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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신앙을 깨우는 순례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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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7-09-21 ㅣ No.466

[순교자 성월 특집] 신앙을 깨우는 순례의 길


"순례는 '동반자 하느님' 깨닫는 여정"

 

 

현대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신앙적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 순교 성지를 찾는다. 사진은 연풍성지에서 열린 청주교구 충주지구 순교자 현양대회 모습.

 

 

9월은 특별한 절기이다. 가을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순교자 성월’이기 때문이다. 이 특별한 시기에 우리는 신앙 선조들의 발자취를 더듬고 그 신심을 본받기 위해서 직접 길을 떠나도 좋을 것이다. 좀 더 가까이 순교 성인들을 만나고 그들과 호흡하기 위해서 책이나 영상물이 아닌, 발로 걸어 몸으로 체득하는 순례의 체험이 필요한 때이다.

 

순례의 길을 떠나기 위해서는 많은 채비도 필요 없다. 그저 말씀을 향한 귀기울임과 하느님 사랑을 담을 가슴이면 충분하다.

 

 

신앙을 깨워주는 순례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요한묵시록 3, 16)

 

그리스도인들은 살아가며 자주 하느님으로부터 독촉을 받는다. 신앙과 삶의 결단을 요구하는 하느님의 목소리는 근엄하시다. 미지근한 신앙으로 우리는 시계추처럼 주일이면 성당을 오간다. 그리고 성당 문을 나서면, 언제 신앙인이었냐는 듯 세속의 사람으로 살아간다.

 

해미를 중심으로 대전교구 몇몇 성지를 맘먹고 도보순례했던 김연정(안젤라.38)씨는 순례 일정을 마치고 눈물을 쏟았다.

 

“일주일 동안, 몸은 힘들었지만 영혼은 가득 채워진 느낌입니다. 말로만 듣던, ‘은총’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듯합니다.”

 

김씨가 느닷없이, 생전 처음 도보순례에 나선 이유는 ‘타성적 신앙’에 대한 위기감이었다.

 

“모태신앙이었지만 사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편은 아니었습니다. 의무처럼, 주일미사를 궐한 적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신앙인이라는 걸 항상 생각하면서 살아가지도 않았지요.”

 

두 아이를 두고 허겁지겁 생활인으로서 살아가다 보니,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던 ‘신앙인’이라는 표딱지가 웬지 헐거워진 느낌이었다. ‘신앙’이라는 것에 분명히 뭔가 있을 것 같은데 도무지 찾아내기가 어렵던 터, 나름대로 ‘극단적’인 해법을 모색했고, 그래서 덜컥 도보순례라는 ‘극약처방’을 찾아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내 안에 신앙 있다”였다. 자신도 모르게 이미 삶을 가득 채우고 있던 신앙에 불씨를 당겨 준 것이 바로 순례였다. 그래서 김씨는 이제 정기적으로 전국의 사적지와 성지를 찾는 여행을 계속할 생각이다. 신앙이 미지근해질만하면 성지에서 그 불씨를 다시 당길 생각이다.

 

 

왜 성지순례를 떠나는가?

 

‘성지순례’는 대개의 종교가 한결같이 지니고 있는 거룩한, 보편적인 관습이자 전통이다.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성지순례는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성스러운 땅, 즉 성지와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치된 곳이거나 성인들의 유적지인 성역을 방문해 경배를 드리는 신심 행위를 일컫는다.

 

신자들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들 성지를 찾아 축제와 예배에 참석하면서 그 장소에 읽힌 종교적인 전승을 실존적으로 체험하고 자신이 속한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과 일체감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순례자는 자신의 삶 전체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절대자를 온 몸으로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성지순례의 신심행위로서의 가치는 이미 가톨릭교회 안에서 충분히 이해되고 강조돼 왔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지난 1999년 ‘구원 역사와 관련된 장소의 순례에 관하여’라는 교서를 통해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개입이 분명히 드러난 지역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둘러본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 순례는 높은 데에서 우리를 굽어보시는 분이 아니라 동반자가 되어주신 하느님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구산성지 주임 정종득 신부는 “성지순례란 순교자들의 족적을 따라가며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 가운데 나의 삶을 발견하는 것”이라며 “그 고유한 영성을 본받아 어떻게 하면 그분을 닮아갈 수 있을지 고민하는 여정”이라고 말했다.

 

 

순례, 그 풍요로운 체험

 

순례는 분명히 여행이나 단순한 관광과는 구별된다. 순례는 하느님을 만나러 올라가는 여행이다. 그리고 하느님을 만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공동체와 우리 각자가 바로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일체감을 확인하게 된다. 그럴 때에 어찌 우리가 신앙인이라는 정체성을 발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그런 풍요로운 체험을 고백한다. 지난 6월 장애인들을 초청해 함께 순례를 떠났던 서울대교구 구리본당 빈첸시오회 회장 김영희(마르가리타.49)씨는 “순례를 다녀오고 나면 스스로를 돌아보며 부족한 면을 성찰하게 된다”며 “나눔을 통해 가난한 이들의 손과 발이 되겠다”고 말했다. 신앙은 실천으로 이어진다.

 

최근 사흘 동안 신리성지-덕산성당-한티고개-해미성지로 이어지는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따라 도보순례를 체험한 김효주(효주아녜스.14)양은 “순교체험과 도보순례를 하면서 신앙생활로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될 것을 결심했다”고 고백한다.

 

30여쌍의 부부가 함께 성지순례를 하는 인천교구 부부성지순례단의 최기영(바로톨로메오)씨는 “그리스도와 함께하지 않고는 진정한 행복이 없음을 깨닫고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 이웃을 돕고 사랑하는 일에 적극 나서고자 한다”며 “매일 세상 일에 시달리지만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은 세상의 유혹을 이기는 큰 힘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순교의 향기가 어린 한국의 성지들

 

한국교회 안에서 전통적으로 ‘순교’를 일러 쓰이는 말이 ‘위주치명’(爲主致命)이다.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의미로, 자발적 신앙의 수용과 피를 흘려 스스로 신앙을 증거한 한국교회의 순교 정신과 그 전통을 잘 드러내는 말이다.

 

한국의 사적지와 성지 중 피를 흘린 순교지는 21.9%, 동굴과 터 등 순교자의 행적과 관련된 기타 성지가 31.8%, 묘역이 32.9%를 차지한다. 성지순례를 할 만한 곳들은 대부분 ‘순교’와 직접 연관된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게 ‘성지순례’란 신앙의 정체성을 찾는다는 의미와도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순교 성인들의 자취가 어린 한국의 사적지와 성지들을 찾아 순례를 떠나는 일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과 함께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나아가 순교의 역사를 통해 형성된 ‘나’, 곧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도 함께 찾아가는 여정이다.

 

한국교회의 영성은 순교의 영성이며, 전국의 사적지와 성지는 순교 성인들의 넋을 담은 소중한 요람이다. 그래서 성지순례의 체험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을 성숙시키고자 하는 한국교회의 순례자들은 순교의 영성을 오늘, 이 땅에서 구현해야 한다는 요청을 받는다.

 

이처럼 순례는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이며, 나아가 보편적이고 종말론적인 그 모든 전망들을 모두 품고 있는 소중하고 거룩한 체험이 아닐 수 없다.

 

 

[인터뷰] '한국의 성지' 사이트 운영하는 오영환 교수


“과거와 비교하며 미래 ‘나’를 찾아”

 

 

2004년 ‘한국의 성지’ 인터넷 사이트를 연 오영환 교수(라우렌시오, 전 서울여대 교육심리학 교수)는 “피맺힌 선조들의 역사는 곧 현재와 미래의 신앙”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이트를 만들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성지들을 빠짐없이 순례했던 사람이다. 오교수는 성지순례를 하며 과거 선혈들과 자신을 비교하게 되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나’를 찾는다고 설명한다. 즉 순교자들의 역사는 단지 과거가 아닌 미래신앙의 근간이며 천주교신자인 ‘나’를 있게 한 모태와 같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는 또 순교자들의 신심과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성지순례가 성가정을 이루는데도 도움을 준다고 말했다. 최근 주5일제가 실시되며 급격하게 늘어난 휴일을 아이들과 함께하는 신앙생활로 이어가자는 뜻이다. 그는 “기도도 따로, 본당생활도 따로 하는 현실 속에서 성지는 노인부터 아이까지 함께할 수 있는 신앙의 터전이 된다”며 “가족구성원들이 함께하는 올바른 성지순례를 위해 여러 가지 테마 성지가 마련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가족테마성지순례는 어른들에게도 신앙을 일깨우는 방법으로서 중요하지만 미래의 희망인 아이들에게 신앙을 일깨워준다는 의미에서 더욱 뜻 깊다. 어릴 때 부모를 따라 갔던 순교 성지들을 언젠가 기억하게 되고 자란 후에는 그 추억을 따라 성지를 방문해 자연스럽게 ‘순례’라는 것이 마음과 몸에 배게 된다.

 

오교수는 이처럼 아이들에게 올바른 성지순례를 대대로 물려주기 위해서는 체험마을 혹은 자연학습장 등 아이들이 기억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테마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한다.

 

‘관광’을 목표로 하는 성지가 아닌, 시대적 흐름에 맞는 어느 정도의 개발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는 “요즘 성지순례는 본당 단위로 많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개인과 가족을 통해 더 큰 공감대와 장점을 얻어갈 수 있다”며 “성지를 순례하기 전에 가족과 함께 순교자에 대해 공부하고 함께 순례 일정을 짠다면 가족에게 더없이 좋은 신앙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 한국의 성지 www.paxkorea.co.kr

 

[가톨릭신문, 2007년 9월 2일, 오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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