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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교회, 비용을 어떻게 마련해 왔나?(교무금 의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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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12-17 ㅣ No.612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교회, 비용을 어떻게 마련해 왔나? - 1931년 조선주교회의 교무금을 의무화하다



2012년 현재 한국에는 천주교 신자가 약 520만 명이며 성당이 1664개소, 공소 796곳이 있다. 사제는 4,754명, 남녀수도자 11,726명이 활동 중이며 주교는 34분이다. 200여 년 간의 성장이다. 대구대교구도 현재 신자 45만여 명, 주교 2분, 본당 159개, 공소 81개, 사제 511명, 수도자 1,228명이 있다. 교구설립 당시 신자 2만 6천여 명, 주교 1분, 18개 본당, 390개 공소, 18명의 사제에서 100년 동안 일군 성장이다. 즉 그 살림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다는 말이다.
 

남이 살아 준 내 살림

초창기 조선교회는 포르투갈이 선교보호권을 가지고 설립했던 북경교구의 도움을 받았다. 북경교구에서 파견했던 주문모 신부가 순교한 이후 조선 신자들은 1811년과 1825년 두 번에 걸쳐 교황님께 목자를 보내주십사고 편지를 올렸다. 이 가운데 두 번째 편지가 2년 뒤 로마에 도착했다. 감동한 교황청은 파리외방선교회에 조선선교를 의뢰했지만, 선교회에서는 선뜻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이때 샴(타일랜드) 포교지에 있던 브뤼기에르 신부는 조선교우들의 편지에 깊이 흔들렸다. 그는 곧 샴의 보좌주교로 서품될 사람이었다. 그의 표어는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누가 뭐라든, 나는 전진하리라.”였다. 파리외방선교회가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일을 미적거리자, 조선인의 편지 한 장에 조선을 사랑하게 된 그는 이 길을 찾아나서기로 자원했다.

교황은 1831년 9월 조선교구를 설정하고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교구장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조선교회는 교황청 포교성과의 관계를 갖기 시작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신이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돈 한 푼 없이 중국인 청년 왕요셉을 데리고 조선을 향해 떠났다. 무료로 태워주기로 한 배가 나타나지 않아 첫 출발부터 어려움이 생겼다. 그는 동료들에게 우선 돈을 꾸어 그 돈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여정을 시작했다. 그의 행색이 너무 초라해서 때로는 수사신부냐는 질문도 받았다. 중국 여정 중에는 걸인의 복장도 했다. 당시 중국은 천주교를 폐쇄하고 서양인을 내쫓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 고생 속에서 그는 여러 주교와 신부, 교우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도중에 파리외방선교회의 돈이 도착하면 빌린 돈을 갚으면서 전진해 나갔다.

주교는 왕요셉을 시켜서 조선 신자들에게 주교댁을 마련할 비용 5백 냥과 자신보다 먼저 조선에 입국한 유방제 신부의 선교비용 1백 냥, 그리고 미사 도구 및 신자들에게 나누어줄 물건을 보냈다. 주교는 자기 포교지 문턱에까지 이르렀다. 3년이나 걸린 긴 여정이 끝날 즈음 조선 신자들은 11월에 국경으로 그를 모시러 오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약속장소를 향해 가다가 10월 20일 병사했다. 그가 마련한 길로 모방신부가 들어왔다. 포교지로 들어올 수 없었던 초대 교구장의 선교지를 향한 여정에서 이미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조선의 천주교회를 향해 손을 뻗었는지 보게 된다. 초대 주교가 낯선 땅에서 얻은 도움, 길에서 전교회와 연락을 주고받은 것은 그 지역에 가톨릭교회가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적이나 관계의 친소를 불문한 배려의 펼쳐짐이었다.

전교회 돈이란 사실 프랑스 신자들의 작은 애긍을 모아 보내는 것이었다. “전선(全善)하신 천주께서는 지구의 반대쪽 끝으로 불려 온 한 선교사를 주님의 앞에서 잊어버리지 않는 이들에게 풍성한 축복을 내려 주시기를!” 기원하면서, 그는 매일 프랑스의 전교회원들을 위해 특별기도를 드렸다. 그는 이렇게 프랑스 전교회원들의 손길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번 보지도 못한 조선의 신자들을 사랑할 열정이 있었다. 이것이 우리에게 와 닿은 것이다.


춘추판공과 공소전

1794년 조선에 입국하여 7년간 전교한 주문모 신부는 북경교구의 경비 지원을 받았다. 1836년 전후에 입국한 앵베르 주교 등 선교사들은 포교성의 보조금도 가지고 왔다. 물론 선교사들이 없을 때 교우들은 교회활동에 필요한 돈을 스스로 부담했다. 즉 박해를 무릅쓰고 북경에 10여 차례 사람을 보내던 비용도 신자들이 부담했다. 당시 신자들은 신앙 때문에 한 곳에 정착해서 살기도 어려웠던 사람들이었다. 그 후 교회가 공소를 차리자 교우들은 공소운영비를 나누어 분담했다. 그러나 종교자유가 온 뒤에도 선교사들은 피폐한 조선 교우들에게 교회 유지비를 말할 생각도 못했다.

공소비용은 공소에 따라 자본금을 세우거나 토지를 사서 그 수입으로 충당되었다. 어떤 공소에서는 각 호별로나 재산정도에 비례하여 공소 전을 거두기도 했다. 당시 교회는 공소를 위해 내는 돈은 가능하면 익명으로 하도록 권장했다. 그리고 8세 이상의 세례 받은 모든 신자들이 모여서 교회 유지를 위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액수를 정하도록 했다. 특히 이런 비용은 성사 받고 안 받고의 여부나, 대고해 소고해 등과 연관시키면 안 되었다. 극빈자나 냉담자를 제외시켜도 안 되었다.

선교사가 각 공소를 방문할 때, 앞으로 가야 할 지역의 공소는 안내자와 짐꾼 두 사람의 비용을 부담하여 신부를 모셔가야 했다. 영접군은 선교사 일행이 도중에서 식사하거나 차를 타게 되는 경우에 소요되는 경비도 미리 장만해 왔다. 제병 만들 밀가루나 음식은 신부의 지시에 따랐다. 교우들은 춘추공소 때마다 신부께 신과 버선, 미사 초 두 대, 꿀 바른 빵, 밀 한 덩어리 등을 드리고 복사에게는 신과 버선을 공급했다. 그 외에 공소전으로 쓰고 남은 돈은 예물전으로 신부께 냈다. 신부는 이 돈을 성당이나 학교를 건축하거나 전교회장 경비로 썼다. 이외에도 가을공소 때에는 한국인 신부를 위한 애긍전이나 『경향잡지』 대금을 걷기도 했다. 주교가 사목방문을 할 때에도 신자들은 선교사의 성무 집행 때와 마찬가지의 형식으로 경비를 책임졌다. 모든 신자는 주교를 환영하고 봉헌물(금)로 그 뜻을 드러냈다. 주교는 두 명의 선교사와 함께 사목방문을 하는데, 두 명의 선교사는 말과 마부를 가졌다. 그러나 주교의 복사와 지역 선교사의 복사는 걸어서 동행했다. 신자들의 봉헌물이나 공소돈은 그 지역 선교사만이 받았다.

이러한 공소돈은 다른 말로 ‘애긍전(哀矜錢)’, ‘명하전(名下錢)’, ‘판비전(辦備錢)’, ‘공소예납전(公所例納錢)’으로도 불렸다. 이외에도 ‘촛대전’, ‘예납통문전’ 등도 있었다. 사실 이러한 비용들이 교무금 형태의 근간을 이루었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신자들에게 한국 신부들의 생활비를 부담시키는 데에서부터 교무금 납부가 시작되었다.


교무금 의무화와 그 변화

우리나라 교회초기에는 교무금 제도가 없었다. 1912년 발간한 『대구대목구 사목지침서』에도 교무금에 관한 언급은 없다. 1920년 참사위원회에서 ‘신자들의 운영비 봉헌의 규정’을 정했으나 이는 고정적인 교무금과는 다른 것이었다. 다만 교회는 늘어나는 경비를 영정기금, 기부금 등이나 토지수확에 의존했다. 또 선교보조금 등으로 토지를 매입해서 소작을 주어 그 소작료로 보충하고자 했다. 그러나 영정미사나 특별기부는 흔하지 않고 그 액수도 많지 않았다. 당시의 신자들은 각자의 본당을 위해서는 일정한 액수를 부담했지만, 교구 전체의 살림에 협조하는 것은 예외적인 일로만 여겨왔다.

1920년대 이후 조선교회는 선교회나 교황청 포교성의 보조가 줄어들어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1931년 조선 5개 교구 주교회의가 열렸다. 이 주교회의 때에 비로소 한국교회는 교무금을 의무화하기로 결정했다. 이듬해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조선의 개신교회가 외국교회로부터의 종속에서 자립했듯이 우리도 노력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가 헌금해야 한다.”고 했다. 한편 교회는 이때까지 필요한 비용을 경우에 따라 모았는데, 그때마다 일본 경찰의 허락을 맡아야 했다. 교무금으로 그런 규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트게 되었다. 교무금은 농업이 중심인 때라 추수 때 한 번에 일 년치를 내던가, 춘추판공으로 두 번, 또는 일 년에 네 번 나누어 내기도 했다.

1936년부터는 매년 교무금 통계표가 작성되었고 사용내역이 보고되었다. 물론 돈은 늘 모자랐다. 이러한 돈은 전교회의 보조금으로 채워졌다. 1938년 새로운 전쟁의 기운을 느낀 교회에서는 그해 일 년간 『경향잡지』 사설을 통해 교무금 실시에 대한 사례들을 들며 그 필요성을 역설했다. 당시 조선 신자들이 납부한 교무금을 집계하여 그 돈으로는 교회 경상비용의 3분의 1도 감당할 수 없음을 수치로 보여 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거의 백 년 동안 조선 교회를 유지하는 물질적 기초는 조선 안에 있지 않고 외국인의 손에 있었음을 상기시켰다. 그 돈도 쌓아 놓은 것이 아니고 신자들이 아끼고 모은 그때그때의 푼돈임을 기억하고자 했다. 이때 조선에서 교무금 부담 성적이 제일 좋은 성당은 왜관이었고, 그 다음이 대구 계산성당이었다. 교구별로는 대구교구가 1인당 평균 교무금이 가장 높았다. 그러나 이것도 당시 개신교 신자들 헌금 평균의 2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숫자였다. 얼마 안 있어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교회는 더욱 어려워졌다. 『경향잡지』는 교무금은 천주님의 집안일에 쓰시라고 우리가 천주님께 드리는 것이라면서 교무금이 어떻게 쓰이는지를 알렸다. 이때 서울대교구에서는 각 가정마다 일 년 수입의 100분의 1을 헌납하도록 정했다.

교구는 상황에 맞추어 교무금을 운영해 왔다. 1946년부터는 교무금 등급제를 실시했고, 이듬해에는 교무금을 배로 올렸다. 한국전쟁 때에는 공산군에게 점령당했던 본당은 교무금을 면제해 주기도 했다. 2000년 대희년을 맞아서는 미납된 교무금을 전부 탕감해 주기도 했다. 현재는 한 달에 하루 수입은 주님께 드리자는 취지로 교무금을 정하고, 월납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와 같이 교무금은 시대에 따라 달리 적용되고 있다. 한편, 교황청 포교성의 보조금은 1990년대에 와서 완전히 끊겼고, 자립할 수밖에 없다.

교무금에는 늘 제기되는 문제가 있다. 그 액수가 적다고 한다. 교회지도자들은 조선의 교우들이 처음 시작부터 너무 남에게 의지해 왔던 폐해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들은 한국인 사제들로만 교회가 이루어졌을 때의 가난을 걱정하기도 했다. 우리의 전임 교구장들이나 사제들은 은인을 찾아 나섰다. 처음 교구설립을 했던 드망즈 주교, 6·25 전쟁 이후 교회재건을 힘썼던 서정길 대주교 등은 해외로 원조를 얻으러 나갔다. 이제는 우리가 타인의 은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교무금으로 전 세계 사람들의 품격 있는 은인이 될 수 있다.(*도움 : 이용길 교구 총대리 신부, 조광 「교무금의 기원」, 『경향잡지』, 교구공문집 및 참사회의록, 가톨릭신문, 교구100년사)

[월간빛, 2013년 12월호, 김
정숙 소화 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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