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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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현대 영성: 오늘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길 - 관상(이미 우리 곁에 계신 하느님의 신비를 발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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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2-26 ㅣ No.1768

[현대 영성] 오늘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길 


관상 : 이미 우리 곁에 계신 하느님의 신비를 발견하는 것

 

 

하느님과의 일치를 얻기 위해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과학과 실용주의가 팽배한 오늘날 세상 안에서 어떻게 관상적 삶을 살 수 있을까요?

 

1967년 12월, 관상 수도회 장상들이 미국 켄터키주에 있는 겟세마니 수도원에 모였다. 이 모임에서 한 수도자가 토마스 머튼에게 이렇게 물었다. “하느님과의 일치를 얻기 위해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머튼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그들이 이미 하느님과 일치되어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꼭 말해야 합니다. 관상적인 기도는 우리가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에 대한 의식을 깨닫게 해 줍니다. 하느님은 매우 가까이에 있습니다.” 머튼의 이 답변은 우리가 하느님을 멀리서 찾지 말고 이미 우리 안에 계시는 그분을 발견하고 사랑으로 깨어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삶을 살라는 가르침이다. 관상은 이미 우리 곁에 계신 하느님의 신비를 그분의 은총으로 발견하는 것이다. 영원의 차원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시간 속에 들어오셔서 이미 우리 곁에 계심을 생생하게 깨닫는 체험이 바로 관상인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다. 때때로 별다른 노력 없이 갑자기 관상을 체험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를 일깨우려 선택한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고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관상은 성령에 의해 하느님의 영역 안으로, 하느님의 자유 안으로, 하느님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때로는 관상을 통해 ‘하느님이 무엇인지를 더 이상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고통이 수반된다. 그 이유에 대해 머튼은 “하느님은 내가 알 수 있는 ‘무엇’이 아니며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순수한 ‘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나는 있다’입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관상은 하느님을 찾는 체험과 관련되어 있다. 하느님을 찾는 것은 잃었던 무엇을 찾는 것과는 다르다. 하느님은 모든 곳에 계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찾는 것은 내가 아는 모든 곳에 계신 하느님을 찾는 것과 다르다. 그리고 한 번 찾은 하느님이 하느님의 전부도 아니다. 그런데 관상을 통해 우리는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던 하느님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새로운 면을 찾아 그분을 알게 되는 것은 성경이나 이성 등의 밖으로부터의 앎이 아니라, 내면으로부터의 깨달음이다. 머튼은 관상에 있어 깨달음의 중요성을 『새 명상의 씨』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관상은 우리가 아는 것이나 알지 못하는 것을 모두 초월하여 압니다. 관상은 그 원천의 실재에 대한 깨어남입니다. 관상은 깨어남의 갑작스러운 선물이며, 그것이 실재(real)라는 모든 것 안에서 궁극적인 실재(the Real)를 깨닫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자신 안에 계시다는 깨어남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 관상은 외적이거나 표면적인 것으로부터 내적이고 영적인 것으로의 의식의 전환을 요청한다. 우리 내면의 세상 안에서 궁극적인 실재인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 존재의 표면적 수준 아래를 파고 들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실재의 다른 측면이나 더 깊은 단계에서 하느님과 자아와 창조물을 새롭게 바라보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문화는 속도, 생산성, 이익, 외적인 것들을 강조하고 있어 깊은 내면의 영역이나 영적인 체험의 영역에 도달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내면의 세상으로 들어가 자신의 자아를 바라보며 그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것을 한가한 이들의 사치(?)이거나 비생산적이고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외적이고 표면적인 허상을 좇으며 살아가던 어느 날 자신의 내면에 찾아온 공허감과 감당하기 힘든 외적·내적 고통, 혹은 거부할 수 없는 죽음 앞에 우리는 결국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이렇게 하느님의 때가 되었을 때 우리는 이미 우리를 찾고 계신 하느님, 이미 우리와 함께하고 계신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쌓아 놓은 그 모든 것이 무너지는 날, 우리는 자신을 더 큰 사랑으로 받아 주시는 어진 아버지 하느님, 우리를 따뜻한 당신 품에 안아 주시는 어머니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나 자신이 하느님을 찾았고 그래서 그분을 만난 것이 아니라, 이미 그분은 늘 자신과 함께하고 계셨음을! 다만 자신이 눈이 어두워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음을!

 

[2022년 2월 27일 연중 제8주일 가톨릭마산 2면, 박재찬 안셀모 신부(분도 명상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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