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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문헌ㅣ메시지

2013년 제46차 세계 평화의 날 교황 담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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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2-22 ㅣ No.475

베네딕토 16세 교황 성하의

제46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2013년 1월 1일)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1. 해마다 새해에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기대합니다. 이러한 기대를 품고, 저는 인류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일치와 평화를 주시어 모든 이가 바라는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이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도록 촉진하였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막 50주년인 지금, 그리스도인들의 헌신을 확인하면 힘이 솟아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고 온 인류와 함께 살아가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역사 안에서 인류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를 1) 나누면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선포하고 모든 이를 위한 평화 증진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시대는 긍정적이고도 부정적인 측면을 지닌 세계화를 특징으로 하며, 끊임없이 계속되는 유혈 분쟁과 전쟁의 위협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과 한 인간의 온전한 발전과 공동선을 함께 추구하는 새로운 헌신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이 만연되면서 빚어진 긴장과 갈등의 온상들은 우리를 걱정스럽게 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아무런 규제를 받지 않는 금융 자본주의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온갖 형태의 테러와 국제적인 범죄 행위로 평화가 큰 위협을 받고 있으며, 사람들 사이에 친교와 화해를 증진하여야 할 종교의 참된 본질을 왜곡하는 근본주의와 광신주의도 평화에 큰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는 평화를 이루려는 수많은 노력들로 가득합니다. 이러한 노력은 평화에 대한 인류의 타고난 소명을 보여 줍니다. 모든 사람 안에 깃들어 있는 평화에 대한 갈망은 어떤 면에서 충만하고 행복하며 성공적인 인간 생활에 대한 갈망과 일치하는 본질적인 열망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평화에 대한 갈망은 기본적인 도덕 원칙, 곧 사회와 공동체의 온전한 발전에 대한 의무와 권리에 부응하는 것입니다. 이는 인류를 위한 하느님 계획의 일부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선물인 평화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에 비추어 저는 올해 평화의 날 담화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복음의 참행복

 

2.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참행복(마태 5,3-12; 루카 6,20-23 참조)은 약속들입니다. 성경이 전하는 이야기에서 실제로 참행복은 약속에서 절정을 이루는 기쁜 소식, 곧 “복음”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참행복은 단순한 도덕적 권고가 아닙니다. 곧 이를 지키면 정해진 때에, 대체로 다음 세상에서 보답을 누린다고, 장차 행복한 상황이 도래한다고 예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행복은 진리와 정의와 사랑이 요구하는 것들을 기꺼이 따르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신 약속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눈에는, 하느님과 그분의 약속을 믿는 이들은 흔히 현실과 동떨어진 어리석은 사람들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다음 세상에서만이 아니라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자녀임을 깨닫게 될 것이고, 하느님께서 언제나 완전히 그들 편이 되어 주셨고 앞으로도 그러하시리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들은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진리와 정의와 사랑에 투신하는 이들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 주시는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시는 데에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무한한 선물을 기쁘게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선물은 바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고, 은총의 삶이며, 충만하고 행복한 삶에 대한 보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특별히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주십니다. 이는 사람이 하느님을 신뢰하며 만나 뵐 때에 생겨나는 평화입니다.

 

예수님의 참행복은, 평화가 메시아의 선물이면서 인간 노력의 결실이라고 말해 줍니다. 실제로 평화는 초월을 향해 열린 인본주의를 전제로 합니다. 평화는 서로에게 주는 선물의 열매입니다. 하느님에게서 샘솟아 우리가 다른 이들과 더불어 다른 이들을 위하여 살아가게 해 주는 선물 덕분에 서로를 풍요롭게 해 주는 열매입니다. 평화의 윤리는 친교와 나눔의 윤리입니다. 따라서 우리 시대의 다양한 문화들은 순전히 주관적이고 실용적인 이론적 실천적 전제들에 바탕을 둔 인간학과 윤리학들을 반드시 극복해야 합니다. 이러한 전제들 때문에 공존의 관계가 힘이나 이익의 기준을 따르게 됩니다. 여기서는 수단이 목적이 되고 목적이 수단이 되며, 문화와 교육은 도구와 기술과 효율에만 치중합니다. 평화의 전제 조건은 상대주의의 독단과 철저한 자율적 도덕을 내세우는 주장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이 자율적 도덕은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의 양심에 반드시 따르라고 새겨 주신 자연 도덕률을 인식하지 못하게 가로막습니다. 평화는, 인간의 잣대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토대 위에서 이성적이고 도덕적으로 공존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시편 제29[28]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권능을 주시리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평화로 강복하시리라”(11절). 

 

 

평화, 하느님의 선물이며 인간 노력의 결실

 

3. 평화는 인격 전체와 관련되고 모든 인간의 참여를 요구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면서 하느님과 이루는 평화입니다. 이는 자기 자신과 이루는 내적 평화이고 이웃들과 모든 피조물과 이루는 외적 평화입니다. 얼마 뒤 반포 50주년을 맞는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에서 요한 23세 복자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평화는 무엇보다 진리, 자유, 사랑, 정의를 토대로 공존을 이루는 것입니다. 2) 평화를 이루는 데에 위협이 되는 것은, 인간의 참된 본성을 그 본질적 차원에서 부인하고 또 참되고 선한 것을 알고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아는 인간의 타고난 능력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창조주께서 인간의 마음 안에 새겨 두신 인간에 관한 진리가 없다면, 자유와 사랑은 가치를 잃고, 정의는 그 실천의 바탕을 잃게 됩니다.

 

참다운 평화의 일꾼이 되려면, 초월적 차원에 관심을 갖고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느님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일이 중요합니다.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외아드님께서 이룩하신 구원을 간청합니다. 이렇게 하여 인간은 평화를 어둡게하고 부인하는 온갖 형태의 죄악들, 곧 이기주의와 폭력, 탐욕, 권력욕, 지배욕, 불용, 증오와 불의한 구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평화 실현은 무엇보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한 인류 가족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 있습니다. 한 인류 가족은 회칙 「지상의 평화」의 가르침대로, ‘우리’라는 공동체가 떠받치고 활력을 불어 넣는 인간관계와 제도들로 이루어집니다. 이 공동체는 진리와 정의에 따라 서로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진심으로 인정하는 내적 외적 도덕 질서를 지니고 있습니다. 평화는 사랑으로 힘을 얻고 온전해지는 질서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요구를 자기 것으로 느끼고, 자기 재물을 다른 이들과 나누며, 세상에 정신적 가치들이 더욱 널리 공유되도록 노력합니다. 평화는 자유 안에서 이루어지는 질서입니다. 다시 말해 평화는 자신이 지닌 이성적 본성에 따라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는 인간의 존엄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실현됩니다. 3) 

 

평화는 꿈이나 이상향이 아닙니다. 평화는 실현 가능합니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의 이면을 더욱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의 마음 안에 존재하는 긍정적인 실재를 식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고, 새 세상을 만드는 일에 이바지하면서 성장해 나가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당신 아드님의 강생과 구원을 통하여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고, 새 창조를 이루시고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새 계약을 맺으시어(예레 31,31-34 참조), 우리가 “새 마음”과 “새 영”을 지닐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에제 36,26 참조).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선포하는 일이 절실하다고 확신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평화와 더불어 민족들의 완전한 발전을 이루시는 으뜸가는 주역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우리의 평화, 우리의 정의, 우리의 화해이십니다(에페 2,14; 2코린 5,18 참조). 예수님의 참행복에 따르면,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오늘도 내일도 다른 이의 선을, 그의 몸과 마음의 완전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에서, 모든 사람과 모든 공동체, 곧 종교, 시민, 교육, 문화 공동체가 평화를 위하여 일하도록 부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평화는 원칙적으로 다양한 사회, 곧 기초나 중간 집단에서, 국가적, 국제적, 세계적 차원에서 사회의 공동선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공동선을 실현하는 길은 평화를 추구하기 위하여 걸어가야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평화의 일꾼은 생명을 온전히 사랑하고 수호하며 증진하는 이들입니다

 

4. 공동선과 평화를 실현하는 길은 무엇보다도 임신[受精]에서부터 성장과 자연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측면에서 인간 생명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다운 평화의 일꾼은 인간 생명의 모든 차원에서, 곧 개인적, 공동체적, 초월적 차원에서 인간 생명을 사랑하고 수호하고 증진하는 이들입니다. 충만한 생명은 평화의 정점입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에 대한 침해와 범죄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인간 생명의 가치를 충분히 존중하지 않고, 이를 테면 낙태의 자유화를 지지하는 자들은 자신이 그렇게 하여 거짓 평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인간의 존엄을 손상시키는 책임 회피나 심지어 힘없는 무고한 인간 생명을 살해하는 행위는 결코 행복도 평화도 가져오지 못합니다. 사실, 태아를 비롯하여 가장 힘없는 이들의 생명권을 수호하지 않고서 어떻게 평화 실현이나 민족들의 온전한 발전, 환경 보호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생명, 특히 그 시작 단계의 생명에 대한 모든 침해는 발전과 평화와 환경에 되돌릴 수 없는 손상을 입히기 마련입니다. 그릇된 권리나 거짓 자유를 교묘히 합법화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이는 상대적이고 축소된 인간관에 바탕을 두어, 또 이른바 낙태와 안락사의 권리를 내세우려고 모호한 표현을 교묘하게 사용하여, 생명에 대한 기본권을 위협하는 것입니다. 

 

또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자연스런 혼인 구조를 인정하고 증진하여, 이를 전혀 다른 결합 형태들과 법적으로 동등하게 만들려는 시도들에 맞서야 합니다. 이러한 시도들은 실제로 혼인의 고유한 본질과, 그 무엇도 대체할 수 없는 혼인의 사회적 역할을 가리면서 혼인을 침해하고 와해시킵니다. 

 

이러한 원칙은 신앙의 진리도 아니고 종교 자유의 권리에 따른 귀결도 아닙니다. 이는 인간 본성 자체에 새겨져 있고 이성으로 알 수 있는 것이며, 그러기에 온 인류에게 공통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원칙을 촉진하려는 교회의 노력은 신앙의 성격을 지닌 것이 아니라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을 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이 부인되거나 곡해되면 될수록 정의와 평화에 심각한 해악을 끼치며 인간에 대한 진리를 침해하므로, 이러한 교회의 노력은 더욱더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평화 구축을 돕는 또 다른 중요한 방법은, 낙태와 안락사의 경우처럼 인간 존엄을 침해하는 법률이나 행정 조치들에 맞서 양심적 거부 원칙을 내세울 권리를 법체계와 사법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세계 평화와 관련되는 인간의 기본권 가운데 하나는 개인과 공동체의 종교 자유의 권리입니다. 역사의 현 시점에서, 소극적 관점에서만 아니라 적극적 관점에서도 종교 자유의 권리를 증진하는 것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소극적 관점에서, 한 사람이 종교를 선택할 자유와 관련하여, 예를 들어, 의무나 제약‘으로부터의 자유’가 있습니다. 적극적 관점에서는 여러 가지로 ‘-할 자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기 신앙을 증언할 자유, 자기 종교의 가르침을 선포하고 전파할 자유, 교육과 자선과 봉사 활동에서 종교적 계율을 실천할 자유, 종교의 고유한 교리나 제도에 따라 사회단체를 조직하고 활동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랜 그리스도교 전통을 지닌 나라들에서도 특히 그리스도교에 대한 종교적 불용의 사례가 더욱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 종교를 드러내는 표지를 지니는 것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평화의 일꾼들은, 급진적 경제 자유주의와 기술 관료주의의 이념들이 여론에 점점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도 명심하여야 합니다. 이 이념들은 국가의 사회적 책임과 시민 사회의 연대망을 해치고 사회적 권리와 의무를 손상시키더라도 경제 성장을 추구하여야 한다는 신념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사회적 권리와 의무는 시민적 정치적 권리와 의무를 비롯하여 여러 권리와 의무를 완전히 실현시키는 근본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오늘날 가장 큰 위협을 받고 있는 사회적 권리와 의무 가운데 하나가 노동의 권리입니다. 경제 발전은 주로 완전히 자유로운 시장에 달려 있다고 여겨 노동이 점점 더 경시되고 노동자의 법적 지위가 올바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노동은 경제와 금융 체계의 종속 변수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인간 존엄과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논리가 “모든 사람의 안정된 고용 보장을 최우선 과제로 삼도록” 4) 끊임없이 요구한다는 것을 재천명하고자 합니다. 이 야심 찬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한 가지 전제 조건은 새로운 노동관입니다. 이는 개인과 가정과 사회를 위한 근본 선으로서 노동의 개념을 강화하는 윤리 원칙과 정신적 가치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이 선에 부응하는 것은 모든 이를 위한 과감하고 혁신적인 노동 정책을 요구할 의무와 권리입니다. 

 

 

새로운 경제 발전 모델을 통하여 평화의 선을 이룩하십시오

 

5. 오늘날 많은 분야에서, 경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새로운 발전 모델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연대를 통한 지속 가능한 통합적 발전과 공동선은 모두 재화와 가치에 대한 올바른 척도를 요구합니다. 그 척도는 하느님을 궁극적인 준거로 삼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어도 많은 수단과 선택의 기회를 갖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발전을 촉진하는 많은 재화와 폭넓은 선택의 기회들은 행복한 삶, 올바른 행위의 전망에 따라 활용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정신적인 것을 우위에 두고 공동선을 위하여 일하라는 소명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떠한 재화든 그 참된 가치를 잃어버리고 새로운 우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극심한 불평등을 자아내는 현재의 금융 경제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사람과 단체와 제도들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창의성을 북돋워 위기 속에서도 식별을 통하여 새로운 경제 모델을 찾는 기회를 이끌어 내어야 합니다. 최근 몇 십 년 동안의 지배적인 경제 모델은 이윤과 소비의 극대화를 요구하였습니다. 이는 오로지 경쟁력으로만 개인을 평가하는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사고방식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볼 때, 진정한 지속적 성공은 우리 자신의 재능, 지적 능력, 진취적인 정신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살맛 나는 참으로 인간다운 경제 발전은 형제애의 표현이고 증여의 논리로서 무상성의 원칙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5) 구체적으로, 평화의 일꾼은 경제 활동에서 협력자와 노동자, 고객과 소비자들 사이에 공정성과 호혜성의 유대를 구축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공동선을 위하여 경제 활동에 참여하며 자신의 이익을 넘어 현재와 미래 세대를 위하여 노력합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그들은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하여 좋은 일자리와 미래를 보장해 줍니다.

 

경제 분야에서, 사회적 발전과 입헌 민주주의 국가의 확산을 고려하여, 특히 정부는 산업과 농업 발전 정책을 표명하여야 합니다. 또한 금융 통화와 상업 시장을 위한 윤리 구조의 창출이 근본적이고 필수적입니다. 이러한 시장들은 안정되어야 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도록 더 많은 조정과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평화의 일꾼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각오로 재정 위기보다 더 심각한 식량 위기에 관심을 쏟아야 합니다. 식량 안보라는 문제가 다시 한 번 국제 정치 현안의 핵심이 되고 있습니다. 이는 기초 식료품 가격의 급변, 일부 경제인들의 무책임한 행태, 각국 정부와 국제 공동체의 통제 결여 등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위기들 때문입니다. 이 위기에 직면하여, 평화의 일꾼들은 지역 차원에서부터 국제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연대 정신으로 함께 일하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이는 농민들이 척박한 농촌 현실 속에서도 사회적 환경적 경제적 관점에서 품위 있고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라는 것입니다.

 

 

평화의 문화를 위한 교육: 가정과 단체의 역할

 

6. 저는 수많은 평화의 일꾼들이 가정의 공동선과 사회 정의를 위한 열정을 키우고 효과적인 사회 교육에 헌신하도록 부름 받았음을 거듭 강조하고자 합니다.

 

가정은 인구, 윤리, 교육, 경제, 정치의 관점에서 사회의 기본 세포로서, 그 핵심적인 역할을 누구도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가정은 생명을 증진해야 하는 본래의 소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정은 사람들이 성숙하도록 도와주고 배려와 나눔을 통하여 서로 풍요로운 성장을 북돋워 줍니다. 특히 그리스도인 가정은 하느님 사랑의 기준에 따른 인격 성숙의 못자리가 됩니다. 가정은 평화의 문화를 이룩하는 필수적인 사회적 주체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도덕과 신앙에 관한 자녀 교육에서 부모의 권리와 그 일차적인 역할이 지켜져야 합니다. 평화의 일꾼들, 곧 생명과 사랑의 문화를 촉진하는 미래의 일꾼들이 가정 안에서 태어나고 자랍니다. 6)

 

평화 교육이라는 이 중대한 과업에 수도 공동체들도 특별한 방식으로 참여합니다. 교회는 새로운 복음화를 통하여 이 커다란 책임을 함께 나눈다고 믿습니다. 이 복음화는 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으로 돌아가 개인과 사회가 정신적 도덕적으로 새로 나는 것을 그 중심으로 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불의를 극복하고 친교에 헌신하는 평화의 일꾼들을 길러 냅니다.

 

문화 단체, 학교, 대학교는 평화를 위한 특별한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세대의 지도자들을 양성할 뿐만 아니라 국가적 국제적 공공 기관의 쇄신에도 중요한 공헌을 하여야 합니다. 그들은 또한 경제 금융 활동을 굳건한 인간학적 윤리학적 기반 위에 놓는 학문적 성찰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세계는, 특히 정치계는 신선한 사고와 새로운 문화적 종합으로 뒷받침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순전히 기술적인 접근을 극복하고 다양한 정치적 흐름들이 공동선의 관점에서 조화를 이루도록 하여야 합니다. 공동선은 개인과 집단의 통합적인 발전에 봉사하는 사람들과 단체들의 긍정적인 관계의 총화로 여겨지며 모든 참다운 평화 교육의 토대가 됩니다.

 

 

평화의 일꾼들을 위한 교육

 

7. 결론적으로, 분명히 평화 교육을 제안하고 촉진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풍요로운 내적 삶, 분명하고 타당한 도덕적 기준, 적절한 생활 양식과 태도가 요청됩니다. 실제로 평화를 이룩하는 일은 공동선의 실현으로 이어지고, 평화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 내며 평화를 가르칩니다. 평화에 관한 생각과 말과 행동은 평화의 정신과 문화를 형성하고 존중과 정직과 친절의 분위기를 이룹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평화를 일구며 단순한 관용보다는 선의를 지니고 살아가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평화를 근본적으로 촉진하는 것은 “복수를 거부하고, 자신의 불의와 잘못을 인정하며, 바라지는 않지만 사과를 받아들이고, 마침내 용서하는” 7)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진리 안에서 자신의 잘못과 불의를 인정하고 화해를 향하여 함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용서에 대한 교육이 증진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악을 선으로 이겨내고, 당신의 모든 자녀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본받아 정의를 추구하여야 합니다(마태 5,21-48 참조). 이는 오랜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여기에는 영적인 진보, 드높은 가치에 대한 교육, 인류 역사에 대한 새로운 전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우상들이 내세우는 거짓 평화와 그에 따르는 위험을 거부해야 합니다. 그러한 거짓 평화는 양심을 무디게 하며 자기 매몰과 무관심 속에 살아가는 메마른 삶으로 이끕니다. 이와는 반대로 평화 교육은 활동, 연민, 연대, 용기, 인내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시면서, 곧 “당신의 목숨을 잃기까지”(마태 10,39; 루카 17,33; 요한 12,25 참조) 당신의 삶에서 이 모든 태도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그들이 조만간 놀라운 발견을 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이는 제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계시며, 완전히 인간의 편이시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는 우리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시어,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의혹이 있는 곳에 참된 믿음을 가져다주시도록 하느님께 간청하는 기도를 드리고자 합니다. 요한 23세 복자와 더불어 우리도 하느님께 간청합시다. 모든 지도자들을 깨우쳐 주시어 그들이 자기 민족의 정당한 행복을 돌보며 평화의 고귀한 선물을 보장하게 해 주소서. 모든 민족들이 그들을 갈라놓는 벽을 허물고 서로 사랑의 유대를 강화하고 이해를 증진하며 자기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게 하소서. 하느님의 권능과 인도로 지상의 모든 민족들이 형제애를 나누며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평화가 영원토록 꽃피고 언제나 평화가 그들을 다스리게 하소서. 8)

 

이 기도로 저는 모든 이가 참다운 평화의 일꾼이 되어 인류 공동체에 형제적 화합과 번영과 평화가 넘치게 되기를 빕니다.

 

바티칸에서

2012년 12월 8일

교황 베네딕토 1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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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1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라틴어 대역판, 2008(제3판 1쇄) 참조.2) 요한 23세,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 1963.4.11.,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3(제1판 2쇄), AAS 55(1963), 265-266 참조.

3) 「지상의 평화」, AAS 55(1963), 266 참조.

4) 베네딕토 16세, 회칙 「진리 안의 사랑」(Caritas in Veritate), 2009.6.29., 32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0(제1판 3쇄), AAS 101(2009), 666-667.

5) 「진리 안의 사랑」, 34.36항 참조.

6) 요한 바오로 2세, 1994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 1993.12.8., AAS 86(1994), 156-162 참조.

7) 베네딕토 16세, 정부와 국가 기관, 외교단, 문화계 인사들과 종교 지도자들과의 만남에서 한 연설, 바압다-레바논, 2012.9.15., 『로세르바토레 로마노』(L’Osservatore Romano), 2012.9.16., 7면.

8) 「지상의 평화」, AAS 55(1963), 304 참조.

 

<원문 : Message of His Holiness Pope Benedict XVI for the Celebration of the World Day of Peace 2013, Blessed are the Peacemakers, 2012.12.8., 독일어영어이탈리아어프랑스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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