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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조선을 밝힌 여성 순교자 이순이: 주체적으로 동정생활 선택한 주님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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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7-09-21 ㅣ No.468

[조선을 밝힌 여성 순교자] (2) 이순이 - 주체적으로 동정생활 선택한 주님의 딸

 

 

"…9월에 시댁에 와서 10월에 우리 두 사람은 동정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4년을 오누이처럼 지냈습니다. 그런 중에 육체적 유혹을 근 십여 차례 받아 하마터면 동정서약을 깰 뻔 했어요. 그 때마다 저희는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겪으신 고통과 피를 흘리신 사랑에 의지하여 무사히 그 유혹을 이겨냈답니다.…"

 

이순이(루갈다, 1782~1802)가 순교하기 직전 옥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다. 결혼을 하고서도 동정(童貞)을 지키며 이순이와 오누이처럼 지낸 남편은 유중철(요한, 1779~1801).

 

육체적 유혹을 물리친 채 동정을 지키다 순교한 이순이ㆍ유중철은 세계교회사에서 드문 동정 순교자 부부이다. 이순이가 옥중편지에 적은 대로, 동정 부부로서의 삶은 십자가에서 고통받고 피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적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순이는 또한 당시 남성 중심 유교사회에서 여성의 독자성을 일깨운 선각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송종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는 "다른 그 무엇보다 자신의 신앙을 위해 주체적으로 동정을 선택하고 또 남편에게 맹목적으로 순종한 것이 아니라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 동정을 지키기로 약속하고 실천한 점은 당시 일반 여성들의 의식을 뛰어넘는 선구적 행동"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어린 시절

 

이순이(李順伊)는 1782년 서울에서 아버지 이윤하(마태오)와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수광의 8대손이며, 외할머니는 성호 이익의 딸이다. 어머니는 권철신과 권일신의 누이동생이다. 이처럼 그의 본가와 외가는 대대로 높은 벼슬을 했던 남인 세족으로, 천주교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집안이었다.

 

이순이는 1784년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온 직후 아버지가 세례를 받을 때 함께 세례를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1793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부터는 어머니에게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비록 몸은 약했지만 신앙생활 만큼은 빈틈이 없었다.

 

이순이는 14살 되던 1795년에 주문모 신부에게 첫영성체를 했다. 나흘 동안 두문불출하며 첫 영성체 준비에 전념한 끝에 교리시험을 무난히 통과하고 4월 5일 첫 영성체의 기쁨을 맛보았다.

 

 

동정, 유중철과 인연

 

이순이와 유중철은 겉으로는 부부지만 평생 오누이처럼 살아가기로 약속하고 혼인을 했다.

 

 

이순이와 유중철이 일찍부터 동정생활을 하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사실 갑작스런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독창적 신념에서 나온 생활방식이라기보다는 성경과 복음적 권고에 따른 선택이었다. 당시 신자들이 공소 예절서로 사용하던 「성경직해」와 「성경광익」 그리고 윤리생활 지도서였던 「칠극」과 기도서인 「천주성교일과」는 동정생활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고, 그 결과 동정생활은 한국교회 초기부터 하나의 신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동정생활은 특히 여성 신자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졌는데, 혼자 사는 사람은 오매불망 천주의 일에만 헌신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주문모 신부 입국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영성체를 통해 그리스도와 한몸이 된다는 의식이 깊어지면서 동정의 의미는 한층 더 승화됐다.

 

1797년 어느 날, 이순이는 어머니에게 동정생활을 결심했다는 뜻을 고백했다. 딸의 결정이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긴 어머니는 어렵사리 승낙을 했고, 승낙을 얻은 이순이는 곧장 주문모 신부에게 달려가 자초지종을 말하고 도움을 청했다.

 

그때 주 신부 머리에 떠오른 이가 유중철이다. 2년 전 전주 유항검의 집에 머물 때 유항검의 아들 중철이 아버지와 주 신부에게 동정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밝혔기 때문이다.

 

주 신부는 두 사람이 동정을 지키며 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한 끝에 혼인을 맺어주기로 했다. 건강한 처녀 총각이 결혼을 하지 않고 산다면 천주교의 동정 교리를 아는 사람들에게 천주교 신자로 의심받기 십상이고, 결국에는 화가 닥칠 것이 뻔한 상황이었다. 이순이와 유중철의 신앙과 사람됨을 신뢰한 주 신부는 두 사람을 부부로 맺어줘도 오누이처럼 지내며 동정을 지킬 것으로 믿은 것이다.

 

 

동정부부 생활

 

마침내 1797년 10월 이순이의 집에서 혼사가 치러졌다. 겉으로는 부부지만 실제로는 오누이처럼 살기로 약속한 결혼식이다. 신랑은 열아홉, 신부는 열여섯이었다.

 

1년 동안 친정에 있다가 이듬해 9월 전주 초남리 시댁으로 간 이순이는 첫날 밤 어려서부터 꿈꿔오던 생활이 비로소 이뤄졌다고 유중철과 함께 기뻐하면서 이 은혜를 굳은 신심과 철저한 실천으로 보답하자고 맹세했다.

 

부인으로서 덕에도 충실했다. 매사 찬찬하고 자상했으며, 시부모와 남편에게 공순했다. 이순이의 이러한 덕행은 천주교를 믿지 않는 초남리 사람들 입을 통해 지금까지도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다.

 

육욕을 참는 것은 예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부는 기도와 묵상을 통해 육신의 욕망을 극복했다. 이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자기 극복으로 이어진 영신 수련의 삶이었다. 두 사람의 가정이 곧 수도원이었고, 순간순간이 유혹과 투쟁하는 수도생활이었던 셈이다.

 

전주교구는 이순이ㆍ유중철 동정부부의 삶과 신앙을 본받고자 매년 치명자산 성지에서 요한ㆍ루갈다제를 열고 있다. 사진은 요한ㆍ루갈다제의 한 장면.

 

 

순교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유중철은 이른바 대박청래(大舶請來) 사건에 연루됐다는 죄목으로 체포됐고, 10월 9일 전주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유중철의 시신에서 이순이에게 보내는 편지가 발견됐다. 유중철은 이 편지에서 "나는 누이를 권면하며 위로하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고 적었다. 유중철이 끝까지 이순이를 누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그들의 철저한 동정생활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이순이도 편지에서 남편을 '충실한 벗(忠友)'으로 불렀다.

 

죄수의 아내로 유배형을 받은 이순이는 전주 감영에 들어가 "우리들은 천주를 공경하니 국법대로 죽어야 마땅합니다. 저도 제 집안 식구들처럼 천주를 위하여 죽기를 원합니다"라고 청했다. 관헌에서 이를 들어주지 않아 귀양길에 올랐던 이순이는 100여 리를 갔을 무렵 갑자기 유배형이 취소됨에 따라 다시 전주로 와서 옥에 갇혔다. 이때 이순이는 "하마터면 치명(致命)의 큰 은혜를 받지 못하고, 평생 죄인으로 살 뻔하지 않았겠는가?"라는 생각에 한없이 기뻐했다.

 

이튿날 심문을 받는 자리에서 이순이는 하느님을 공경하며 죽기를 원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순교를 '더할 수 없는 은총'으로 굳게 믿은 이순이가 그해 12월 요서(妖書)를 선전했다는 이유로 사형판결을 받은 것은 분명한 신앙고백으로 자초한 죽음이었다.

 

1802년 1월 31일 전주 숲정이 형장으로 끌려간 이순이는 망나니가 관례대로 그의 옷을 벗기려 하자 "내가 비록 네 손에 죽기는 한다마는 어찌하여 감히 내 몸에 손을 대려 하느냐"며 품위있게 꾸짖고는 스스로 윗옷을 벗었다. 이순이는 편안한 모습으로 참수(斬首)당했는데, 잘려진 목에서 젖빛 같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고 전한다. 갓 스무살이었다. 유해는 전주 제남리 바위백이에 가매장됐다가 1914년 4월 부활절에 전주 중바위산에 가족 유해와 함께 이장됐다. 이후 이 산은 치명자산(致命者山)으로 불리게 됐다.

 

 

옥중 편지

 

이순이는 옥에 갇혀 있을 때 친정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을 위로하고자 두 통의 편지를 썼다. 이 편지들은 1802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큰오빠 이경도(가롤로)가 순교 전날 어머니 권씨에게 보낸 편지, 1827년 전주옥에서 옥사한 동생 이경언(바오로)의 일지 등과 합쳐져 「루갈다 초남이 일기남매」라는 제목으로 필사돼 전해 내려온다.

 

이순이의 편지는 문장이 아름답고 깊으며 수식과 표현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호소력이 강하고 교훈적이며 정확하고 기품있는 문장으로 알려졌다. 이순이는 편지에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또 진정한 효는 하느님께 대한 순명(順命)이라고 했으며,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기본 관계를 '효(孝)의 영성'으로 표현했다.

 

아울러 "모든 도덕을 구함이 좋으나 그 중에 으뜸은 신망애(信望愛) 삼덕이니 이 삼덕이 영혼에 참으로 들어가면 다른 모든 도덕이 절로 따르리라"며 신망애를 중시했다.

 

[평화신문, 2007년 9월 9일, 남정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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