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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유럽 동방정교회 수도원 순례기2: 세르비아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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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9-28 ㅣ No.485

[전통 영성의 샘을 찾아서] 유럽 동방정교회 수도원 순례기 (2) 세르비아 지역
 
수백 년 전쟁 상흔 속에… 겨자씨로 이어온 신앙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세르비아 스타리 라스의 슈투포비(Stupivi)수도원 전경.

 
■ 발칸의 화약고, 세르비아 중세 수도원

1차 대전 발발 100년, 전쟁의 불씨가 된 역사적 장소인 세르비아는 1·2차 발칸 전쟁과 십자군 원정, 오스만 터키 점령 등 피비린내 나는 발칸의 화약고였다. 이슬람지역인 크랄레보와 중세수도 스타리 라스 일대의 정교회수도원은 수백 년 동안 전쟁을 겪은 비운의 상처가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었다.

옥수수밭이 이어지는 풍요로운 평원을 지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고향 니슈에서 본 국가대표 농구선수들은 건장하고 준수한 전사 같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모습을 연상하게 했다. 강변에 있는 대제의 기념물에는 그리스도교 표지가 새겨져 있었다. 하느님을 알지 못했던 그는 꿈에 본 그리스도의 표지 깃발을 앞세워 로마 정규군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로마 황제로 즉위한 후 기독교를 공인하고, 그 어머니 헬레나는 성지 예루살렘을 순례하며 주님의 흔적을 찾아냈다.


■ 세르비아 겨자씨

크랄레보의 성 미카엘 성당은 세르비아 가톨릭의 현주소를 보여주었다. 지진에 갈라지고 무너진 폐허 같은 작은 벽돌성당에서 천장과 벽은 금이 가고 회칠은 벗겨지고 제대 뒤에는 작업도구와 목재더미가 흙먼지에 덮여 있었다.

정교회 땅 가톨릭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안타까움이 더 컸다. 동방교회 속에서 5%의 세르비아 가톨릭신자들은 차별을 받으며 가난하게 신앙을 이어왔다. 번영의 신앙을 지양하라는 교황의 말씀이 절실해지는 이 작은 교회는 세르비아의 겨자씨로 하느님의 가난의 실체를 보여주었다.

 

세르비아 스포차니수도원 성당 벽면의 프레스코화.

 

 

신비적 색채와 민족문화의 특색이 강한 동방정교회는 수도자 외의 성직자는 결혼하며 전례는 장엄하고 아름답다. 성경은 구약 49권으로 총 76권이며 무염시태를 믿지 않고 예수는 새 아담의 창조로, 성모승천은 성모안식으로 표현했다. 이콘과 성화를 서방교회가 문제 삼자 파괴하고 니케아공의회에서 허용한 후에 서방은 입체적 성상을, 동방은 성화를 그렸다. 칠성사를 지키며 영혼구원에 중점을 두고 세상을 부정하는 부정적 신학관과, 원죄의 신화신학을 주장하며 정적관상과 직관으로 영적 삶을 실천하였다. 동방수도원은 은수자들의 삶이 이어져 14세기말 그리스 아토스산을 중심으로 수도원이 늘어나며 성 바실리오 규칙을 지켰다. 주일미사에 대한 의무는 없고 지역 성인을 공경하는 전 세계 3억 명의 신자는 정통신앙을 수호한 긍지를 지니고 있다.


■ 중세 세르비아의 보석- 치차와 스튜데니카수도원

스테판 1세가 아들 사바를 위해 13세기 초에 세운 치차수도원에서 7명의 왕이 대관식을 치러 크랄레보는 왕의 도시로 불렸다. 열일곱 살 세르비아 왕자 사바는 결혼식 전날 그리스 아토스산 수도원으로 떠나 수도승이 되었다. 선홍색 밝은 지붕에 붉은 벽돌 수도원은 푸른 하늘 아래 파란 풀밭과 들꽃, 연못, 나무들 속에 화려하게 서 있었다. 웅장한 성당 프레스코화는 오스만 침략과 세계대전으로 60%가 파손되었으나 복구비용이 없어 그대로 두어 벽에는 대부분 붉은 빛만 남아 있었다. 전쟁의 상처는 죄 없이 희생된 마을 공동묘지에도 잠들어 있고, 수백 년 이어진 포화의 악몽은 평온하고 아름다운 수도원을 뒤흔들었다. 대관식 때마다 세운 7개의 문이 있는 담장 안에 둥치 큰 나무들이 높이 자라고 열린 창문으로 엿본 수녀원의 정갈한 방과 포도밭에서 일하는 작업복수녀는 순례자의 호기심을 끌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속에 찾아간 중세 세르비아의 보석으로 알려진 스튜데니카수도원은 단단하고 예술적이며 중세적 풍치가 압도적이었다. 스테판 1세의 명으로 12세기에 건축한 수도원에 사바 성인은 아토스 화가들을 시켜 화려한 프레스코화로 장식하였다. 이슬람 군이 물러간 후 파손된 그림을 칼로 파내어 복원하던 중 원형이 파괴되자 중단한 그림에는 흰 상처가 연속무늬처럼 남았다. 최후의 만찬화에 빵을 집는 유다가 유독 부각되었고 지성소 성화는 금빛 바탕에 환상적인 푸른빛의 청금석을 사용하여 신비한 하늘세상을 표현했다.

 

세르비아 치차수도원 전경.

 

 

83세의 스테판이 군주자리에서 물러나 수도승이 되어 아토스산 수도원에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나자 사바는 세르비아로 아버지를 모셔와 비잔틴양식과 로마네스크를 절충한 벽돌로 쌓은 수도원의 원통형성모성당 영묘에 안치하고 차분한 색으로 장식하였다. 스테판 1·2세 관은 1년에 두 번 개관할 때마다 좋은 향기가 난다고 한다. 형제의 왕권 다툼을 중재한 사바는 정치적 안정과 농업장려로 경제적 안정을 가져왔고 1209년 초대 대주교가 되어 세르비아교회 독립을 실현하여 위대한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비가 그친 파란 하늘은 세르비아 앞날을 알려주는 듯 수도원 마당에는 상쾌한 바람이 지나갔다.


■ 중세 수도 사바의 고향 스타리 라스

티스차강변 노비파자르는 이슬람 도시이며 인구의 3%가 이슬람신자이다. 라마단이 끝난 저녁, 성장한 어른들과 아이들은 중심가 광장으로 몰려나왔다. 말로만 듣던 이슬람축제가 시작되는 밤을 지나 서구와 비잔틴의 교류를 보여주는 중세수도 스타리 라스 주변의 수도원을 방문했다. 이슬람 지역인 이곳은 오스만 터키의 지배 흔적이 곳곳에 남아 옛 수도원은 거의 파괴되었고 정교회의 활동은 위축되었다.

구릉을 휘감아 오른 800m 산정에 있는 유네스코 문화유산 조르제비(기둥)정교회수도원에서 수도원장의 안내로 수도원을 돌아보았다. 성당 입구의 18m 돌탑기둥에서 수도원의 이름이 생겼고 오스만 점령 하에 폐허가 되어 성당 지붕은 없어지고 300년 비바람에 프레스코화 몇 점만이 남아 있었다. 3년 전 복원한 수도원의 무너진 돌담 사이로 멀리 계곡이 나타났다. 수도원순례에서 인간의 흥망성쇠를 직접 대하며 참된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네마나 왕조가 시작된 사바의 고향 라스는 골짜기 외딴 마을로 남아 보는 이를 씁쓸하게 하였다.

라스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인 베드로와 바오로 정교회성당 사제는 이슬람에 대해 그리스도인은 누구라도 미워해서는 안 되지만, 악과 거짓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스타리 라스 산속 스포차니수도원은 오스만의 점령으로 250년간 폐허로 버려졌다.

 

[가톨릭신문, 2014년 9월 28일, 노춘석(멜라니아 · 창녕공고 교사), 사진 김상희(데레사·대구 성 안드레아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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