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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허인백 야고보의 삶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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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1-10 ㅣ No.494

대구순교자 20위 시복시성을 준비하며 -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18) 허인백 야고보(1822∼1868)의 삶과 죽음

 

 

순교자 허인백(許仁伯) 야고보는 김종륜(金宗倫) 루가, 이양등(李陽登) 베드로와 함께 1868년 9월 하순(*양력) 울산의 장대벌에서 천주신앙을 증거하고 참수치명(斬首致命)을 당하여 효시(梟示)되었는데, 그 시신은 오늘날 대구광역시 신천동에 위치한 복자성당에 안장되어 있다.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관찬 기록 중 하나인 『일성록(日省錄)』의 무진년 8월 15일자(*음력)에는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 윤선응(尹善應)이 김종륜, 허인백, 이양등 사학죄인(邪學罪人)을 효수경중(梟首警衆 : 죄인의 목을 베어 높이 메달아 둠으로써 군중을 경계함)하였음을 보고해왔다.”〔先斬後啓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경상도에서 서울로 파발을 띄울 경우 대략 5-7일 정도의 시일이 소요되므로, 추측컨대 허인백 등 세 분 순교자는 음력으로 무진년 8월 8일(*양력 1868년 9월 24일) 전후로 순교하여, 그로부터 7일 후인 8월 15일자로 『일성록』에 기록되었던 것 같다.

 

허인백 야고보는 1822년 김해(金海)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본래 중류 계층에 속하였으며 지주로서 생활이 넉넉했다. 아무 것도 부러울 것이 없는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1846년 황사국의 인도를 받아 입교하면서 고난의 세월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1866년 병인박해 초기 포졸들에게 붙잡힌 그는 재물에 어두운 그들에게 돈을 주고 간신히 풀려났다. 식솔을 데리고 길을 떠난 그는 언양(彦陽縣) 간월(*현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 산골에 잠시 머물다 울산에 있는 한 교우촌인 대재공소(*일명 대밭공소, 竹嶺은 현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로 피난해 여기에서 이양등 베드로, 김종륜 루가 등을 만나 함께 순교의 길을 예비하였다.

 

언양의 간월은 간월산과 신불산 밑의 산골 마을로 1801년 신유박해 때 귀양온 강이문(姜彛文)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어 신자촌을 이룬 곳이다. 이곳에는 다블뤼 신부와 최양업 신부가 순회 전교를 하다가 은신하던 죽림골이 있다. 허인백 야고보 등 세 분의 순교자와 그 가족들은 대재에서도 안심할 수 없어서 결국 단석산중 석굴(*일명 범바위굴, 경주군 산내면 소태골)로 피신하여 목기(木器) 만드는 일로 생계를 삼고 연명하였다. 그러다가 세 순교자는 1868년 5월경 경주진영(慶州鎭營)의 영장(營將)이 보낸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 진영의 옥으로 끌려가서 약 3개월 정도 고문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증거하였으며, 1868년 8월 초순 경주에서 약 80리(32km) 떨어진 경상좌병영이 있던 울산의 장대벌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순교하였다.

 

순교 후 이들의 목은 며칠간 군중에게 효시되었고, 효시 기간이 끝나자 순교형장에 있던 허인백 야고보의 부인 박조이(*어떤 기록에는 ‘朴조아’로 나오지만 朴조이의 틀린 표현인 듯하다. ‘조이’는 召史를 이두식으로 읽은 것으로 조선시대 서민층 부인을 일컫던 용어임.)가 걸인들의 힘을 빌어(*어떤 기록에는 단독으로) 형장 부근의 동천강 둑 아래 구덩이에 임시로 매장하였다. 조정의 공식적인 박해가 중단되었던 1886년 한불조약 직후에 조정에서는 동래부사로 하여금 세 분 순교자의 시신을 이장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고, 이에 세 분의 시신은 경주의 진목정 도매산으로 이장되었다. 그러다가 1932년 5월 29일 허인백 야고보의 손자 허명선 안드레아와 김종륜 루가의 손자 김병옥 요한 등에 의하여 대구 월배 감천리 천주교 묘소로 모셨고, 1962년 10월 25일 대구 가톨릭 청년회 주선으로 감천리 묘지 내 성모상 앞의 석함 속에 안장되었다가 1974년 10월 19일 대구 복자성당(병인박해 순교 100주년 기념성당) 구내로 모셔 오늘에 이르고 있다.

 

1868년 5월 경 단석산중 범굴에 은거하던 세 분 순교자에게 경주 진영의 포졸이 닥쳤을 때 허인백 야고보는 목기 만드는 연장을 땅에 놓고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마쳤구나, 오늘에야 세상일을 마쳤구나!”마치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부르실 때 그들이 일하던 배와 그물을 놓아두고 주님을 따르던 복음서의 기록과도 같이 허인백 야고보는 험악한 순교의 길을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알고 기쁘게 응답했던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믿음이었다. 허인백 야고보가 즐겁게 포승을 받았는데도 포졸들은 믿지 못하여 가죽띠로 때려서 손가락이 부러지고 유혈이 낭자하게 되었다. 그러나 허인백 야고보를 비롯한 이양등 베드로, 김종륜 루가 등은 반항이나 원망조차 하지 않았다.

 

허인백 야고보는 출발에 앞서 그의 다섯 자녀(2남 3녀)를 앞에 두고 마지막 유언을 하였다. “너희들 내 말을 잘 들어라. 오늘 이 세상에서 우리 사이에 영영 이별이다. 부디 나 없다고 슬퍼하지 말고 열심히 천주 공경하고, 어머니에게 효도하며, 형제끼리 서로 화목하게 지내면서 성가정을 이루고, 이 다음에 결혼을 하여 자식을 낳거든 천주를 받들어 섬기도록 잘 가르쳐라.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이 얼마나 가슴 뭉클한 감동적인 유언인가?

 

박해시대 신자들의 신앙고백이었던 십계명(十誡命)에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이웃간에 신의를 지켜 위증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허인백 야고보의 가르침은 단순하면서도 비장한 것이었다. 그 자식들이 훗날 모두 열심한 신자로서 생활하게 되었던 것은 모두 이 같은 가장(家長)의 모범적 순교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부모, 자식간에 서글픈 작별을 나누자 당시 포졸들은 매달리며 울부짖는 아이들을 떼어놓으며,“너희들을 보니 너희 아비들을 그만 용서해주고 싶다만 나라 일에는 사정을 둘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이양등 베드로와 김종륜 루가도 마찬가지로 가족들에게 신앙을 권면하고 순교의 길에 나섰다.

 

한편 허인백 야고보의 부인 박조이는 남편을 따라가서 부지런히 옥바라지를 하였는데, 당시 옥의 일반적인 관례는 죄수가 체류비용 일체를 스스로 부담하는 것이었기에 가난한 신자들의 경우에는 옥중에 갇혀 있으면서 굶기가 일쑤였고, 때로는 영양실조나 굶주림으로 옥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서울의 경우, 임금이 백성을 긍휼(矜恤)한다는 상징으로 일 년에 최소한 두 차례씩 특사(特赦)의 형태로 죄수를 석방하거나 죄수들에게 필요한 식량과 의복을 관에서 지급하고 바닥에 짚자리를 새로 깔고 무너진 담 벽을 고쳐주는 등 죄수에 대한 사회복지적 차원의 다양한 조처를 취했지만, 지방에서는 이 같은 조치가 제대로 행해진 것 같지 않다.

 

허인백 야고보 등은 옥중에서 짚신을 삼았고, 허인백 야고보의 부인은 옥 밖에서 구걸 등으로 밥을 얻어다가 옥에 갇힌 남편과 그 동료들에게 갖다 줌으로써 그들이 믿음을 잃지 않고 용감하게 순교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경주 진영에서 울산의 좌병영으로 옮겨갈 때,“오늘 너희들 목숨이 아주 가는 날이다.”라며 위협하는 영장의 말에 대해, 허인백 야고보는“출생 후 제일 반갑고 즐거운 날이 오늘인가 봅니다.”라며 기쁘게 대답하였다. 또한 좌병영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집행을 당하던 날 마지막 술상이 차려지자, 허인백 야고보는 술잔을 부어 마시고 그의 동료들에게도 권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들어간다, 들어간다. 우리 3인 천국으로 들어간다!”

 

무엇이 그렇게 좋아서 이토록 기쁘게 춤을 추면서 형장으로 걸어 나갔을까? 오늘의 우리는 과연 허인백 야고보 순교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죽는 일도 아니고 살아서 하는 교회 일이나 세속 일에 있어서도 약간의 십자가만 지워져도 늘 불평하고 주저하지 않았던가? 그런 우리가 이 좋은 세상 마감하는 순교의 큰 십자가를 용감하고 기쁘게 지고 간 순교자들을 어찌 100분의 1이라도 따라갈 수 있을까? 약간의 돈을 남겨 두었던 허 야고보는 희광이들에게 돈을 쥐어주면서 부탁했다.

 

“우리 머리를 단번에 잘라다오. 그리고 벤 뒤에는 목을 제 자리에 붙여다오. 부활(復活)할 몸이라네.”허인백 야고보에게 순교(殉敎)는 곧 부활(復活)이었다. 그리고 지극한 고통의 순간에 행여 나약해지거나 배교하지 않기 위해 간절히 청했던 것이다. 단칼에 베어달라고.

 

우리도 이들 순교자를 본받아 고통의 순간에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순교자 허인백 야고보의 용기를 주십사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월간 빛, 2003년 5월호, 원재연 하상 바오로(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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