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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조선을 밝힌 여성 순교자 강완숙: 조선교회 첫 여성회장 6년활동에 신자 급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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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7-09-21 ㅣ No.467

[조선을 밝힌 여성 순교자] (1) 강완숙 - 조선교회 첫 여성회장 6년활동에 신자 급증


불행한 가정... 교리서 구해 읽고 믿음 가져, 위험에도 주문모 신부 영입 활동 도와

 

 

- 지난해 1월 국립국악원에서 공연한 한국가톨릭전례무용단의 무용극 '조선 여인 강완숙, 역사를 위해 일어서다'. 불꽃처럼 살다간 강완숙 순교자의 삶과 신앙을 무용으로 보여준 특별한 무대였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조선의 빛이 된 여인들'. 18~19세기 봉건체제 하에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조선 여인들은 오롯이 하느님께 사로잡혀 섬김과 돌봄, 헌신, 열정, 선교, 그리고 순교를 통해 '어둠 속 불꽃'으로 타오른다.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아 이들 초기 박해시대 여성 순교자들 가운데 '하느님의 종' 124위로 선정된 여성 순교자들을 새롭게 조명한다. 조선 여성들의 실천적 신앙을 현대 여성들의 본보기로 삼고, 우리 시대 여성에게 순교란 무엇인지, 오늘 교회에서 여성의 역할과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되새겨보려 함이다. 4회에 걸쳐 이뤄질 기획 연재 중 첫 회로 강완숙(골룸바, 1761~1801)의 삶과 신앙을 돌아본다.

 

 

여사 강완숙, 신앙을 받아들이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1801년 4월 한양 감옥. 두 다리를 한데 묶고 그 사이에 두 개의 주릿대를 엇갈리게 끼워 비트는 주뢰(周牢) 형벌을 여섯 차례나 받으면서도 강완숙은 끝내 신앙을 굽히지 않는다. 뼈가 부서지는 듯한 혹독한 고통도 그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그는 옥중에서도 김연이와 강경복, 한신애, 문영인 등 네 여교우들과 신심수업에 힘쓰며 순교를 기다린다. 3개월 만인 그해 7월 2일 강완숙은 형장인 서소문 밖으로 끌려간다. 그 와중에서도 그는 네 여교우들을 격려하고 주님 영광을 노래한다. 즐거운 빛으로 제일 먼저 목숨을 바치니 그의 나이 41살이다.

 

'조선교회 첫 여성 회장'으로 한국 교회사에 빛나는 강완숙의 삶은 '신앙'으로 보석처럼 빛난다. 신문하던 이들조차 '여성 선비(女士)'라고 불렀을 만큼 유학에 대한 지적 기반이 충실한 그가 천주교 여성사에 빛나는 신앙의 인물이 된 것은 역설적이다.

 

그의 출생지는 충청도 내포다. 지방 향반(鄕班) 집안에서 태어나 10여 살 때 불교에 뜻을 뒀으나 포기하고 일찍이 충청도 덕산에 살던 홍지영에게 후처로 시집을 간다. 그러나 남편의 성품이 용렬해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지 못하고 늘 속세를 떠나고 싶은 생각에 젖어있었다. 혼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충청도에 천주교가 전해지자 "천주란 하늘과 땅의 주인이다. 교의 이름이 바르니 교의도 틀림없이 참될 것이다"며 교리서를 구해 읽고 믿었다(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상권). 1791년 신해박해 때 공주 감영 감옥에 갇힌 교우들을 돌보다 자신도 체포돼 감영에 갇히는 갖은 수난을 겪었다.

 

 

여회장 강완숙, 조선교회 어머니가 되다

 

"아들이 아버지와/딸이 어머니와/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마태 10,36).

 

강완숙 생애의 전환점이 된 것은 1791년 '신앙 때문에' 남편과 떨어져 서울로 올라온 이후다. 시어머니와 딸, 전처 아들 홍주영(필립보)과 함께 상경한 강완숙은 서울 남대문 안 창동(현 남창동)에 정착한다. 이 때부터 강완숙의 교회활동이 본격화한다. 강완숙은 지황(사바), 윤유일(바오로) 등과 함께 조선교회 사상 첫 사제 선교사 주문모(야고보, 1752~1801) 신부 영입에 나서 입국 경비를 전담하고 이후 경제적 뒷받침을 한다.

 

1794년 12월 23일 조선 입국에 성공한 주 신부는 서울에 들어온 뒤 최인길(마티아)의 집에 숨어살며 이듬해 6월까지 전교에 힘썼다. 하지만 한영익의 밀고로 거처가 알려져 1795년 을묘박해가 일어나고 주 신부 체포령이 내려지자 강완숙은 주 신부로 하여금 자신의 집에 살도록 한 뒤 이후 6년간 전교를 도왔다.

 

주 신부에게서 조선교회 첫 여성 회장에 임명된 그는 여성 전교를 도맡았고 교회 사무를 맡아봤다. 미사 첨례는 물론 교리상습 겸 강학회를 주관한 것도 그의 집에서였다. 정조의 동생 은언군 이인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 참판 이중복의 아내 신소사 등 왕족과 양반가 여성에 대한 그의 전교는 눈부셨다. 강완숙의 활약에 힘입어 주 신부 입국 당시 4000여 명을 헤아리던 조선교회 신자는 6년 만에 1만여 명에 이른다. 이 중 상당수가 여성 신자였던 것을 감안하면, 여성 회장으로서 강완숙의 활약이 얼마나 컸는지 가늠할 수 있다.

 

 

순교자 강완숙, '신앙의 꽃'으로 피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18,16)

 

1800년 6월 천주교에 관대하던 정조가 사망했다. 개혁을 주도하며 천주교를 옹호하던 정조의 죽음은 극심한 박해의 신호탄이었다. 결국 순조가 11살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박해의 피바람이 몰아친다. 특히 수렴청정을 한 정순황후 김씨는 남인 시파를 몰아내기 위해 그들이 신봉하는 천주교를 빌미로 신유박해(1801년)를 일으킨다.

 

강완숙이 붙잡혀간 것도 이 때다. 주 신부와 신자들의 피신 장소를 마련, 안전한 곳으로 옮겨 체포를 모면케 했으나 정작 자신은 그해 2월 24일 일가와 함께 체포됐다. 주 신부의 행방을 대라는 참혹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그의 음성이나 기색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자 형리들은 "이는 귀신이지 사람이 아니다"고 말했을 정도다. 그러나 주 신부는 교인들의 희생이 커지자 자수, 1801년 4월 19일 한강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당함으로써 조선교회 첫 외국인 순교 성직자가 됐다. 강완숙도 3개월 뒤인 그해 7월 참수당했다.

 

「순조실록」은 이처럼 순교한 강완숙을 가장 간악한 요녀로 취급한다. "스스로 사학의 괴수가 돼 여러 곳의 남녀 교우들을 불러들여 밤낮으로 강습하여 곳곳마다 이르지 않는 곳이 없어 일세를 미혹케 하였다."

 

그러나 역사가 증언하는 강완숙은 양반이라는 사회적 기득권을 신앙을 위해 포기한 여성이었고, 자신이 믿는 진리를 구현하고자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전교한 조선교회의 구심점이었다. 신앙을 통해, 전교를 통해 새 역사를 개척한 신여성, 그는 바로 강완숙이었다.

 

[평화신문, 2007년 9월 2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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