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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김종륜 루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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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1-10 ㅣ No.496

대구순교자 20위 시복시성을 준비하며 -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20) 김종륜(金宗倫) 루가(?∼1868)

 

 

김종륜 루가에 관한 현존사료는 교회측의 기록으로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치명일기』그리고 국가기관의 기록으로 『일성록』 등에서 단편적으로 확인되는 관련 내용을 들 수 있다.

 

김종륜 루가의 행적에 관하여 전하는 바를 요약하면, 그는 본시 충청도 출신으로 곧 닥쳐올 박해를 피해서 상주 멍에목을 거쳐 언양의 죽령리 공소로 피난해 왔다. 이어서 병인박해 때에 이르러 김종륜 루가는 보다 안전하게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하여 가까운 두 가족, 즉 허인백 야고보 그리고 이양등 베드로 등과 의논하여 단석산중의 범굴로 가족들을 데리고 피신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위의 다른 두 교우들과 더불어 나무 그릇을 만들어 장에 내다 팔아서 생활하였다. 그러나 그는 범굴로 피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주의 포졸들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고(1868년 5월), 연이어 경주 감옥에서 문초를 당하였으나 한결같은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사형 선고를 받고 울산 장대에서 순교하였다.

 

이때 신앙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김종륜 루가를 포함한 3인의 울산 장대벌 순교자들은 큰 죄를 지은 사학 죄인으로 취급되어 이른바 군문효수(軍門梟首)의 참형을 당하였다. 국가기관의 문서인 『일성록』 고종(高宗) 무진년(戊辰年) 8월 15일자에 의하면 “경상 좌병사 윤선응이 사학 죄인 김종륜·허인백·이양등을 효수형에 처하고 경고하였음을 아뢰다.(慶尙左兵使尹善應以邪學罪人金宗倫許仁伯李陽登梟警啓)”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주지하듯이 ‘군문효수’라 함은 이미 처형된 이의 목을 죽고 난 이후에도 군문의 장대 위에 걸어 매달아두는 매우 가혹한 처형방법이다. 이 극형은 특히 천주교 박해 당시에는 주로 외국인 선교사들을 비롯한 중죄인을 체포해 처형할 때에 가한 형벌 중의 하나였으며, 무릇 이와 같은 엄한 조치는 뭇 민중을 경계하는 뜻에서 취해졌다.

 

한편 김종륜 루가가 체포된 해인 1868년의 상황을 보면 1866년에 시작된 병인박해의 소용돌이가 곧 전국을 휩쓸면서 수많은 천주교 신자가 투옥되거나 처형되던 시기로, 이 즈음에 이르면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천주교 말살정책은 더욱 극에 달하게 된다. 그 계기가 되는 구체적인 사건으로 1868년에는 독일 상인 오페르트(Oppert)의 남연군(南延君) 묘 도굴사건이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서 보다 더 혹독한 박해령이 내려졌다. 특히 이를 전후한 한 해에만 울산 장대를 포함한 칠곡 한티 그리고 부산 수영 장대, 김해 노루목 등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모진 수난을 당하였으며, 나아가 이때를 전후해서는 정해진 행형법 절차를 무시한 초법적인 조처로써 이른바 선참후계(先斬後啓)령에 의한 무자비한 처형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선참후계’라 함은 조선에서 지금까지는 사형수에 대한 최종 판결권이 국왕에게 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군율(軍律) 등을 어긴 죄인을 지방관이 먼저 처형한 다음에 임금에게 보고하여 추인을 받는 시행 형태를 일컫는다. 당시 이러한 조처의 대상에 천주교 신자가 포함되어 있음을 보면 소위 사학 죄인에 대해서는 예외 없이 초법적이며 강력한 응징을 취하려고 했음이 자명하다. 따라서 이러한 일련의 사례를 통하여 조정의 강경 대책 그리고 시류에 대한 위기의식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이미 처형된 자들 가운데에는 국가기관에 기록으로 보고조차 되지 않은 천주교 신자가 상당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러한 일명 선참불계(先斬不啓)의 무원칙한 사례들이 얼마나 빈번하게 사형집행 방법으로 시행되었는가 하는 것 또한 가히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한편 위의 사건 등이 주요한 탄압의 빌미가 되어 처참한 피의 박해가 1873년 대원군의 실각으로 종식될 때까지 줄곧 이어졌으며, 이때 많은 수의 신자들이 형장에서 순교하였거나 아니면 겨우 살아남은 자들도 집과 재산을 모두 잃어버리고 초근목피의 어려운 생계를 꾸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조정에서 천주교 박해의 명령이 내려지면서 김종륜 루가를 포함한 세 가족 역시 보다 더 안전한 피신처를 찾아다니며 가까스로 생활을 연명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주변의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밤마다 온 가족이 하나로 모여 기도를 드리는 등 모범적인 신앙 생활에 더욱 정진하였다.

 

하지만 박해령이 내려지고 난 이후에는 포졸들이 이들이 머문 깊은 산중에까지 들이닥쳐 붙잡히게 되었으며, 결국 경주로 끌려가서 가혹한 신문과 형벌을 온몸으로 감내하여야만 했다. 이곳에서 약 2개월 동안의 모진 육체적 고통을 받고 난 이후에 다시 울산으로 이송되어 모진 문초를 받다가 8월 14일에 이르러 울산 장대벌에서 의연히 순교하였다.

 

울산 장대에서 참수 치명한 김종륜 루가를 포함한 허인백 야고보 그리고 이양등 베드로 3인 순교자의 시신은 이후에 허인백 야고보의 부인 조예가 강둑으로 옮겨와 임시로 매장하였다. 이때 허인백 야고보의 부인 조예는 세 교우들을 위하여 힘든 옥바라지는 물론이고 울산 동천 강변의 형장에서 순교한 유해를 정성으로 모두 거두는 예를 다하였다.

 

김종륜 루가를 비롯한 3인의 유해는 경주 진목정 공소 뒷산에 일시 묘소를 정하였다가 다시 옮기는 등, 수 차례의 이장 절차를 거쳐서 1973년 10월 19일 대구의 복자성당에 안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십자가를 지고 고통과 죽음으로 나아가시는 당신의 사랑! 일찍이 당신께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 이상의 사랑은 없음을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앞서 우리 신앙 선조의 모범을 통해서도 본 바와 같이 진정한 용기란 어떤 박해 가운데에서도 꿋꿋하게 자기를 굽히지 않고 소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대적 상황이 다른 지금 우리는 과연 신앙 선조로부터 무엇을 배우며 또 어떠한 다짐을 해야 할까요?

 

먼저 우리는 오늘 내 주변의 일상생활부터 되돌아보기로 합니다. 우리는 기꺼이 이웃에게 짐을 떠넘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나의 아주 작은 고통에도 십자가를 밀쳐내며 “주님, 하필이면 제가 무슨 잘못이 있기에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더불어 죽음은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육체의 부활 및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이 혹 내게 부족하지는 않았는지요?

 

결국 이러한 결핍은 우리가 온전히 당신을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 선조인 순교자들은 자신의 고통을 사랑 안에서 받아들이며 숱한 고난 가운데 닥쳐온 죽음을 영광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다시 살아났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신앙인으로서 보다 새롭고 충실한 일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다짐합니다. 또한 나의 신앙 생활은 바로 순교의 길이고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항상 잊지 않고 노력하는 마음의 자세를 다집니다.

 

곧 우리는 예수께서 하시던 대로 올리브 동산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청합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루가 22,42)

 

* 그동안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을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들과 좋은 글을 써주신 필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월간 빛, 2003년 7월호, 강유신 미카엘(대구가톨릭대학교 박물관 학예사, 시복시성위원회 역사분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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