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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동양의 로마 나가사키를 가다 (중) 암흑 교회 지켜 낸 한줄기 성령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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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9-18 ㅣ No.705

'동양의 로마' 나가사키를 가다 (중) 암흑 교회 지켜 낸 한줄기 성령의 빛

 

 

일본 교회 첫 순교자 26인이 처형된 니시자카 형터에는 오늘날 기념관과 기념성당이 들어서 있다. 니시자카 순교자 26인을 표현한 부조.

 

 

일본천주교회는 유명 순교자만 1만여 명, 무명 순교자를 합하면 5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쿠레 기리스탄’ 지역은 물론이고 나가사키 현(縣) 전역이 순교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순례에서 확인할 장소 외에도 이키츠키 인근 나가에노지마(中江) 섬과 소토메에서 이주한 신자들이 집성촌을 이룬 오도(五島) 등 기막힌 사연들이 전해져오는 작은 순교지들이 산재해 있다. 이번 호에서는 일본교회 순교 일번지로 불리는 니시자카와 국보로 지정된 오우라성당, ‘나가사키의 성자’ 나가이 다카시 박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여기당’(如己堂)을 소개한다.

 

 

26성인 순교지 니시자카(西坂)

 

“내가 말하려는 것을 잘 들으시오. 나는 어떤 죄도 범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했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나는 이 이유 때문에 죽으며, 죽는 것을 기뻐하고 이것은 하느님께서 내게 내려주신 커다란 은혜입니다. 나는 지금, 내 앞에 있는 당신들을 속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구원받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길 이외의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단언하고 주저하지 않고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원수,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용서하라고 가르칩니다. 나는 국왕(히데요시)과 나를 사형에 처하는 모든 이들을 용서합니다. 국왕에 대한 증오도 없고, 오히려 그를 포함한 모든 일본인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라카미의 잠복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250년만에 뿌치찬 신부를 만나 신앙을 고백했던 오우라성당. 국보로 지정돼 있다.

 

 

참으로 장엄하지 아니한가. 1597년 2월 5일, 사제 바오로 미키는 십자가에 달린채로 마지막 설교를 한다. 그에 앞서 바오로 미키와 25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596년 12월 교토에서 나가사키까지 900km에 이르는 순교의 길, 생명의 길을 걸었다. 12세 소년에서부터 60이 넘은 노인에 이르기까지 조리돌림과 왼쪽 귀를 잘리고 추위와 허기를 견디면서. 12세의 루도비코는 “신앙을 버리면 살려주마”라는 말에 “이 세상의 짧은 생명과 영원한 생명을 바꿀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14세의 토마스는 히로시마에서 어머니께 “임종시에 상등통회로 구원을 받을 수 있으니 열심히 살라”는 편지를 썼으나, 이 편지는 전달되지 못한채 함께 순교한 아버지 미카엘 고자키(小崎)의 저고리 동정 섶에서 발견됐다.

 

지진과 태풍, 무역선의 불착륙 등을 기리스탄의 탓으로 돌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신국(神國)에 해를 끼친다는 이유로 교토와 오사카에서 활동하던 사제와 신자 26명을 사형에 처한 것이 일본교회의 첫 순교다. 항구에서 잘 보이는 언덕에 세워진 니시자카 형터엔 오늘날 기념관과 기념성당이 들어섰다. 1981년 이곳을 방문한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스러운 언덕’ ‘순교자의 언덕’이라 불리는 이곳에 ‘지복의 언덕’이란 이름을 붙였다.

 

석양의 광채가 니시자카 앞바다를 황금빛으로 물들일 때면 니시자카의 순교자들의 노래가 들려온다. “모든 백성들아 주님을 찬미하라.”

 

 

오우라성당

 

일본 최고(最古)의 서양식 교회건축물로서 국보로 지정된 오우라성당은 건축물의 가치보다 신앙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한다.

 

일본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의 친필 서한. 26성인 기념관에 소장돼 있다.

 

 

일본이 1858년 서양 5개국과 맺은 통상조약엔 개항지 거주 외국인의 신앙을 존중하고 예배당을 인정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 조약에 따라 파리외방전교회 뿌치잔 신부가 오우라에 성당을 짓고 1865년 2월 19일 봉헌식을 가졌다. 가쿠레 기리스탄(잠복 그리스도 신자)을 찾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당시 불란서의 절로 불렸던 오우라성당을 구경하러 우라카미의 주민들이 온 것이다. 이들은 16세기말부터 250여 년간 “박해가 7대 동안 계속된 뒤 로마의 파파(교황)가 보내는 사제가 마루아(마리아)를 모시고 온다”는 예언을 굳게 믿으며 기다려온 가쿠레 기리스탄의 후손들이다.

 

우라카미 농민들은 오우라성당 외국인 선교사에게 3가지 질문을 한다. “누가 보냈습니까? 당신은 결혼했습니까?” 답을 들은 그들은 “마리아상은 어디에 있습니까”하고 묻는다. 선교사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상을 가리키자 자신들의 신앙과 일치함을 확인하고 귓속말로 속삭였다. “당신 마음과 내 마음이 같습니다.” 자신들이 가쿠레 기리스탄임을 고백한 것이다. 보편교회의 교계제도와 성모신심을 묻는 핵심 질문을 통해 사제와 신자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실로 250년만의 일이다. 250년간의 암흑 속에서도 성령의 빛은 교회를 지켜주셨다. 우라카미의 신자들에게 사제와의 만남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기쁨과 환희가 아니었을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준비중인 오우라성당은 한국 교회와도 인연이 깊다. 1867년 조선교구 6대 교구장 뮈텔 주교가 박해를 피해 머물렀고, 1882년 뿌치잔 주교가 7대 교구장 블랑 주교의 서품식을 거행한 곳이기도 하다. 또 보령 갈매못 순교자 다블뤼 주교와 세 순교자의 유해 손실을 우려한 뿌치잔 주교의 명으로 보령 서주골에서 1882년 11월 오우라성당으로 모셔와 1894년 5월 용산신학교로 옮길 때까지 12년간 성인들의 유해를 모셨던 성지이기도 하다.

 

 

여기당(如己堂)

 

'나가사키의 성자' 나가이 다카시 박사가 말년을 보낸 '여기당' (왼쪽)과 그 내부(오른쪽) 해마다 16여만명의 순례객들이 이곳을 찾아 박사의 '여기애인' 정신을 묵상한다.

 

 

우라카미성당에서 도보로 5분 남짓 언덕을 오르다보면 볼품없는 초라한 판잣집이 하나 보인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여기애인’(如己愛人)의 삶을 몸으로 살다 간 ‘나가사키의 성자’ 나가이 다카시 박사가 1948년 우라카미의 신자들이 마련해준 다다미 두 장의 한칸방에서 어린 두 아이와 함께 살며 저술활동 등으로 평화를 호소하다 43세의 짧은 생을 마감한 곳이다. 그의 정신을 기려 ‘여기당’으로 불린다.

 

여기당이 위치한 자리는 신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다. 이곳은 바로 우라카미 가쿠레 기리스탄 공동체의 7대 책임자(쵸카다, 帳方) 기치조우(吉藏)의 집터이며, 그는 다카시 박사의 부인 미도리의 아버지이자 다카시의 장인이다. 순교자 바스챤이 “박해는 7대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기치조우는 우라카미 세번째 박해때 옥에서 순교했다.

 

해마다 16만여 명의 순례객이 여기당을 찾는다. ‘나가이 다카시 기념관’에 유품과 관계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고, 그의 손자가 관장으로 순례객들을 맞는다.

 

[가톨릭신문, 2009년 8월 30일, 나가사키(일본) 전대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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