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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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1970년, 산간학교 씨앗이 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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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8-16 ㅣ No.606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여름에 만난 하느님 - 1970년, 산간학교 씨앗이 날리다


옥수숫대 사이에서 젓가락을 하나씩 씻는 친구의 얼굴이 갑자기 멋있어 보인 순간이 있다. 개천에 빠지면서 선배의 따뜻한 손을 느낀 적이 있다. 늘 부르던 성가인데 오늘따라 눈물겹고, 낯선 잠자리 뒤에 맞은 새벽 햇살에 모든 기도가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밤하늘로 번져 나간 캠프파이어로 하나가 되었다. 그런 추억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6.25 한국전쟁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산간학교는 대구대교구에서 처음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고, 뉴욕 한인성당 등에서도 호응을 얻었다. 그것은 공간적으로 확대되었을 뿐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힘찬 태동이었다.


씨앗이 땅을 들추고 나오다

좋은 것으로의 소망은 여러 사람이 품기 마련이다. 1970년 대구대교구에는 산간학교의 기대가 자라고 있었다. 1970년 경북 청도군 동곡에서의 고등부 하계 야외피정은 이러한 가능성을 부채질했다. 이런 움직임이 모여 교구 산간학교가 출범했다. 1971년 고등부 연합회 지도신부단은 여름 산간학교를 시작하기 위해 지도자 양성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1971년 3월 29일, 계산동 효성유치원 강당에서 매주 월요일 2시간씩 3개월 과정의 지도자 학교가 열렸다. 교육 내용으로는 후배들을 상담할 수 있는 기초자질을 키우는 일이 중심이었다. 그리고 야영기술 및 응급치료법, Sing-along과 레크리에이션 등을 이끌 수 있는 심신지도자를 위한 과목으로 구성했다. 그룹토론법은 박홍 신부, 캠프교리교수법은 이성우 신부, 레크리에이션 강습을 맡은 이는 YMCA 지도자, 야영기술은 한국산악회 지도강사, 그룹지도법은 장갑득 선생, 응급치료 능력은 대구적십자사에서 파견한 의사가 맡아서 교육했다. 이 지도자 학교에는 13개 본당에서 130여 명이 응모해서 80명이 수료했다.

지도자교육 수료식에는 서정길 대주교를 비롯한 교구 내 주요 성직자들 외에 대구시장, 경찰국장 등도 참석했다. 이때 서대주교는 축사에서 교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이러한 돌출된 계획자가 자주 나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지도자학교를 수료한 사람에게는 청소년지도자 자격증을 주었고, 경찰국장과 협의하여 당시 존재했던 야간통행금지에 적용받지 않는 특전을 부여했다. 교구에서는 그해 여름 바로 이 수강자들을 중심으로 “희망의 인간”이란 주제로 산간학교를 실시했다. 10개 본당의 초등학생 34명을 포함한 876명의 학생들이 참가했다. 이로써 산간학교 시대의 막이 올랐다. 당시 계산동성당 보좌이며 고등부연합회 지도신부였던 박웅근 신부가 이 일을 담당했다.


젊은이들 자연을 터치하다

들판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모든 생활조건을 자연에 내어 맡기는 일이다. 그것이 바로 인류가 거쳐 온 길을 체득하는 방법이고 또한 ‘하느님의 속삭임’인 자연을 만나는 길이다. 산간학교는 잠자리 마련, 식사준비, 생활의 정돈 등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기회였다. 그러나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위해 텐트는 교사나 신학생들이 미리 가서 쳐놓기도 하고, 식사도 반찬만 각자 싸가지고 가고, 성모회가 나가서 밥을 해주기도 했다. 계산동성당에서는 홍 데레사, 박 논나 등이 밥을 지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간이화장실을 써야 했고, 모기에 물리는 등 편한 생활은 아니다. 학생들은 산간학교가 끝난 뒤 다시는 가지 않는다며 집에 들어섰다. 하지만 바로 다음 달부터는 산간학교 프로그램에 설레곤 했다. 그렇지만 산간학 교의 장소를 물색하는데 어려움이 컸다. 학생들은 자연 체험이라는 입장에서가 아 니라 새로운 장소를 보고 싶어 했다. 낙동강변, 공소, 폐교 등 곳곳을 찾아 누볐다. 끝이 안 보이는 관광버스 행렬의 대인원을 수송하기 위해 교구에서는 관계기관에 협조 공문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다가 교구에서는 1980년 성주에 가천청소년수련원을 개설했다. 1,2,3 캠프장을 갖춘 이 수련원은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의 원조로 건립됐다. 이곳은 전 학년을 대상으로 연중 교회교육을 실시할 수 있었던 장소였다. 허연구 신부가 전담하여 이곳에서 산간학교가 이루어졌으며, 때로는 겨울 산간학교도 진행할 수 있었다. 가천청소년수련원은 1997년 8월에 1차 폐쇄되었는데, 이후 허연구 신부의 노력으로 다시 재개원 했다. 그러나 현재 이 건물은 다시 지어져 가천성당 문화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 너를 새로 보았네

산간학교는 자연을 다시 체험하는 것 외에도 만남의 장이다. 자신과 만나고, 잠시 떠나온 부모와 새롭게 만난다. 그리하여 1971년도에 진행된 산간학교 프로그램에는 우체통 운영이 있었다. 첫날 짐을 풀고 부모님께 편지를 쓰고, 또 산간학교가 끝날 때쯤에는 자신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실제로 부모의 면회시간도 마련했다. 이 면회는 정해진 날, 엄격한 통제아래 이루어졌다. 일찍 도착한 학부형도 점심시간까지 기다렸다. 혹시라도 부모가 오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부모와 학생은 개별적으로 만나지 않고, 서로 집단으로 만나도록 배려했다. 또한 학부형이 가져온 물건이 있으면 이를 전체에 나누어 주었다. 물론 산간학교는 그 기간 동안 생활을 함께 한 사람들과 의 만남을 지속시켰다. 교사와 학생이 친해지는 시간이었고, 교사들끼리 동료애를 발휘하는 시간이었다. 또 연합 으로 실시되었을 때에는 타 본당 학생들까지 친해질 수도 있었다. 제1회 산간학교에서는 본당 경연대회인 산간 올림픽이 계획되었다. ‘희망 의 인간’을 주제로 하여 각 본당이 10분 가량 기량을 발휘하도록 했다. 본당들 간에 선물도 교환했다.

지도자들은 젊은 학생들의 야외생활이므로 사고 예방을 위해 특별히 노력했다. 사고예방을 위해 대신학생들은 야간순찰을 돌았다. 참가하기 직전에 예방접종을 하라는 공지도 했고, 발전기로 원시적 하천변에 불야성을 만들어 산간학교 방송국을 운영했다. 스피커 세 개의 방송국이었지만, 제1회에서는 곽길우 신부가 담당했다. 그의 구수한 입담과 부드러운 팝송가락을 아직도 많은 이들이 기억한다. 미사로 하루가 시작되었고, 학생들은 식사당번 같은 일도 서로 하려고 나섰다. 청소년 인격양성을 위한 짧은 영화 상영은 몇몇 청소년들의 인생을 바꾸기도 했다. 참가 학생들은 매일 일지를 적었다. 일지용지는 프린트를 해서 나누어 주었는데, 그 속에는 만화를 그려 넣어 재미있게 만들었다. 만화는 박후근이 그렸다.


하느님, 나의 여름 하느님

하느님은 어디에서나 늘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나 새로운 국면을 만듦으로써 새로운 각도로 하느님을 체험하고자 하는 것이 산간학교이다. 제1회 산간학교 진행자들은 특별한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마지막 날 저녁 ‘십자가의 길’을 주제로 한 공연을 기획했다. 참가한 본당에 14처의 각 처를 할당해 주고 해당 본당이 무대를 꾸몄다. 연극, 소극, 코미디, 뮤지컬 등 각 본당 학생들이 스스로 기획하고 각본을 만들어 진행했다. 계산동성당 학생들은 그때 제4처를 맡았다. 이때 이들은 ‘가지 마오.’라는 유행가를 개사해서 뮤지컬로 무대를 진행했다. 제15처는 캠프파이어로 마무리되었다.

내일의 주인인 청소년들은 하느님과 자연, 그리고 서로를 일체 속에 경험했다. 물론 모든 행사는 하느님의 자녀답게 진행되었다. 행사를 끝내고 정리도 학생들이 했다. 다만 뒷마무리는 신학생들이 수고를 했다. 캠핑장에 훼손이나 오염이라도 남겼을까봐 검열을 왔던 면장과 파출소장은 쓰레기 한 조각 남기지 않고 깨끗이 정돈된 현장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들은 산간학교의 신선한 충격을 잊지 않기 위해 신문을 발행하고, 부모와의 만남을 주제로 한 책자도 펴냈다. 행사 후, 산간학교에서 수고한 대신학생들에게는 울릉도 여행을 주선했고, 솔선수범한 학생 40여 명은 왜관수도원 피정의 기회를 주었다. 당시 서울대교구 학생지도신부였던 오태순 신부는 대구까지 와서 이에 대한 정보를 얻어가 실천했다.

그후 교구에서는 작은 단위의 산간학교를 지향했다. 1972년부 터 대주제는 연합으로 정하고 산간학교는 본당 단위로 열었다. 허연구 신부는 대안성당과 하양성당에서 산간학교를 시작했고, 곽길우 신부는 동촌성당의 산간학교를 시작했다. 허연구 신부는 “짐을 잔뜩 실은 손수레를 청소년들이 직접 끌고 산과 강으로 나갔는데, 매년 산간학교가 열릴 때쯤이면 100여 명의 참가자들이 이끄는 손수레 행렬은 장관이었다.”고 하양성당의 산간학교를 회상했다. 간혹 연합산간학교를 시도하기도 했으나 1977년 이후에는 주제도 각 본당이 정했다. 1980년부터는 산간학교를 중·고등부로 나누어 진행했고, 초등부도 참가시켰다. 1982년에는 최홍길 신부가 경산성당에서 가족캠프의 형태로 산간학교를 시작, 새로운 모델이 되었다.

산간학교는 체험의 기회를 마련하는 것일지 모른다. 3박 4일 혹은 4박 5일에 온갖 내용을 다 실천하려는 욕심은 오히려 이 기회의 감동을 약화시킬지 모른다. 연차적 계획의 장기플랜을 짜서 한 번에 한 가지라도 제대로 체험시킬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한 것 같다. 체험이란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여는 것과 같아서, 한 번만 문을 열면 자신이 찾아 걸어 들어가기 때문이다. 교구의 산간학교 창설 때의 열정과 탐구심이 늘 살아있다면 많은 이들이 그 안에 추억을 보태갈 것이다.(도움 ; 청소년국, 월간 〈빛〉 1984.7, 곽길우 신부, 전헌호 신부, 최시영 신부, 허연구 신부, 류지헌, 민원기, 임우영)

[월간빛, 2013년 8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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