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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복시성] 103위 시성 25주년1: 이 땅에 빛을 기획을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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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28 ㅣ No.591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 25주년 기획 - 이 땅에 빛을] (1) 총론 : 기획을 시작하며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주례로 열린 시성식은 순교신앙의 위대함을 온 세계 교회에 증거하는 계기가 됐다.

 

 

1984년 5월 6일 일요일, 100만 신자들이 운집한 행사가 끝난 후에도 당시 여의도 광장에는 종이조각, 신문지 한 장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한국 교회 전체 신자 절반 정도가 한 자리에 모인 이날 대규모 행사를 통해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에 “교회가 여기 있다”고 알렸으며, 세상 사람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교회를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신앙대회 및 103위 시성식’이 올해로 25주년을 맞습니다. 이에 가톨릭신문은 성인들의 영성이 녹아든 현장을 찾아가는, 우리들의 신앙 뿌리를 찾아가는 기획을 시작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는 과연 순교자 영성이 뿌리내리고 있습니까.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스스로 복음화의 도구, 그 자체가 되고 있습니까. 한국 교회 제2의 성장 동력은 무엇입니까. 이번 기획은 많은 질문을 던질 것입니다. 그 해답을 찾는 소중한 시간이 됐으면 합니다.

 

 

1984년 5월 6일

 

1971년, 103위 성인의 탄생을 위한 첫 움직임이 시작된다. 주교회의는 그해 12월 정기총회에서 한국 순교복자 시성 추진안을 발의했다. 이후 시복시성을 위한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했고, 12년 만인 1983년 9월 27일 교황청이 103위 순교복자 전원에 대한 시성을 공식 발표했다. 그 결과 1984년 5월 6일 한국에서 시성식이 열리게 된다. 이날은 교황이 교황청이 아닌 한국을 직접 방문해 시성식을 거행함으로써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03위 성인은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10명의 프랑스 성직자와 김대건 신부 등 93명의 한국인 순교복자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79위는 1925년에 시복됐으며, 병인박해 당시의 순교자 24위는 1968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됐었다.

 

한국 교회는 1984년 그 해, 박해 칼날 아래 순교자들이 피로써 신앙을 증거하며 물려준 고귀한 신앙의 꽃을 활짝 피웠다. 그 꽃은 많은 열매로 이어진다.

 

시성식이 열리던 80년대는 한국 교회의 눈부신 성장기요 발전기였다. 본당 수는 물론 사제 수도자 성소 등이 수직 상승했으며, 수많은 신자들이 교회로 몰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많은 교회사학자들은 당시 한국 순교성인 탄생은 성장 일로에 있던 한국 교회에 새로운 도전을 제기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목숨 바쳐 신앙을 증거한 ‘순교 성인들의 거룩한 삶을 각 자의 삶속에서 체현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103위 그들은…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선택했고, 그 선택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조선시대 말. 많은 유학자들이 단순히 신학문에 대한 호기심으로 천주교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돌이켜 보면 섭리였다. 점차 이들이 천주교를 학문이 아닌 신앙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유교사상이 지배적 위치를 점유하고 있고, 또 여러 정치적 여건으로 복잡했던 당시 상황에서 천주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은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선택한 길을 용기 있게 걷는다. 유학자들의 믿음은 사회 구석구석으로 번져 나가게 된다. 유학자, 과부, 동정녀, 농부….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성인은 유체칠리아(1761~1839). 성인은 정약종의 부인이며 정하상의 어머니다. 부인과 사별한 정약종과 새로이 결혼한 유체칠리아는 정약종으로부터 교리를 배웠으며 남편과 큰 아들이 순교한 후에도 신앙을 버리지 않다가 79살에 아들 정하상, 딸 정정혜와 함께 옥에 갇혔다. 자신의 몸 하나 제대로 추스르기 힘든 노인의 몸으로 그녀는 모진 고문에도 신앙을 버리지 않다가 결국 감옥에서 숨을 거둔다.

 

가장 어린 성인은 14살에 순교한 유대철 베드로(1827~1839)이다. 유진길 성인의 아들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순교했다. 어머니와 누나가 천주교를 믿지 말라고 끊임없이 회유했지만 유대철은 오히려 어머니와 누나가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것을 슬퍼하면서 두 사람의 회개를 위해 기도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박해로 아버지가 체포되자 스스로 자수하여 모진 고문을 받았으며, 늘 평화로운 얼굴로 신앙을 증거해 관리들을 놀라게 하였다.

 

성인들은 그 신분이나 직업도 다양하다. 정부의 관리도 있으며 궁궐에 살았던 궁인도 있었다. 상인, 농부, 기술자, 외국인 선교사도 있었다. 외국인들은 모두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 주교와 신부들이었는데 성인 중에는 10명이 포함돼 있다. 이중에는 25살에 프랑스에서 서품을 받고 이듬에 한국에 와서 27살의 젊은 나이로 순교한 성 김(도리) 헨리코 신부도 있다. 이들은 외국인이지만 한국인을 위해 죽음으로 함께했기에 한국 교회에 속한 성인이다. 또 한국인 93위 중 사제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한 명이고 나머지 92위는 모두 평신도다.

 

한국인 성인 93위 중 남자는 46위, 여자는 47위다. 신자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성인은 34위로 이중 순교자 자손들은 16위, 스스로 입교 후 순교한 성인도 45위나 된다. 103위 중에는 신앙의 명가들도 많다. 허계임 성인의 집안은 무려 5위의 성인을 배출했다. 신앙의 명가로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가문을 빼놓을 수 없다.

 

 

103위 성인 탄생되기까지

 

▲ 1846년 : 조선 제3대 교구장이던 페레올 주교가 현석문(가롤로)과 이재의(토마스)가 수집 정리한 기해박해(1839년) 순교자 73명 행적과 자신이 직접 수집한 병오박해(1846년) 순교자 9명 행적을 프랑스어로 번역, 이듬해 홍콩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로 보냄.

 

▲ 1847년 : 최양업 부제가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냄.

 

▲ 1847년 10월 15일 : 파리외방전교회 루케 주교가 교황청에 위의 내용을 제출.

 

▲ 1857년 9월 24일 : 교황 비오 9세가 82명의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조사 심리를 위한 법령을 반포. 김대건 신부, 정하상 등 순교자들이 가경자로 선포.

 

▲ 1884년 : 뮈텔 신부에 의해 병인박해 순교자에 대한 본격적인 자료 및 예비 조사사업 시작.

 

▲ 1901년 : 병인박해 순교자 29위의 ‘병인 순교자 시복 조사 수속록’이 교황청에 제출.

 

▲ 1918년 11월 13일 : 교황 베네딕토 15세가 병인박해 순교자에 대한 시복 건의 개시를 허락.

 

▲ 1925년 7월 5일 :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82명 중 79명이 시복.

 

▲ 1968년 10월 6일 :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뮈텔 주교가 접수시킨 병인 순교복자 중 24명이 로마에서 시복.

 

▲ 1971년 12월 : 주교회의가 정기총회에서 한국 순교복자 시성 추진안을 발의.

 

▲ 1984년 5월 6일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한국에서 순교복자 103명이 시성.

 

 

가톨릭신문이 본 1984년 5월 6일 - “순교의 위대함 온 세계 교회에 증거”

 

‘이 땅에 빛을’이라는 주제로 1984년(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맞아 이뤄진 일련의 사업들은 한국 교회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다. 각종 기념행사와 정신운동, 기념사업과 사목회의 등은 선교 3세기를 여는 야무진 발걸음이었다. 그 기록들을 가톨릭신문은 꼼꼼히 기록하고 있다.

 

특히 1984년 5월 6일 시성식은 당시 한국 교회의 최대 경사였고, 그만큼 지면을 통해 소중하게 다뤄졌다. 가톨릭신문은 시성식을 맞아 정기 발행 외에 5월 4일부터 6일까지 매일 신문을 발행함으로써 200주년 기념행사 및 교황 방한 관련 기사들을 한국 교회 안팎에 전했다.

 

‘한국 순교자 103위 聖人(성인) 반열에’라는 제목으로 실린 5월 6일자 특별호에서는 103위 성인의 탄생을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103위의 복자들을 자신들이 피를 흘렸던 이 땅의 절두산과 새남터가 바라다 보이는 여의도에서 성인으로 선포돼 죽음으로 지킨 신앙의 위대함을 온 세계 교회에 증거했다. 이날 시성식에는 교황 성하를 비롯, 성청 국무성 장관 까사롤리 추기경, 김수환 추기경 등 국내외 성직자 수도자 신학생 시성자 후예 장애자 해외교포 평신도 등 1백여 만 명이 운집, 시성을 통하여 순교 선열들의 신앙을 본받으며 그들의 순교 정신을 기리고 진리의 증거자가 될 것을 다짐했다.”

 

또한 가톨릭신문에 따르면 5월 3일 한국 땅에 첫 발을 디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가장 먼저 절두산을 첫 순례지로 선택함으로써 한국의 고귀한 순교 전통과 그 정신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표시했다. 교황은 절두산 방문을 통해 순교 성인들의 후예인 한국교회의 모든 신자들이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받은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복음의 말씀대로 살아갈 것을 당부했다.

 

[가톨릭신문, 2009년 1월 18일, 우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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