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강론자료

연중 27 주일-나해-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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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3-10-03 ㅣ No.505

연중 27 주일 (나해)

 

        창세기 2,18-24    히브리 2,9-11    마르코 10,2-16

    2003. 10. 5. 퇴계원.

 

한 주간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전교의 달, 첫 번째 주일입니다.

흔히 가을을 가리켜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 합니다만, 올해만큼은 그 말이 적당하지 않은 때인 듯 합니다.  기후가 바뀌었다는 소리도 합니다만, 내 주변에 아픈 상처를 겪고 있는 분들이 많아서 하늘은 높아보여도 그것이 기쁨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이런 때에 우리가 아픔을 겪고 있는 분들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진정한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질문은 제가 공동체 앞에 합니다만, 응답은 개인적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독서와 복음의 말씀은 ‘서로 돕고 사는 공동체’를 위하여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자세에 대한 것입니다.  성당에 와서 이 시간에 듣는 소리는 늘 우리가 올바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 말을 여러 번 들었는데도 세상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 듯 합니다.  그것은 말로 듣는 것이 다르고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물질을 중시하는 세상이 될수록 사람들 사이에서 봤던 좋은 모습들은 사라집니다.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풍조가 그러니 나 하나쯤 거기에 합류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고 할 것입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좋지 않은 것은 따르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너희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져서, 너희의 마음이 바뀔 가능성이 좀처럼 보이지 않기에 그런 규정을 정해준 것’이라는 소리는 분명 서글픈 소리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소리 앞에서 우리는 가끔씩 ‘계란으로 바위라도 쳐봐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만 그 일이 분명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내 몸이 터지고, 생채기가 나고, 곪아터지는 아픔을 견디기 힘들고 때로는 빨리 죽기가 싫은 이유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려운 일들에 대해서 내 탓은 아니라고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는 세상의 변화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게 말만 횡행하는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야기하는 것은 참으로 큰 모험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필요한 것은 ‘너와 나의 관계에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서류 한 장’이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렇게 행동하려고 합니다.  왜곡된 시선으로 예수님께 질문하는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은 함께 살라고 하는 뜻으로 동물들도 짝을 맞춰주고 사람도 남자와 여자로 살게 해주었지만, 언젠가부터 하느님이 맺어주신 삶의 공동체는 경쟁관계로 바뀌고 말았다는 것은 서글픈 일입니다.

 

내가 준비한 물건으로 내 몸과 생각을 가리는 일이 반복될수록 세상은 서로를 알 수 없는 요지경이 되고 맙니다.  우리의 형제,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삶의 가르침과 진리를 우리가 멀리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내가 하느님의 뜻을 멀리하면 할수록 내 삶이 자유롭고 편안하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길을 간다는 것을 잊어서는 곤란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은 분열이나 소외가 아니라, 공동체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의 삶이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사는 것, 서로 돕고 기도해주며 사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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