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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 산책49: 신비 생활의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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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4-26 ㅣ No.792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 산책] (49) 신비 생활의 완성


자유를 포기할 때 진정한 자유 얻는다

 

 

신비 생활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특성들 중의 하나인 수동성은 우리 안에 현존하는 성령의 활동과 이끄심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그리스도교는 오랜 기간 성령의 현존을 잊고 살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과 고백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20세기 초 먼저 개신교회에서 불어온 ‘성령 쇄신 운동’이 1960년대 가톨릭 교회에도 불어왔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갈수록 두 교회는 성령의 현존을 어떻게 감지하고 인식할 것인가 하는 핵심 관점보다는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하는 부차적인 행동에 더 주목했습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독자들에게 권고합니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한 4,24). 그리스도인이 믿고 고백하는 하느님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기 때문에 하느님 현존을 체험하고자 하는 신앙인은 성령의 현존에도 함께 참여하게 됩니다. 입문 성사인 세례 성사와 견진 성사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聖殿)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본이 중요하고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을 세심하게 기억하는 신앙인이 많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1코린 12,7). 그리고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권고합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갈라 5,25). 그런데 각 교회 신자들은 바오로 사도의 다른 권고 말씀에 더 귀를 기울인 것 같습니다. “성령의 은사, 특히 예언할 수 있는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1코린 14,1). 그리스도인이 20세기에 불었던 성령 쇄신 운동에서 성령의 현존에 참여하는 효과적인 방법에 집중하기보다는 성령의 현존을 외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에 더 주력하려 한 것은 어쩌면 이러한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편협하게 이해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영, 즉 성령의 이끄심을 통해 참여하는 성령의 현존 체험은 비상한 은사를 통해 자랑하듯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 속에서 순명하며 다가가는 체험을 통해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 성령의 현존에 참여하는 대표적인 체험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정한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갈라 5,13).

 

그리스도인이 얻게 되는 자유는 통상적으로 사회에서 언급하는 투쟁으로 쟁취하는 자유 개념과 전혀 다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은총으로 주셔야 얻을 수 있는 자유입니다. 때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기꺼이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종이 되고자 하는 역설적인 개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 신자들에게 이러한 가르침을 강조했습니다. 사실 하느님 이외에 다른 신은 없으므로 우상에게 바친 음식이 있더라도 실제 먹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신앙심 강한 신자라도 만약 신앙심 약한 신자가 이방신을 위해 바쳤던 제사 음식을 먹는 것을 꺼린다면, 그들의 신앙심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런 음식을 함께 피하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것입니다(1코린 8,1-11,1 참조). 즉, 타인을 위해서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는 행동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진정한 자유이고 성령 충만한 행동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갈라 5,1).

 

신비 생활을 완성하기 위해 성령의 현존에 참여하는 방법으로 비상한 체험만 고집한다면 신비 생활을 완성할 수도 없고 하느님과 합일하는 체험도 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도록 우리를 이끄십니다. 결국, 신비 생활에서 수동성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끌려만 가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자세로 성령의 이끄심에 적극적으로 순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요하게 관상 기도를 실천하며 성령의 이끄심에 순명한다면 신비 생활을 완성할 것입니다.

 

[평화신문, 2016년 4월 24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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