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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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무너져가는 집을 복구하여라11: 하느님의 구원경륜 (8) 환희의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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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2-13 ㅣ No.1762

[무너져가는 집을 복구하여라!] (11) 하느님의 구원경륜 ⑧ 환희의 신비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머무신다

 

 

성모님은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고, 엘리사벳에게 달려가 감사와 기쁨의 찬미가를 불렀다. 이스라엘 아인 카림 엘리사벳 방문 기념 성당에 들어서면 성모님과 엘리사벳이 임신한 배를 맞대고 있는 성상을 볼 수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성모님의 시선으로 하느님께서 이루신 구원경륜을 바라본다면,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시어 이 땅에 오신 것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성모님은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신 후, 그 기쁜 소식을 선포하러 엘리사벳에게 달려가 하느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신비를 기억하며 감사와 기쁨의 찬미가인 ‘마니피캇’을 불렀다. 오늘날 우리는 신앙생활 안에서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육화 사건’을 당연시 받아들인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육화의 신비’는 이해하기 힘든 일종의 스캔들이었다. 당시 사람들의 신앙관에 따르면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존재론적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다고 여겨,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육화의 신비를 받아드릴 수 없었다. 또한 초세기 교회 안에서도 ‘육화의 신비’는 육체를 경시하는 영지주의 사조 안에서 거부되거나 축소하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영지주의 사조에 따르면 물질이나 육체는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라고 생각하였고, 따라서 ‘육화의 신비’는 영적인 존재가 더 하등한 육체적인 차원으로 추락하는 것, 즉 하느님의 지위를 격하시키는 모독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 상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이후에 초월적인 하느님이 육체를 가진 사람이 되셨다는 신비 안에서 너무도 크신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되었다.

 

 

‘육화의 신비’로 인간에게 내려진 축복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지상에 오신 이후 인간에게 내려진 축복이 얼마나 크고 기뻐할 만한 일인지 전해져오는 이야기가 있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선망하는 대상이 예수님 탄생 전후를 기점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만 해도 천사들의 선망의 대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얻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 이후에 그 대상이 인간처럼 육체를 지니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천사는 영적인 존재여서 육체를 지닌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살 수 없기 때문이란다. 요컨대, 천사들은 예수님처럼 병자를 어루만지면서 치유의 손길을 펼칠 수도 없고, 예수님처럼 연민의 눈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위로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결국 천사들은 예수님이 육체를 지니고 지상에서 살았던 삶의 방식을 따라 살 수 없으니(Imitatio Christi) 예수님처럼 될 수 없고, 따라서 지상의 삶으로 보여주신 예수님의 신성, 즉 하느님이 되는 길에도 다가설 수도 없게 된 것이다. 이에 반해 인간은 예수님처럼 살 수 있고 따라서 하느님처럼 될 수 있는 특권의 길이 열렸다. 구약시대부터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소망은 하느님처럼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창세기의 원조들은 유혹자의 덫에 걸려 그 소망을 제대로 구현할 수 없었다. 요컨대 유혹자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남용하게 하는 그릇된 길로써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고 원조들을 현혹시켰다. 그러나 하느님처럼 되는 길은 자유의지의 남용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지니신 마음으로 그분께서 하신 일들을 실천함으로써 가능하다.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시는 예수님

 

또한 예수님이 사람이 되심으로 상처받은 인간성이 치유되는 길이 열렸다. 요컨대 예수님께서 연약한 한 아기로 태어남으로써 강함에 매몰되어 있던 애착에서 벗어나 자신의 연약함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드릴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가장 낮은 자리인 말구유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을 통해, 인간은 죄의 상처로 생긴 불만족에서 벗어나 어떤 처지에서도 만족할 수 있는 겸손함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더 나아가 타인의 몰이해와 박해의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고, 완고한 사람들을 만날 때나 딜레마의 상황에 처할 때 어떤 방식으로 대응해야 하는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유혹의 상황에서 어떻게 유혹을 물리쳐야 하는지 등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은 상처받은 인간성을 치유해 줄 뿐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실행할 수 있는 지혜를 던져 주고 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심은 훼손된 인간성을 회복시켰을 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간절한 열망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그 열망은 하느님을 눈으로 뵙는 것이다. 구약시대의 신앙인들도 하느님을 뵙고 싶었지만 뵐 수 없었다. 그들은 율법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율법을 잘 지킴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추구하였는데, 이것이 그들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축복이었다. 하지만 신약시대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와 함께 머무심으로 구약시대에 누리던 축복을 능가하여 인간의 간절한 열망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어 성모님과 성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할 때, 성전에서 시메온이 아기 예수님을 뵙고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하느님을 찬미한다.(루카 2,29-32) 평생을 걸쳐 하느님을 뵙기를 기다려온 시메온의 간절한 소망이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뵙고, 평생 간직해 온 그의 소망이 이루어졌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한 것처럼 하느님을 면대면으로 뵙는 ‘지복지관’의 경지는 우리가 죽어 하느님 나라에 갈 때 이루어지겠지만, 시메온이 누렸던 축복은 신앙의 눈과 귀로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고 관상함으로써 우리에게도 항상 열려 있다. 이렇게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우리는 그분의 삶을 따라 살 수 있으니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2월 13일, 김평만 신부(가톨릭중앙의료원 영성구현실장 겸 의과대학 인문사회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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