모친 이복순 여사, 정 신부 왼편에 선 이는 외삼촌 이정규 신부.

 

 

서품 미사를 마치고 새 사제들이 첫 축복을 신자들과 선배 신부들에게 단체로 주었다. 그 후 성당 밖으로 나와 기다리고 있던 가족, 신자들과 만났다. 첫 축복을 어머니께 드렸다. 어머니는 제의를 입은 새 사제 정진석 신부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셨다. 사제가 되면 개인 첫 축복은 보통 어머니께 드린다. 이 순간이 새 신부들에게는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라 눈물을 참지 못한다. 진석은 기도를 바친 후 두 손을 모아 허리를 숙여 어머니의 머리에 안수했다.

 

“하느님! 어머니를 강복해 주세요.” 

 

어머니께서 따로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진석은 알고 있다. 그 순간 어머니도 진석을 위해 기도하셨다는 것을 말이다. 눈물을 간신히 참던 진석과는 다르게 작은 체구에 한복을 곱게 입으신 어머니는 오히려 의연했다. 이제 자기 아들을 온전히 교회에 바쳤다는 생각을 하셨을 것이다.

 

진석은 바로 다음날 신학교 대성당에서 첫 미사를 주례했다. 성지주일 장엄 미사였다. 서울대교구 수품자 중에서 가장 연장자는 이곳에서 첫 미사를 하게 돼 있었다. 신학교 대성당은 진석의 수품 한 해 전에 완공돼 진석이 부제로서 가장 앞줄에 앉아 매일 미사를 보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미사를 집전하려니 진석은 무척 감격스러웠다. 존경하는 교수 신부님들과 후배 신학생들이 새 사제를 진심으로 환영하는 의미로 거룩하고 우렁찬 성가로 맞이했다. 첫 미사를 집전하는 진석은 그동안의 시간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마음속으로 감사를 연발했다. 그리고 이제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사제로 살기를 다짐했다.

 

그동안 평화로운 시간을 보낸 신학교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지난 7년 동안의 신학교 생활을 생각하면 정말 천국처럼 휴식과 같은 삶이었다. 서품을 앞두고 많은 사람이 신학교 생활에서 힘들고 고민되던 순간을 물었지만, 진석은 분명하게 ‘그런 적 없다’고 대답했다. 사실 앞으로의 일생을 선택해야 하는 수품 후보자들이 고민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때 고민을 하지 않는다면 신부가 돼 제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석은 전쟁 때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인생을 덤으로 얻어 살고 있었다. 보통 서품을 앞두고 얼굴이 핼쑥해질 정도로 고민한다지만, 전쟁 중에 온갖 비참과 이기적인 인간 군상을 경험하고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진석은 스스로 하지 않은 생각이 없었다고 말할 만큼 단단해져 있었다. 그래서 진석에겐 신학교 생활이 어렵지 않았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시련 속에서 단련하며 준비시키시듯 나 또한 그렇게 하셨는가 보구나….’ 

 

진석은 자신의 고통과 어려움과 시련의 시간을 주님께서 주신 ‘선행학습’이라고 생각했다. 주님의 은총은 실로 놀랍고 위대했다.

 

 

사제로서 첫 발걸음

 

진석은 역사가 깊은 중림동약현본당 보좌 신부로 발령받았다. 진석의 첫 부임지가 된 약현본당은 1887년 수렛골(현 순화동)에서 한옥 공소로 출발했다. 약현본당에서 분리된 본당만 해도 수십 개나 돼 그야말로 한국 초대교회의 반석과 같은 곳이었다. 성당은 천주교 박해시기 순교자 처형지이자 대표적인 성지인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지금의 서소문 순교성지)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일찍이 약현본당 신부들은 서소문이 있었던 지역을 가리키며 교우들에게 그곳을 지날 때마다 성호를 긋고 순교자께 기도를 바치도록 가르쳤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거룩한 장소에서 햇병아리 신부인 진석의 사제 생활이 시작됐다. 

 

모든 것이 처음 체험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주임인 신인식 신부와 신자들이 잘 대해줘 생활에 불편 없이 나날이 행복하게 살았다. ‘신자들과 함께 산다는 체험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학교에서 배우는 것과는 또 다른 즐거움과 행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본당 총회장이 병자성사가 있다며 급하게 진석을 찾았다. 서둘러 준비해 회장과 함께 갔더니 폐결핵을 앓고 있는 16살 소녀가 있었다. 창백하게 누워 있는 소녀에게 진석은 병자성사를 열심히 주었다. 성사를 마치고 성당으로 돌아오니 회장이 소주 한 잔을 건네주셨다.

 

“신부님, 이거 드시고 소독하셔요. 폐결핵이 무서운 병이에요.”

 

당시에 폐결핵은 치료가 잘되지 않아 죽는 사람이 많았다. 전염병이라 사람들은 환자와의 접촉을 꺼렸다. 회장은 걱정되는 마음에 진석에게 소주를 준 것이다. 그 마음을 거절할 수 없어 진석은 단숨에 소주 한 잔을 들이켜고 사제관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사제관 입구에 주임 신부가 기다리고 서 있었다. 

 

“정 신부!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총회장님과 폐결핵을 앓고 있는 아이에게 다녀오는 길입니다. 병자성사를 줬습니다.” 

 

“뭐야? 폐결핵 환자? 신부, 밖으로 나와!” 

 

주임 신부의 호통에 진석은 어리둥절하며 따라 나갔다.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진석이 마당으로 다 나오자 신 신부는 진석의 온몸에 파리약을 뿌렸다. 

 

“왜 정 신부가 거기에 가? 내가 가야지! 나한테 이야기해야지, 전염이라도 되면 어떻게 하려고 해. 다음엔 나에게 이야기해. 알았어?” 

 

상기된 얼굴로 크게 야단을 치셨지만 진석은 주임 신부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 먼 산만 바라보았다. 

 

“네~ 알겠습니다.” 

 

주임 신부의 아버지 같은 사랑에 진석의 두 뺨에는 눈물이 주룩 흘렀다.

 

[평화신문, 2016년 11월 6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사진=서울대교구 홍보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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