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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국내 성지순례 현황과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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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7-09-22 ㅣ No.470

[순교자 성월 특집] 국내 성지순례 현황과 과제


거룩한 여정은 꾸준한 ‘관심과 기도’로 완성

 

 

성지순례에서 주님을 위한 작은 희생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때로는 무릎으로, 맨발로 어떤 것이든 좋다. 자기 나름의 희생을 담아 신앙선조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진정한 순례’ 속으로 빠져들어야 한다….

 

 

자동차를 저속기어로 바꾼다는 뜻의 ‘다운시프트족(downshifts)’. 고소득이나 빠른 승진보다는 저소득일지라도 여유있는 생활을 즐기면서 삶의 만족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여가생활이 우리 삶에서 점점 높은 위치를 차지함에 따라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 것이다. 여기에다 최근 주5일제가 크게 확산되며 시대가 요구하는 신앙생활의 모습도 변해가고 있다는 의견이 대다수다.

 

교회 관계자들은 이러한 현대사회의 흐름에 따라 가족과 함께 하는 신앙생활로서 ‘성지순례’를 추천한다. 순례는 할머니부터 어린 아이까지 모든 가족구성원들이 일상을 떠나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더 나은 성지를 위하여

 

지난해 충청남도는 대전교구의 성지 3곳을 지역 내 역사문화자원, 농산어촌체험마을과 연계해 관광코스로 개발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해당 성지는 솔뫼성지와 해미성지, 갈매못성지다. 도 관계자는 “지난해 도내 천주교 성지를 찾은 사람이 100만 명을 넘어서는 등 순례자 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성지에 대한 관심이 높다”며 “이 사업을 통해 천주교 성지를 전국적인 명소로 키워나가겠다”고 말했다.

 

전주교구도 전주시와 연계해 순례객들이 효과적으로 성지를 참배할 수 있도록 ‘성지순례 해설사’를 마련했다. 해마다 수만 명의 순례객들이 교구 내 성지를 방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지에 대해 설명해 줄 봉사자들이 부족했던 것이다.

 

해설사는 한국 천주교회사와 교구사는 물론 교구내 성지 관련 역사와 유물, 외국어 기초교육 등 다양한 교육과정을 거쳐 정확하고 해박한 지식을 갖춰야한다.

 

이렇듯 성지들은 지역사회와 연계하거나 자체적으로 ‘개발과 보존’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위해 애쓰고 있다. 성지가 가진 고유한 정신과 환경 등을 이어나가면서 가톨릭신자 개인과 가족, 나아가 지역민을 위한 다기능적 역할을 해내기 위해서다. 이밖에도 청량리~구학을 잇는 기차순례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원주교구 배론성지, 청소년·청년을 위한 기도생활체험학교를 열고 있는 수원교구 어농성지, 침묵기도 시간을 마련해 신자들의 영성생활을 돕고 홍보동영상도 제작중인 남양성모성지 또한 신자들을 위한 성지의 끊임없는 시도다.

 

하지만 개발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성지들도 많다. 현재 한국의 성지는 순교자들의 발상지와 탄생지, 유서 깊은 성당과 교우촌, 피를 흘린 순교지, 순교자·성인 묘소 등을 포함해 100여 개 이상이다.

 

문제는 이러한 성지들이 모두 ‘개발’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결국 개발된 성지는 계속해서 찾고 잊혀진 성지는 영원히 잊혀진 성지로 남게 된다.

 

지역공동체의 이익과 맞물려 관광자원과 연계하지 않는 이상 후원금 없이 자체적인 힘으로는 개발은 물론 ‘보존’도 어렵다.

 

가톨릭 신자에게 성가정을 이루게 하고 일반인들에게는 간접 선교의 역할을 하고 있는 ‘성지’에 많은 이들의 관심이 이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행사냐 순례냐 그것이 문제

 

지난 8월 19~31일 굿뉴스-가톨릭신문이 공동조사한 ‘성지순례 얼마나 자주 가십니까?’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중 44%가 성지순례를 ‘일년에 한번’, 21%가 ‘분기별(3개월)로 한번 정도’, 8%가 ‘한달에 한번’을 꼽았다.

 

73%라는 숫자의 신자들이 매년 성지를 찾고 있는 것이다. ‘거의 가지 않는다’라고 답한 27%에 비하면 적지 않은 숫자다.

 

문제는 신자들이 성지를 찾는 동기가 ‘순례’보다는 ‘행사’적 성격에 치우쳐있다는데 있다. 본당의 날이나 단체 단합대회 차원으로 성지를 찾고 있는 신자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바쁘게 짜인 프로그램에 시간을 맞추다 보면 순교자들의 삶을 성찰할 진지한 자세란 생각하기 어렵다.

 

‘행사적 성격’의 성지순례는 성지를 찾는 월별 순례자 그래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날씨가 비교적 좋은 4, 5월과 순교자성월인 9월, 묵주기도 성월인 10월, 입시를 앞두고 자식들의 대학합격을 기도하는 11월이 다른 달 보다 매우 높은 수치를 기록한다.

 

또 다른 경우도 있다. 신자 A씨의 예를 들어보자.

 

얼마 전 A씨는 본당단체 회원들과 함께 하루 만에 미리내성지와 죽산성지, 남양성모성지를 들르는 ‘순례’를 했다. 지난해와 같은 곳을 가려고 했지만 ‘지난번에 갔다 왔잖아. 거길 왜 또 가?’라는 성화에 다른 성지들을 골랐다.

 

하루 안에 성지 3곳을 서둘러 둘러보고 가는 도중에는 버스에서 노래도 했다. 점심은 구역단원들이 만든 불고기와 김밥, 과일, 통닭 그리고 약간의 소주도 겸했다. A씨는 성지순례를 통해 얻는 가장 좋은 점을 ‘신자들 간의 화합과 친교’라고 말했다.

 

실제로 우리는 순례를 떠나기 전, 일부 신자들이 성지 안 식당의 유무를 점검하고 근처 관광시설과 취사 가능여부, 돗자리를 펼 수 있는지에 대해 묻는 모습을 자주 본다. 순교자의 신심을 기리고 성지의 역사를 공부할 시간은 어디에도 없는 듯하다.

 

성지순례는 ‘하느님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다. 하느님과 닮은 인간의 모습을 간직하기 위해 존경하는 순교자를 찾아 나를 비추어보는 여행이다.

 

바쁜 일상에 치여 ‘하느님과 신앙’을 잠시 놓쳤을 때, 다시금 그분을 일깨워 주는 곳이 ‘성지’인 것이다.

 

이상각 신부(주교회의 이주사목위원회 성지순례사목 소위원회 간사)는 “성지순례가 진정으로 거룩한 여정이 되기 위해서는 신자들의 지속적 관심과 기도가 꾸준히 유지돼야한다”고 말했다.

 

 

우리에게 남은 숙제들

 

지난 8월 20~21일 주교회의 이주사목위원회(위원장 이병호 주교) 성지순례사목 소위원회는 올바른 성지순례문화 정착 방안을 위해 전국 성지소개를 홈페이지에서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도록 하고 성지소개 소책자 발간의 필요성에 대해 논의한 바 있다.

 

소위원회는 신자들이 쉽게 찾아갈 수 있도록 네비게이션에 통일된 양식으로 성지를 등재하고 유적지나 문화재로 등록해 도로안내이정표를 세우는 방안도 모색했다.

 

하지만 이러한 방안들이 모색으로 끝나지 않고 힘을 얻기 위해서는 신자들의 관심이 동반돼야 한다는 것이 자명한 사실이다. 성지순례를 친구들과 떠나는 화합의 장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순교자들의 영성을 전하고 개인 신앙생활의 한 부분으로 자리해야 한다는 뜻이다.

 

후세에 물려줄 순례의 참모습을 지켜내는 것은 우리들 개개인의 손에 달려있다. ‘단순히 먹고 마시기 위해 떠나는 성지관광이냐, 신앙선조의 신심과 얼을 배우기 위해 일어서는 성지순례냐’는 질문은 우리 마음에서부터 시작한다.

 

 

[인터뷰] 수원교구 남양성모성지 전담 이상각 신부

 

 

수원교구 남양성모성지 전담 이상각 신부(주교회의 이주사목위원회 성지순례사목 소위원회 간사)는 신자들이 실천하는 ‘머무름’의 솔선수범이 성지를 방문하는 일반인들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갈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성지에는 가족단위의 신자들에서부터 개신교 신자들, 인근 지역주민, 초.중.고학생들, 백화점 문화센터 수강생들까지 다양한 단위의 사람들이 찾아온다. 공원과 같은 녹지가 크게 부족한 우리나라에 ‘성지’가 쉼터와 사적지의 역할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많은 이들이 찾고 있는 성지는 존재하는 자체만으로도 하느님의 복음을 간접적으로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신부는 “신자들이 오랫동안 성지에 머무르며 조용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일반인들은 많은 것을 느끼고 간다”며 “성지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 복음 선포를 할 수 있는 새로운 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성지순례가 모든 신자들의 영성생활에 한 부분이 되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다. 성지 자체도 다양한 순례프로그램과 함께 변화돼야 하고 신자들도 순례의 중요성을 인식해야하기 때문이다.

 

순교자들의 정신을 따르기 위해서는 ‘희생’도 필요하다. 좋은 계절과 편의를 따라 성지를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대한 결단이 필요할 때, 삶의 무게를 느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민을 고백하고 싶을 때 성지를 찾아야하는 것이다.

 

때로는 무릎으로, 맨발로 어떤 것이든 좋다. 자신 나름의 희생을 담아 신앙선조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진정한 순례’ 속으로 빠져들어야 한다.

 

이신부는 “교회가 권장하는 대중적 신심이 성지에 봉헌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책과 다양한 홍보자료의 활용은 물론 신자들의 마음가짐, 성지 안 기도장소의 확보 등이 뒤따라야 한다”며 신자들의 지속적 관심을 당부했다.

 

[가톨릭신문, 2007년 9월 9일, 오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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