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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생태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 4장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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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1-14 ㅣ No.723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18. 제4장 - 통합의 생태


① 생태의(자연) 환경요소, 경제요소, 사회요소

 

 

모든 것은 연결되어 상호 작용하고 있다. 우리가 직면한 재앙은 두 개의 별도의 재앙, 환경의 재앙과 사회의 재앙이 아니라 하나의 재앙이다.

맑은 정신으로 우리의 공동 가정(하늘, 땅, 물, 생명, 사람, 사회,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들은 보면 가히 ‘재앙’(위기)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회칙 제1장). 교회는 인류가 제기하는 고뇌에 찬 물음에 응답할 사명을 가진다. 하느님께 대한 교회의 신앙 때문이며(제2장), 게다가 “인류를 자멸하지 않도록 보호해야”(79항) 하기 때문이다.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회칙은 ‘십자로’에 도달한 인류가 가야할 길을 찾는 대화와 토론에 협력을 아끼지 않으려 한다. 교종은 재앙의 근본원인으로 윤리와 도덕을 무시하는 무차별적이고 일차원적인 과학기술주의와 과도한 인간 중심주의를 꼽으며, 실천적 상대주의와 고용의 문제, 새로운 생물학적 과학기술의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주목하고 그 윤리적 함의에 관심”을 기울이겠다는 뜻을 밝힌다(제3장).

이제 회칙은 재앙에 직면한 인류가 가던 무모함의 길을 잠시 멈춰 통합의 생태를 다시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제4장). ‘생태’라는 용어 그 자체로 이미 ‘통합’이란 의미를 담고 있음에도, ‘통합’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그만큼 재앙에 대한 우리의 의식과 접근 방식이 단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경계하기 때문이라 해석할 수 있다. 하나의 (통합) 생태는 (자연) 환경,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일상생활의 요소들을 갖고 있는데, 이 요소들은 불가분의 상호 작용을 하며, 인간 차원과 사회 차원을 분명하게 존중한다. 회칙이 강조하는 것을 요약하면서 우리 모습을 성찰한다.

생태의(자연) 환경 요소 : 자연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상호 작용뿐만 아니라, 사회의 체계들(경제, 행동양식, 실재를 파악하는 방식들)과 자연계들 사이의 상호 작용을 고려해야 한다. 자연은 사회와 분리될 수 없으며 단순히 사회의 무대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우리 역시 자연을 구성하고 있으며,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자연 생태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이 (자연) 생태계라는 실재를 기반으로 해서 살고 행동한다(139-40항 참조).

생태의 경제 요소 : (자연) 환경 보호는 발전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발전 과정을 통합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생태는 경제의 요소를 지니게 된다. 또 그 때문에 경제학은 경제 성장만을 위해 절차를 단순화하고 생산비용을 줄이고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좁은 시각에서 벗어나 상이한 여러 지식들을 함께 고려하는 인본주의를 따라야 한다. 즉 사람과 사회의 삶의 질을 높이고, 자연환경을 보전하는 경제가 되어야 한다(141항 참조).

우리도 어떤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환경영향평가라는 것을 시행해야 한다. 회칙은 이를 ‘환경충격평가’라고 부른다. 회칙은 이 충격 평가를 위해 연구자들의 합당한 역할, 다양한 연구의 상호 작용 촉진과 폭넓은 학문적 자유 보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우리의 이 환경충격평가는 대부분 ‘경제적 관점’에 철저하게 종속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대표적 사례로, 4대강 사업, 동계올림픽 경기장 건설, 핵발전소 건설, 케이블카 사업 따위를 들 수 있다. 백번 양보해서 경제 발전에 ‘유용’하다고 하더라도, 자연 환경이 갖는 본래의 가치들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이런 상황에서 ‘윤리 요소’를 고려한다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려운 실정이다.

생태의 사회 요소 : (자연) 환경과 사람의 삶의 질에 중요한 결과를 낳는 것은 사회 제도이므로, 생태는 필연적으로 사회(제도)의 요소를 갖게 된다. 가정에서부터 국제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 제도는 인간관계들을 규정하므로, 중요한 것은 모든 사회 ‘제도의 건전성’과 ‘유효성’이다. 낮은 수준의 건전성과 유효성(제도의 불안정함)은 불법의 일반화를 불러오는데, 회칙은 특히 이를 우려할 만한 현상으로 제시한다. 낮은 수준의 제도적 유효성은 소수에게는 혜택을, 절대다수에게는 고통을 안겨주고, 불법과 탈법의 일반화는 사람과 사회와 자연을 지속적으로 황폐화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142항 참조).

대표적 사례로 최근의 ‘노동 개혁’을 들 수 있다. 노동 개악이라는 비판을 받는 배경에는 제도의 건전성과 유효성에 대한 경험상의 회의가 자리하고 있다. 소수 기업의 경제적 수익을 보장하기 위해 절대다수 노동자의 삶의 질을 황폐화시킬 것이라 우려하는 것은 지난 수십 년 우리의 노동 정책(제도)이 (대)기업 편향적이었기 때문이다. 최근의 노동 개혁이 이른바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든다는 명분을 내세워 또다시 ‘노동’과 ‘사회’의 희생(양보)을 제도화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것은 바로 그 제도의 불건전성 때문이다. [평화신문, 2015년 11월 15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19. 제4장 - 통합의 생태


② 생태의 문화 요소



“문화적 정체성은 오랜 시기에 걸쳐 형성된 것이며, 사회적 구조들은 생활과 공동체의 의미에 대한 지역 공동체의 깨달음을 구체화한 것들입니다. 하나의 문화가 사라진다는 것은 식물이나 동물의 한 종이 사라지는 것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145항).

우리는 ‘문화’라는 말을 흔히 ‘예술 분야’ 정도에 제한하여 사용하려 한다. 대중매체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흔히 대중매체가 ‘문화’를 소개할 때 그 내용의 대부분은 음악이나 미술, 책이나 전시회 등에 관한 것이다. 이때도, 우리의 의식과 태도에 영향을 주는 프레임이 빈번하게 작동한다. 예를 들어 주류 문화와 비주류 문화,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로 구별하여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차별을 구조화한다.

그에 따른 폐단은 심각하다. 서열화를 가져오고 우월과 열등을 내재화시킨다. 대표적인 사례가 우리 사회의 ‘예능인’에 대한 태도라 할 수 있다. 너무나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도 대중을 향한, 혹은 대중에게서 분출된 예술을 가볍게 여기려 한다. 최근의 역사 교과서와 관련한 논란에도 그 같은 일부 집단의 우월적 태도가 반영돼 있다. 노동자와 시민의 삶을 이끌어 왔던 그 역동성에 대한 성찰은 찾아볼 수 없고, 이른바 ‘위대한(?) 인물’들이나 ‘거창한(?) 사건’에 대한 평가를 두고 시끄러울 뿐이다. 일제 강점, 한국전쟁, 근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 땅의 평범한 시민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를 공감할 수 있게 하는 ‘역사 교육’은 불가능한 것인가?

생태가 갖는 문화 요소: 교종은 ‘문화’를 그렇게 좁은 의미로 이해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문화는 한 공동체 안에 얽히고설킨 ‘관계’를 드러내는 양식이다. 나 자신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사회(공동체)와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그리고 더 나아가 하느님과의 관계, 그 관계를 어느 특정 공동체가 특정 시기에 구체화시킨 것, 그것을 문화라고 이해한다.

이렇게 보면, 모든 사람이 문화의 아버지(어머니)이며 동시에 문화의 아들(딸)이다. 그래서 회칙은 ‘자연’이 일종의 세습 재산이듯이, 문화 역시 ‘세습 재산’이라고 밝히면서, 그 세습 재산이 지금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고 우려한다. “문화는 우리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것 이상의 무엇입니다. 문화 역시 무엇보다도 살아있으며, 역동적이며, 참여적인 현재의 실재입니다. 문화는 우리가 인간과 (자연, 사회) 환경 사이의 관계를 재고할 때 배제해서는 안 될 실재입니다”(143항).

자연과 마찬가지로 이 문화라는 실재도 위협을 받고 있다. 그 증세는 문화의 ‘평준화’, 문화의 ‘획일화와 다양성의 약화’, ‘문화적 정체성 파괴’다. 삶의 생생함도, 역동성도, 참여성도 찾아보기 어려워지고 있다. 그러면 문화를 위협하는 것은 무엇일까? 회칙이 꼽는 인간적 원인은 ‘세계화된 경제 장치들이 조장하는 소비주의의 관점’과 ‘획일화된 규제와 기술적 개입들’이다(144항).

사실 우리는 문화의 황폐함을 목도하고 있다. 우리의 정치 문화를 예로 살펴보자. 정치는 인간의 존엄함을 증진시킴으로써 공동선 실현을 위해 ‘올바른 질서’를 세우는 활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활동을 오로지 ‘경제적 관점’에서만 바라보려고 있지 않은가? 인간의 존엄함이나 공동선이나 올바른 질서라는 숭고한 가치는 실종되고 오로지 ‘돈’과 맺은 관계에서만 바라보라고 내몰고 있지 않은가? 돈을 벌어들이는 사람은 존중하고, 돈이 드는 사람은 배제하려 한다. 선과 악의 식별 노력은 실종되고 특정 집단의 경제적 이익만 득세한다. ‘윤리 도덕적 질서’는 찾아보기 어렵고 ‘경제적 이해득실’만 유일한 기준이 되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수 십 년 전 이웃 나라 시민을 ‘경제적 동물’이라며 손가락질 한때가 있었다. 그 손가락질은 지금 어디를 누구를 겨냥하고 있을까! 시민 가운데 누구도 그런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되고 있을까? 저절로 그렇게 되었을까? 혹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필연의 과정일까? 아니다. 누군가 혹은 특정 세력이나 집단이 이 세상을 그렇게 만들고 있다고 봐야 한다. 회칙이 지적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의 세계화된 경제의 여러 작동 장치들은 사람을 소비주의의 관점에서만 보도록 부추깁니다(혹은, 세계화된 경제의 여러 작동 장치들은 사람들이 모든 것을 ‘소비’의 관점에서 보도록 부추깁니다)”(144항).

자신과 이웃과 사회와 자연과 그리고 하느님과 맺은 관계를 ‘돈’의 관점으로만 보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관계 양식으로서의 우리 문화를 두고, 건강한 문화라고 해야 할까? 병든 문화라고 해야 할까? 만일 병든 문화라면, 우리는 그 병을 치유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치유하지 않는다면, 더 중한 병을 다음 세대에 물려줄 것이다. 우리는 문화의 아버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회자되는 ‘금 숟가락과 흙 숟가락’에 관한 이야기를 그저 재기발랄한 말장난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화는 쓰고 버리는 소비재가 아니라 세습 재산이다. 당연히 물려줘야 할 실재다. [평화신문, 2015년 11월 29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20. 제4장 - 통합의 생태


③공동선의 원리 - 우리 모두에게 보낸 연대의 소환장, 사회적 약자를 우선적으로 선택하라는 소환장



교회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신앙인은 그다지 많지 않다. 신앙 생활 자체를 사생활의 정신적인 활동 가운데 하나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다 보니 성당 안과 밖의 생활 및 태도가 서로 전혀 관계없는 것으로 여긴다. 이런 이분법적 자세는 실제 사목 현장에서 만나는 대부분 교우들에게서 볼 수 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프란치스코 교종의 표현을 빌리자면, ‘삶에 덧붙여진 액세서리’ 정도의 무게를 지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우 탓이라 할 수 없다. 교회 책임이 무겁고, 무엇보다도 성직자와 수도자의 책임이 크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그렇게 ‘전승’했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폐막한 지 50년이 흘렀음에도 말이다.

그런 형편에서 교우에게 ‘사회교리’ 혹은 ‘공동선의 원리’는 용어조차도 생소할 수밖에 없다. “사회 집단들과 그 구성원 개인들이 자기완성을 보다 더 충만하고 쉽게 추구하도록 하는 사회생활 조건들의 총화”가 공동선의 원리다(156항).

사람이든 집단이든 그 나름의 올바른 목표가 있게 마련이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당사자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조건’이 좋아야 한다. 한 젊은이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직업을 구할 수 없으면(경제 조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으면(정치 조건), 사회와 적절한 관계를 맺을 수 없으면(문화 조건), 그가 꿈을 이룰 수 있겠는가? 가정도, 학교도, 기업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공동선이란, 집단이든 그 구성원이든 이런 사회생활 조건들이 제대로 마련된 상태쯤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 사회가 부단히 추구해야 할 목표라 할 수 있기에, 교회는 이 공동선 실현이 국가의 제1의 임무라고 가르친다.

우리 교회는 이 공동선의 원리를 사회 윤리의 중심 원리이면서 다른 원리들을 통일하는 원리라고 강조한다. 사실 ‘인간 존엄성의 원리’와 함께 ‘공동선의 원리’는 사회교리의 기본이 된다.

그런데 회칙은 이 공동선의 원리가 그리스도인과 인류에게 ‘연대의 소환장’,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의 소환장’이 되기도 한다고 피력한다. 사회생활의 조건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을 경우 누가 가장 고통스러울까? ‘인간 존엄함’과 ‘분배의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불의한 사회상황’에서 가장 힘들어하는 존재는 누구일까?

예를 들어보자. 우리 경제는 대외의존도가 높다고 말한다. 환율 변동에 기업들의 희비가 엇갈린다. 대기업은 충격에 견딜 수 있지만, 중소기업의 경우 휘청거리거나 쓰러지기 일쑤다. 가난한 가정에서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병환을 앓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경제적 부담으로 가정이 붕괴되고 다른 가족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은가?

사람들은 말할지도 모른다. 그건 그들의 문제이며, 그 문제에 대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말이다. 이런 태도에는 ‘내 것은 내 것이니까 나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라는 사유재산권과 그 처분권을 절대적으로 여기는 주장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교회 가르침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교회는 ‘지상 재화의 보편적 목적’과 ‘공동사용권’을 믿는다. 지상의 모든 재화는 모든 사람을 위해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것이며, 그 때문에 모든 사람은 지상의 재화를 사용할 권리를 갖는다는 가르침이다. 더 나아가 회칙은 교회의 사람들에게 ‘사회적 약자’에 대해 고마워해야 한다고까지 한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은총의 길이며, 공동선 실현을 위한 윤리적 명령이기 때문이다(158항). [평화신문, 2015년 12월 6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21. 제4장 - 통합의 생태


④ 세대 사이의 정의와 세대 안의 정의



‘어제 오늘 내일.’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말이다. 필자의 고교 시절 학생 동아리 이름이 YTT(Yesterday, Today, Tomorrow)였는데, 너무 멋진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 친구들 사이의 우정과 의리를 끝까지 지키자는 의미였을 것이다. 내용을 확장해서, 회칙은 이를 ‘세대 사이의 연대’라고 부르며 이 연대를 ‘정의의 기초 문제’로 다룬다(159항 참조).

이 가르침은 교종의 ‘시간이 공간보다 위대하다’는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겁게는 역사라는 실재라 할 수도 있겠다(79항 참조). 인류 역사의 무대에는 희망과 고뇌를 안겨주는 사건이 끊임없이 펼쳐지고 있다(시간과 과정). 특정 권력이 그 역사의 과정을 묶어둘 수도 없을뿐더러 조작하려는 것은 억지며 역리다(공간과 권력).

우리는 오늘 어떤 내일을 준비하고 있는가?(160항 참조). 혹시 내일은 내 삶과는 무관하니까 오늘 모든 것을 다 써버리고 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가계부채와 함께 공공부채라는 것이 있다. 중앙정부든 지방정부든 공기업이든 정치 공동체가 빚을 내서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빚이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일시적 위험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내일을 준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조건이 있다. 오늘 진 그 빚을 갚을 능력이 있어야 한다. 오늘 갚을 능력이 없을 경우, 자연스럽게 내일로 그 상환을 연기할 것이다.

그런데 연기했는데도 그 빚과 이자를 갚을 뾰족한 대책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또 빚을 내서 생활하면 된다고 쉽게 말할 수는 없다. 채권자가 무작정 연기해주지 않을 것이고 다른 데서 빚을 얻어 올 수도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를 부도라고도 하고 파산이라고도 하며 신용불량이라고도 한다. 만일 오늘의 우리가 빚을 내어 생활하고, 그 빚을 내일의 세대에게 갚으라고 한다면? 그것도 처분하여 갚을 담보물도 없다면, 내일의 세대는 오늘의 세대를 어떤 눈으로 바라볼까? 돈 이야기를 했지만,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자연이든 사회든, 내일의 세대에게 물려주어야 할 실재다. 좋은 것을 물려줄 수도 있고, 해로운 것을 물려줄 수도 있다. 교종은 공동선의 원리가 내일의 세대에까지 연장된다고 밝히면서 그 사례를 든다. “세계적 경제 재앙들은 우리가 공동 운명을 무시했을 때 반드시 유해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159항).

우리의 경우는 너무나 생생하다. 1997년 당시 정부는 국가부도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 IMF(국제통화기금)의 강력한 경제개혁 요구들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IMF 구제금융을 수용했다. 그 후 누군가는 ‘국가’ 경쟁력이 높아져 ‘선진국’ 대열 진입을 목전에 두고 있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시민 삶의 질 저하와 사회의 붕괴’(회칙 제1장 Ⅳ 참조)를 걱정하는 목소리는 점점 더 높아지고 있지 않은가.

회칙은 말한다. “우리가 물려받은 세상은 우리 다음에 올 사람들에게도 귀속되어 있다”(159항).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을 “순전히 실용적인 방식으로만” 바라보아, “효율성과 생산성과 개별적 혜택”에 맞추어 이용하려 든다.

우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4대강 사업, 핵발전소와 송전탑 건설, 케이블카 건설 따위가 다 그렇다. 그 같은 오늘의 우리 사업에서 “이 세상은 우리가 거저 받아서 다른 이들과 공유해야 할 선물”이라는 태도는, “환경은 각 세대에 하느님께서 빌려주신 것이며, 그 빚을 다음 세대에 넘겨주어야 할 것”이라는 자각은 찾아볼 수 없다.

회칙은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지구 최후의 날에 대한 예언들을 이제는 더 이상 경멸하거나 빈정거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오늘의 우리는 다가올 내일의 세대에게 엄청난 폐허와 황무지와 오염을 남겨두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소비와 낭비와 환경 변화 속도는 이미 행성의 한계 역량에까지 손을 뻗었습니다. 이미 그 자체로도 지속시킬 수 없는 우리의 현재 생활양식은 파국들을 재촉할 뿐입니다”(161항).

‘지구 최후의 날에 대한 예언들’과 ‘파국들’이란 표현에 거부감을 느끼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교종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 원인을 ‘근대 이후 세상 사람들의 광포한 개인주의의 모험’ 때문이라고 말이다. ‘즉각적 욕구 충족’에만 몰두하고, ‘미래(내일) 세대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오늘)우리의 무능력’과 ‘발전에서 배제된 이들을 고려하지 못하는 무능력’ 때문이라고 말이다(162항 참조).

그래서 회칙은 “미래의 사회적 약자뿐만 아니라, 오늘의 사회적 약자도 기억하자”고 호소하면서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급박한 도덕적 요구라고 가르친다. “이 지상에서 그들의(오늘의 사회적 약자의) 인생은 짧으며, 그들은 계속해서 기다릴 수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보다 더 공정한, 세대와 세대 사이의 연대 의식과 함께 같은 세대 내의 쇄신된 연대 의식이라는 도덕적 요구의 급박성이 대두됩니다”(162항).

회칙은 ‘생태’를 단순히 ‘자연 환경’의 문제로만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환경, 경제, 사회, 문화, 일상생활의 요소를 모두 담고 있는 인간적이며 사회적인 차원을 갖고 있으며, 인간 존엄함과 공동선의 원리와 재화의 공동목적과 공동사용권의 원리, 그리고 세대와 세대 사이의 정의와 연대와 세대 안의 정의와 연대의 원리가 모두 작동하는 그런 ‘통합의 생태’를 말하고 있다. [평화신문, 2015년 12월 13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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