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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전체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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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11 ㅣ No.327

[평화신문 · 신학과사상학회 공동기획 -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전체개관

격변하는 시대, 교회의 쇄신과 적응 이끌어낸 20세기 신학자들 생애 · 사상 통한 신앙적 성찰


-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막식에는 전 세계 2500명 이상의 교부들이 참석했다. 교회와 세상을 분리해 바라보던 종래의 배타적 시각에서 벗어나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재해석한 것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 시도였고 공헌이었다. 사진은 1962년 10월 11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막을 올린 제2차 바티칸공의회 현장.


평화신문이 창간 25주년을 기념해 신학과사상학회(학회장 백운철 신부)와 공동으로 특별 기획한 것은 '20세기를 빛낸 가톨릭 신학자들'을 연재, 소개하는 작업이다.

신앙생활을 위해 반드시 신학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학적 성찰은 신앙적 판단력을 심화시키고 질적 지평을 넓히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성경 공부에 맛 들이며 신앙의 깊이를 더해 가고 있지만, 신학은 아직 생소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일반인들이 평소 접하기 힘들었던 신학적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고, 그동안 그저 이름만 들어 알고 있던 신학자들이 말한 바가 과연 무엇인가를 일반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20세기를 대표하는 여러 신학자를 소개할 예정이다. 20세기 가톨릭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는 신학자를 선별해 그들의 생애와 사상과 영향 등을 다룰 것이다.

여기에는 신학적 전문성이 전제돼야 하기에 신학과사상학회가 특별 기획에 참여하게 됐다. 신학과사상학회는 가톨릭 신학과 사상을 더욱 전문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 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진을 중심으로 2007년 결성한 전국 규모의 학회다. 현재 신학과사상학회가 매년 2회 발간하는 전문학술지 「가톨릭 신학과 사상」은 우수성과 전문성을 인정받아, 2011년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 Korea Citation Index)에 정식으로 등재됐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해가 우선

20세기 신학의 전반적 흐름 안에서 평화신문과 신학과사상학회가 선별한 현대 신학자를 소개하기에 앞서 무엇보다도 20세기 가톨릭 신학의 중심축을 이루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핵심적 의미는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교회 생활에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선별된 신학자들과 공의회 관계는 어떠한지 등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격변의 20세기를 맞이한 가톨릭교회는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러 위기와 도전에 직면해야 했는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바로 이러한 와중에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현대 세계에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려는 자성과 쇄신의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초대 교회의 정신으로 되돌아가고자 전반적인 쇄신 작업을 이룩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새롭게 되새겨 복음 정신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것은 지금도 유효한 우리 모두의 과제라 할 수 있다.

- 교황 요한 23세는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시대의 표징을 읽어야 한다며 교회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연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개최했다. 사진은 교황 요한 23세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최를 알리는 문서에 서명하는 모습. [CNS자료사진]


많은 비극적 사건으로 점철된 암울한 20세기 전반기를 보낸 후, 가톨릭교회는 서서히 변화의 조짐과 기운에 휩싸이게 된다. 그동안 세상에 대해 폐쇄적 입장을 취했던 가톨릭교회에 쇄신과 개방이라는 새로운 분위기가 형성되기에 이른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의 비극을 깊이 체험했던 시기를 거치면서 이뤄진 복음적 재성찰의 결과다. 교회는 결코 세상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할 수 없으며 그들의 염원과 소망이 무엇인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은 결과였다.

교황 비오 12세(재위 1939~1958)가 서거한 후, 급변하는 시대에 가톨릭교회를 이끌어갈 후임 교황을 선출하는 일에 교회와 세상의 관심이 집중됐다. 당시 전통주의적 견해를 고수하던 신앙교리성 장관 알프레도 오타비아니(1890~1979) 추기경을 지지한 이탈리아 추기경들과 변화와 개방을 요구하던 프랑스 추기경들의 입장이 팽팽하게 엇갈리는 상황이었다.


교황 요한 23세의 의욕적 행보

우여곡절 끝에 당시 베네치아교구장이던 안젤로 론칼리(1881~1963) 추기경이 선출돼 '요한 23세'라는 교황명을 택하게 된다. 교황 요한 23세(재위 1958~1963)는 1881년 이탈리아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사제가 됐으며 1925년 교황청 순시자로 임명돼 불가리아에 파견된 후 주교품을 받았다. 이후 그리스와 터키 주재 교황대사를 거쳐, 1944년 프랑스 주재 교황대사로 임명됐다. 이때 쌓아놓은 프랑스 주교들과 친분이 교황 선출 과정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고 본다. 1953년에는 이탈리아 베네치아교구장으로 임명되는 동시에 추기경에 서임됐다.

그가 1958년 10월 28일 교황에 선출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를 의외의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그는 유명한 인물이 아니었고, 이미 77세라는 고령의 나이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교황 선출을 위한 비밀회의 '콘클라베' 과정에서 이탈리아 추기경과 프랑스 추기경 사이에 팽팽한 대립의 결과로 추정된다.

그러나 요한 23세는 교황 즉위 후, 예상과 달리 매우 의욕적 행보를 보였다. 그는 소박하고 서민적이며 마치 시골 사제와 같은 모습을 보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자애로운 사목자상을 보여줬다. 1959년 1월 25일에는 새로운 공의회를 소집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개인적 확신과 결단에 따른 것이었고, 요한 23세는 이를 하느님께서 내리신 영감의 결과였다고 여러 번 말했다. 많은 사람이 이 결정에 매우 놀랐다. 이후 본격적인 공의회 준비 과정에 들어갔고 전 세계가 이를 큰 기대 속에 지켜봤다.

요한 23세는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시대의 표징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회가 더는 세상의 아픔과 관심을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교회의 복음적 쇄신과 개방, 그리고 시대 적응(Aggiornamento)을 외쳤고 결국 1962년 10월 11일 역사에 길이 남을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문을 열었다. 개막식에는 전 세계에서 온 2500명 이상의 교부들이 참석했다. 교회와 세상을 분리해 바라보던 종래의 배타적 시각을 복음의 빛에 근거해 재해석하려 한 것이 바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시도였고 공헌이었다.

그리하여 공의회는 교회와 세상을 철저히 분리하는 대신, '안을 향한 교회'와 '밖을 향한 교회'라는 새로운 견지에서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재고하기 시작했다. 교회를 중심으로 한 신학적 통찰은 「교회 헌장」에선 친교를, 「사목 헌장」에선 봉사 개념을 각각 천명하며 구체화돼 드러났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막은 요한 23세의 개인적 결단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지만, 그러한 교회적 성찰과 변화를 위한 염원은 이미 하나의 시대적 흐름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에 활동했던 여러 신학자들 영향이 그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문위원이나 신학 자문위원으로 참여해 직접적으로 공헌한 인물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작성에 간접적으로 신학적 영향을 미쳤던 사람도 있다.
 

공의회에 영향을 미친 신학자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직접 참여한 대표적 인물로는 지난 2월 말 자진 사임한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재위 2005~2013)를 들 수 있다. 베네딕토 16세는 당시 요제프 라칭거(1927~ )라는 이름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동안 독일 쾰른대교구장인 요셉 프링스(1887~1978) 추기경의 신학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이렇듯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에, 혹은 공의회 전후로 활동하며 공의회에 직간접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친 가톨릭 신학자를 꼽아본다면 베네딕토 16세 외에도 아래와 같은 인물을 꼽을 수 있겠다. 이들은 대부분 독일어권과 프랑스어권에서 활동한 신학자다.

먼저 프랑스 신학자를 살펴보면, 고생물학자로 우주적 관점에서 보편적 그리스도론을 전개했던 예수회원 피에르 테이야르 드 샤르댕(1881~1955)이 있다. 그는 우주 발전과 그 안에서 이뤄지는 인간의 상승적 진보를 강조하면서, 이 모든 자연적 진화 과정이 수렴되는 종말론적 완성으로서 '오메가 포인트'를 그리스도와 연결시킨다. 그러므로 육화하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진화적 우주의 알파요 오메가, 즉 자신에게 회귀하는 우주적 진화의 종착점이다. 샤르댕은 진화적 세계관 안에서 우주와 인간의 탄생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가를 설명하려고 시도하며 과학과 종교를 통합하는 낙관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세계관을 제시했는데, 이는 교회 안팎에서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는 물론 지금까지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고 비슷한 시대에 활동했던 예수회원 앙리 드 뤼박(1896~1991)은 공의회 개막 이전에 세상을 떠난 샤르댕과 달리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신학 자문위원으로 직접 참여했고, 그의 저술은 교회론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공의회 문헌 작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드뤼박은 1983년 추기경으로 서임됐다. 앙리 드뤼박과 함께 프랑스의 '신(新)신학'을 전개한 도미니코회 소속 이브 콩가르(1904~1995)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작성에 직접 참여한 신학자이며, 교회론과 성령론 분야에서 뛰어난 저술을 남겼다. 콩가르는 1994년 추기경으로 서임됐다.

한편, 독일어권 신학자를 살펴보면 먼저 이탈리아 출신이지만 독일에서 자라고 활동한 로마노 과르디니(1885~1968)를 들 수 있다. 과르디니는 현대 과학기술 문명의 전개 속에 발생하는 부정적인 문제를 지적하면서, 이에 대한 종교철학적이고 가톨릭 신학적인 대응을 모색하는 가운데 자신의 독보적인 인간학적 견해를 제시했다.

20세기 독일어권 신학에서 매우 중요하게 손꼽히는 교의신학자는 인간학적 초월신학을 전개한 독일 예수회원 칼 라너(1904~1984)다. 그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의 고전적 신학을 현대적 지평에서 새롭게 해석한 공로를 학계에서 인정받았다. 라너는 인간 존재가 본질적으로 궁극적 실재를 향한 초월로 개방돼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의 자기전달을 받는 실존, 즉 하느님의 위대한 사랑 앞에 서 있고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인간학을 구축, 은총론과 그리스도론 등의 신학을 매우 유기적이며 조직적인 체계 안에서 논리적이고 일관성 있게 전개했다. 라너는 요한 23세에 의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 신학 자문위원에 임명돼 공의회 기간 활발히 활동했다.

스위스 신학자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1905~1988)는 사랑의 현상에 착안한 '심미적 그리스도론'을 전개했다. 그는 이성적 숙고와 역사적 탐구, 그리고 사랑으로 이뤄지는 인간적 자유의 과제가 파스카 신비 그 자체 안에서 모두 하나를 이룬다고 봤다. 이러한 관점에서 집필돼 1961부터 26년에 걸쳐 출간된 그의 방대한 신학 3부작 저서는 첫째로 신학적 미학(1961~1969)을, 둘째로 신학적 드라마(1971~1983)를,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신학적 논리학(1985~1987)을 다룬다.

벨기에 출신이며 도미니코회 소속인 에드워드 스킬레벡스(1914~2009)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참여해 활동했던 진보 성향의 신학자로서 교회직무론과 그리스도론 분야에서 유명한 저서를 남겼다. 그는 '서술적 그리스도론' 입장에서 예수님 역사를 곧 우리 시대를 위한 살아 있는 역사로, 성경적으로 근거 있고 신학적으로 책임 있게 이야기하기를 시도했다. 즉 예수님의 인격적 체험이 모든 인간을 위한 공통적 체험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에게 그리스도론이란 예수님의 지상 생애 중에 현시됐던 바가 서술적 방식으로 현재화되는 것이라 하겠다.

스위스 출신의 신학자 한스 큉(1928~ )은 요한 23세에 의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문위원으로 임명돼 신학 자문 역할을 맡았다. 큉은 그리스도교와 세계 종교들, 그리고 인본주의의 다양한 흐름 사이에서 일어나는 관계와 충돌에 관심과 염려를 보이며 자신의 진보 성향의 신학을 펼쳤다. 그는 1970년대 자신의 교회론적 주장으로 교도권과 갈등을 빚고 경고 조치를 받기도 했는데, 이후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스도교 사상사뿐 아니라 타 종교와 대화, 세계윤리, 과학과 대화 등 다양한 분야에 관한 관심을 넓혀가며 자신의 방대한 신학 사상을 전개했다.

독일의 기초신학자 요한 밥티스트 메츠(1928~ )는 칼 라너의 제자이면서도 라너의 이론적인 초월신학을 넘어서 더욱 실천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는 스킬레벡스와 같이 '서술적 그리스도론'의 방법론을 사용했다. 교회 공동체가 나자렛 예수님에 관한 기억과 수난사를 되새기며 사람들이 연대성 안에서 이를 믿고 회심해 따르도록 호소하고 격려할 때, 마침내 그리스도 사건의 정체와 의미가 진정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신학적 탐구가 곧 사회윤리적 차원의 관심과 실천으로 연결되는 일종의 전이가 이뤄진다.

독일의 발터 카스퍼(1933~ ) 추기경은 '가톨릭 튀빙겐' 학파의 전통을 이어받은 승계자로 평가되며, 2010년까지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그의 저서 「예수 그리스도」(1974)는 아직까지도 그리스도론 분야의 최고 명저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의 또 다른 명저 「현재와 미래를 위한 신앙」(1972)은 튀빙겐대학교 교수 시절 제자인 심상태 몬시뇰(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장)이 번역, 국내에 소개됐다.

그리고 현재 오스트리아 비엔나대교구장인 크리스토프 쇤보른(1945~ ) 추기경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세대에 속하지만, 현재 바티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 중 하나다. 그는 「가톨릭교회 교리서」 책임 편집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20세기 활동한 제3세계 신학자

한편, 20세기에 활동한 제3세계 신학자들을 살펴보면 우선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을 태동시킨 페루 도미니코회 구스타보 구티에레즈(1928~ )를 꼽을 수 있다. 구티에레즈는 1970~80년대 남미의 억압적 시대 상황 속에서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을 외치며 등장한 해방신학이 복음 정신에 입각한 신학적 정당성을 지니고 있음을 주장하며 이를 여러 저서를 통해 널리 알렸다. 이후 해방신학은 여러 신학자에 의해 다양한 갈래로 전개됐는데, 사회 분석을 위한 방법론적 채택의 오류와 일부 노선의 급진성 등이 지적받으며 교도권의 경고를 받기도 했다. 남미 해방신학의 출현은 20세기 신학사에서 제3세계 신학과 토착화 신학의 흐름이 다양하게 등장하게 된 하나의 계기였다고 평가된다.

아시아적 맥락에서 토착화 신학을 구체적으로 전개한 인물을 꼽는다면, 다년간 대만 보인대학교 총장을 지낸 루오꽝(羅光, 1911~2004) 대주교를 들 수 있다. 그는 스콜라 철학의 관점에서 중국 철학을 새로이 조명하며 동서를 관통하는 가톨릭 철학 사상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스콜라 철학과 유가 철학의 상호보완적이고도 통합적인 관점에서 '생명철학'을 전개함으로써, 사상적 관점의 토착화라는 차원에서 아시아 신학 발전에 이바지했다고 평가된다.

아시아 신학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가톨릭 신학자는 스리랑카의 예수회원 알로이시어스 피어리스(1934~ )이다. 신학자이며 불교학자인 피어리스는 가난과 종교심이라는 두 가지를 아시아 신학의 핵심 요소로 간주해 출발한다. 그래서 '강요된 가난'이라는 실재를 살아가는 아시아 대륙에서 전통적 종교 유산을 통해 내려오는 '자발적 가난'이라는 복음적 요소를 재발견, 그리스도교 신앙 관점에서 재성찰함으로써 '아시아의 해방신학'이라는 통합된 신학적 전망을 제시했다.


윤리신학 · 전례신학 · 성서신학자

지금껏 교의신학자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는데, 교의신학의 인접분야인 윤리신학에서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 베른하르트 해링(1912~1998)을 들 수 있겠다. 독일 구속주회 회원인 해링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신학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며, 가톨릭 윤리신학에 대한 대화적 접근을 시도했다. 한편, 20세기 후반에 들어 주목받은 생태신학 분야에서는 미국 예수고난회 소속 토마스 베리(1914~2009)의 업적이 크다. 그는 생태학을 심원한 신학적, 영성적 차원에서 다루며 '생태영성'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여성신학 역시 20세기 후반에 새롭게 주목받은 분야다. 독일과 미국에서 활동한 성경신학자 엘리자베스 슈쓸러 피오렌자(1938~ )는 현대 여성신학의 흐름을 대표하는 신학자로 손꼽을 수 있다.

전례신학 분야에서는 독일 베네딕도회의 오도 카젤(1886~1948)이 있다. 그는 예수님 생애 신비 신학을 다루면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 업적은 전례에서 거행되는 신비 안에서 현존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카젤의 신학적 입장은 전례 거행의 구원론적 의미를 밝히는 데 기여했고, 20세기 전례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 결과적으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례 개혁에도 이바지했다. 한편, 영성신학 분야에서는 프랑스 베네딕도회 쟝 러클레르크(1911~1993)와 오라토리오회 루이 부이에(1913~2004) 등이 20세기 가톨릭 영성신학의 흐름을 이끌어간 주요 인물로 꼽힌다.

성서신학 분야에서는 20세기 중반 이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 속에 역사비평적 연구 방법론을 수용, 학문적인 성경 연구가 활발히 이뤄졌다. 베네딕토 16세가 「나자렛 예수」 1권에서 '20세기 후반 독일어권의 가톨릭 성경학계에서 가장 출중한 학자'라고 언급한 루돌프 슈나켄부르크(1914~2002)는 4권으로 이뤄진 「요한 복음 주석서」를 비롯해 「네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1993)에 이르기까지 신약 성경 전체를 아우르는 방대한 연구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구약 성경 전반에 관한 연구를 대표하는 학자로는 독일 예수회원 노르베르트 로핑크(1928~ )를 꼽을 수 있다.

한편, 프랑스 성서학계를 대표하는 학자로는 샤를르 페로(1929~ )가 있다. 그는 처음에 유다이즘을 연구하다가 초대 그리스도교 역사 연구에 전념하게 됐다. 페로는 「예수와 역사」(1979)를 통해 역사의 예수님에 대한 연구를 개척했고, 「초대 교회의 예수, 그리스도, 주님」(1997)에서는 신약 성경에 나타난 신앙의 그리스도론을 제시했으며, 마침내 「예수 이후-초대 교회의 직무」(2000)를 발간함으로써, 역사의 예수님에서 신앙의 그리스도를 거쳐 초대 교회의 직무에까지 이르게 되는 3부작을 완성했다.

미국 가톨릭교회에서도 걸출한 신학자들이 배출됐다. 슐피스회 소속의 레이먼드 브라운(1928~1998)은 요한 복음서와 요한 서간 연구의 금자탑을 쌓았으며, 「신약 성경 입문」(1997) 등 여러 저서를 통해 신약 성경 연구 전반에 걸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쿰란 문헌 연구의 전문가인 예수회원 조셉 피츠마이어(1938~ )는 해박한 아람어 지식을 바탕으로 복음서의 가장 오래된 전승층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두 권의 「루카 복음서 주석서」(1983/1985)를 펴냈다. 또 「로마서 주석서」(1993) 등을 통해 바오로 서간 전문가로서도 활발히 연구를 진행했다. 존 P. 마이어(1942~ )는 역사의 예수 연구서로서 「어느 주변 유다인」 1~4권을 1991년부터 2009년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량으로 발간해 학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현재 마지막 5권 출간을 준비 중인 마이어는 모두가 동의할 만한 역사의 예수님 참모습을 그려보겠다고 말한다.


신앙적 지평 확대 · 심화 계기되길

지금까지 언급된 신학자에 대한 소개가 앞으로 매주 나가게 될 것이다. 신학과사상학회 임원진이나 회원, 또는 해당 분야의 적임자라고 생각해 추천, 섭외한 외부 인사가 원고를 작성하게 된다. 어떠한 경우든 해당 신학자에 대해 깊은 전문성을 가진 학자가 원고를 쓰도록 배려했음을 밝힌다. 부디 '20세기를 빛낸 가톨릭 신학자들' 기획이 한국 교회 많은 독자에게 신앙적 성찰의 심화와 성숙, 그리고 신학적 지평의 확대를 이루는 계기가 되길 기원한다.

[평화신문, 2013년 5월 12일, 박준양 신부(가톨릭대 교의신학 교수, 신학과사상학회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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