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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아름다운 순례길을 가다1: 길을 나서다 - 한옥마을에서 완주 송광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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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9-17 ㅣ No.703

'아름다운 순례길'을 가다 (1) 길을 나서다 - 한옥마을에서 완주 송광사까지


아름다움을 만나기 위해 450리 길, 그 길을 나섰다

 

 

- 신리 상관성당 마당에 아파트를 배경으로 서 있는 하얀 십자가와 피에타상, 그리고 야외 돌제대.

 

 

길을 나섰다. 180km, 450리 길이다. 최근 전라북도 지역 종교계와 지자체가 '아름다운 순례길'로 정한 그 길이다(평화신문 제1029호, 7월 26일자 보도). 전주 한옥마을-완주 송광사-천호성지-나바위성지-익산미륵사지-초남이성지-전주 한옥마을로 이어지는 길이다.

 

그 길을 걸었다. 올 들어 가장 무더웠다는 8월 중순, 12일부터 17일까지였다. 아직 안내 표지판이 설치되지 않았지만, '아름다운 순례길' 사업을 추진하는 한국순례문화연구원의 도움을 받았다. 연구원이 견본용으로 만든 안내 책자도 길잡이로 삼았다.

 

① 길을 나서다-한옥마을에서 완주 송광사까지

② 길을 배우다-천호로 가는 길

③ 길을 만나다-여산을 통해 나바위

④ 길을 묻다-미륵사지를 거쳐 초남이로

⑤ 길을 보다-다시 한옥마을로

 

순례를 시작하던 날, 전주 지역은 태풍 '모라꼿'의 영향으로 전날부터 비가 줄곧 내리고 있었다. 오전 8시 30분 한옥마을을 빠져나와 전주천변의 한벽당(寒碧堂)에 섰다. 치명자산이라고 부르는 승암산 기슭에 있는 누각이다. 조선 개국공신 최담이 1404년에 세웠는데, 바위에 부딪쳐 흩어지는 물이 시리도록 차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전주팔경 가운데 하나인 한벽당.

 

 

한벽당을 출발해 천변을 따라 걷다 보니 바로 치명자산 성지다. 산 정상에는 호남의 사도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그 아들 유중철(요한)ㆍ이순이(루갈다) 동정부부 순교자 등 순교자 7위 무덤이 있다. 승암산을 치명자산이라고 부르게 된 연유다.

 

 

200년 전 동정부부 묵상

 

200년 전 동정부부 순교자의 삶이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빗길을 걸으며 잠시 상념에 젖는다. 산자락을 끼고 전주천을 따르던 길은 잠시 들판으로 이어졌다 다시 천변으로 연결된다.

 

한벽당을 출발한 지 1시간 반쯤 지나 상관면 신리로 들어가는 월암교를 건넜다. 길 옆 복숭아밭에 걸려 있는 현수막, '눈물나게 맛있는 전주복숭아'란 표현이 재밌다. '눈물나게' 맛있는 복숭아 맛은 어떤 것일까.

 

신리 역을 지나 조금 더 가니 오른쪽으로 붉은 벽돌 교회 건물이 보인다. 신리성당(상관성당)이다. 성당 마당에는 흰 십자가와 그 아래 피에타 상 그리고 그 앞쪽 야외 돌제대가 아파트 단지를 배경으로 한폭의 그림을 이룬다. 피에타 상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다시 길을 따라 출발한다.

 

'O.K.CC' 가는 길을 향해 고가도로를 지나 다리를 건너 하천을 왼쪽에 끼고 천변을 따라 걷는다. 상관저수지로 향하는 길. 749번 지방도로와 만나고 저수지를 끼고 계속 걷는다.

 

정오가 지났다. 차들이 가끔씩 다니는 도로여서 길 왼쪽으로 걷는다. 땀과 빗물에 옷이 흠뻑 젖었지만 무덥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다만 등에 진 배낭이 조금씩 무거워옴을 느낀다. 피로감이 오는 거다. 갈아입을 옷가지 몇 벌과 세면도구, 여벌 샌들을 넣었을 뿐인데도 무게가 7kg나 나간다.

 

 

흐르는 땀방울, 작은 미소

 

완주 송광사로 가는 길에 펼쳐져 있는 벚꽃터널.

 

 

한 손엔 우산, 다른 손으론 흐르는 땀방울과 빗물을 연신 훔쳐내며 걷는다. 힘이 들어선지 무심해진다. 차도 무심하게 지나가고 나도 무심하게 걸어간다. 뒤에서 오던 차 한 대가 속도를 줄이더니 차창을 열어 손을 흔들어주고 간다. 정신이 번쩍 든다. 때론 작은 미소 하나가 큰 힘이 된다더니, 살짝 흔드는 손길에 그토록 고마움을 느낄 수가 없다. '저 분에게 축복을!'

 

상관면에서 소양면으로 이어지는 고갯길을 넘는다. O.K.CC 입구 삼거리에서 300여m를 더 내려가다 보니 오른쪽에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이명서(베드로), 조화서(베드로)ㆍ윤호(요셉) 부자, 정원지(베드로) 성인 등 병인박해 순교자들이 살았던 성지동이다.

 

30분쯤 더 내려가니 화심교차로 삼거리다. 왼편으로 화심교를 건넌다. 다리 건너 오른쪽 지방도로를 따라 20분쯤 더 들어가면 역시 병인박해 순교성인들인 정문호(바르톨로메오) 손선지(베드로) 한재권(요셉) 성인이 살았던 신리골이 나온다.

 

기록에 따르면, 병인박해 때 포졸들은 성지동 마을에서 신자들을 붙잡아 이곳 화심교차로 부근 구진 주막에 데려다 놓고 다시 신리골로 들어가 신자들을 체포해 구진 주막으로 끌고와 하룻밤을 샌 후에 모두 전주 감영으로 끌고 갔다.

 

옛 주막이 있던 길목이어서인지 화심삼거리에는 아직도 음식점들이 꽤 있다. 순두부집들이 대부분이다. 벌써 오후 2시 가까이 됐다. 음식점 한 곳에 들어가 순두부를 시켜놓고 물을 거푸 몇 잔 들이키고 나니 비로소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다.

 

박해 때 붙잡힌 신자들도 이곳 주막에서 하룻밤을 샜다. 이곳에서 신자들은 어느 때보다 긴 밤을 지새우며 자신들의 앞날을 생각했을 것이다. 순두부를 먹으며 생각한다. 6일 동안 계속될 이 순례길이 어느 정도나 힘들까.

 

신발끈을 고쳐매고 다시 길을 나섰다. 송광사까지는 8km 정도 남았다. '임실 치즈'의 주인공 지정환 신부가 세운 복지시설 '무지개가족' 앞을 거쳐 송광사 입구 벚꽃터널이 시작되는 마수교에 도착하니 오후 3시 30분이다. 피곤하지만 쉴 곳도 마땅찮다.

 

송광사 마당의 천진동자불.

 

 

계속 걷기로 했다. 2km만 걸으면 된다. 이 지방에서는 벚꽃 터널로 이름난 길이다. 그런데 하천 쪽 벚꽃나무들이 온통 잘려져 나갔다. 제방 보강공사를 위해 부득이하게 잘라냈다고 한다. 안타까움이 솟구친다. 잘라진 그 자리에 나무가 자라 다시 벚꽃 터널을 이루려면 얼마나 세월이 흘러야 할까.

 

 

산사에서의 휴식

 

상념 속에 마침내 '종남산송광사'(終南山松廣寺)라는 현판이 걸린 송광사 산문에 도착했다. 오후 4시 10분이다. 바로 옆 백련다원에서 따끈한 차 한 잔 시켜놓고 젖은 옷을 체온으로 말린다. 피로에 젖은 몸과 마음도 함께 말린다.

 

송광사는 산속에 있는 절이 아니라 산자락 끝 들판에 세워진 절이다. 신라 경문왕 7년인 867년 도의선사가 처음 세웠다고 한다. 절터를 찾아 남으로 내려오다가 이곳 물맛이 아주 좋아 더 남으로 내려가지 않고 절을 지었다고 해서 송광사 뒷산을 종남산이라고 부른다.

 

도영 주지스님을 찾아 인사한 후 산사에서 순례 첫밤을 신세지기로 했다. '템플 스테이' 용으로 지은 깨끗한 집이다. 가까운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와 씻고 나니 피로가 엄습한다. 하루 일과를 정리할 여력조차 없어 쓰러져 잠에 떨어진다.

 

[평화신문, 2009년 9월 6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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