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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7성사ㅣ 준성사

[성체성사] 성체강복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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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0 ㅣ No.72

성체강복(聖體降福 [라] Benedictio Eucharisticae [영] Eucharistic Benediction)이란?

 

 

성체강복은 통상 성체현시(Expositio Eucharisticae), 성체조배(Adoratio Eucharisticae)와 병행하여 거행되며 성체거동과 함께 성체공경 신심의 대표적인 것이며 또한 대표적인 서방교회의 고유전례라고 할 수 있다.

 

 

성체공경의 역사

 

성체에 대한 흠숭과 존경의 표시는 이미 초대교회 때부터 있어왔다. 성찬례에 참석한 신자들은 성체를 집으로 모셔가기도 했고 또 노자성체를 위해 정성껏 보관하기도 하였다(유스띠노 호교론 1,67; 히뽈리또 사도전승 32). 초대교회이래로 성찬례 밖으로 성체를 모셔갈 때 무릎을 꿇거나 부복을 하기도 하였고 이러한 공경의 형식은 오늘날 비잔틴 전례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신자들의 조배를 위해 성체를 일정한 장소에 현시하거나 성체께 올리는 특별한 예식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성체는 눈에 띄지 않는 견고한 장소에 보관되었다. 초창기의 그리스도교 건물은 신자들이 일정한 시간에 예배를 위해 모이는 단순한 용도로 이용되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교회는 점차적으로 신자들이 자신들에게 적당한 시간에 기도하러 오는 장소가 되었고 특히 수도원의 부흥과 더불어 경당은 기도를 위한 공간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 성당의 중심은 제대였고 감실은 성체보존을 위한 실제적이고 단순한 장소로 생각되었다.

 

중세를 거치면서 성체 안의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고 성체의 신비에 대한 새로운 신심이 발흥하면서 성체공경에 대한 신앙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신심(Devotio moderna)은 전례의 쇠퇴에 의해 기인된 것이었다. 서방교회에서의 전례의 쇠퇴는 전례가 라틴어를 고집하여 신자들이 전례언어를 알아듣지 못하게 되었고, 또한 전례가 소수 특권계층을 위한 예절이 되어갈 때 이미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특히 중세의 신심운동의 기초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께로(Ad Patrem per Filium)" 나아가는 것이었고 따라서 그리스도와의 특별한 일치, 그리스도를 본받음의 신심 등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경향 아래서 눈에 보이는 성체 안에 그리스도가 현존하신다는 신앙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체를 특별히 공경하여야할 열의를 마음에 심어주었고 그래서 성체는 이해하기 어려운 언어로 집전되는 미사에서보다는 개인적인 묵상이나 눈으로 볼 수 있는 성체의 현시 등을 통한 미사 밖의 신심행사에서 더욱 큰 흠숭과 공경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성체는 중재자 그리스도의 볼 수 있는 표징이 되었고 천상과 지상을 연결시키는 고리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환자들을 위해 성체를 보관하던 제의방 안의 금고 같은 형태의 감실이 9세기 말엽부터 성당 제단 위로 올라오게 되었다. 이렇게 성체신심이 점차 발전하면서 11세기말경에 클뤼니 수도원 등에서는 감실 앞에서 절을 하는 관습이 생겨났고 더 나아가 감실을 장식하고 그리스도의 현존을 상징하는 등불을 감실 곁에 켜두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성체 신심이 확장되면서 12세기경에는 성체공경을 위한 고유예절이 생겨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성체 공경 신심이 중세 중기를 지나 더욱 발달함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의 감실이 만들어지고 제대 위에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져 노출되었기 때문에 감실과 성체가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는 감실을 잠글 수 있는 장치를 하라고 명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감실은 갈리아, 이탈리아, 독일 등을 거쳐 더욱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는데 특히 독일에서는 성당 제단 앞에 탑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감실을 모셨으며 금속재료와 유리를 함께 사용하여 성체가 보여지게끔 제작하기도 하였고 이는 성광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성체에 대한 다양한 신심행사들도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독일 지방에서는 14세기에 성체 축일(Corpos Domini)에 성체거동을 한 후 성체를 현시해 놓고 성무일도를 드렸으며 미사까지 봉헌하기도 하였다. 1372년 독일 브란덴부르그 주교는 서방교회의 6대 축일(성탄, 부활, 성령강림, 성체축일, 성전봉헌축일, 모든 성인의 날)에 위와 같은 성체 공경을 명하였다. 또한 성녀 도로테아의 삶에 관한 1394년의 기록을 보면 매일 아침 성당에 가서 성광에 모셔져 있는 성체를 바라보며 기도했다는 기록이 있음을 보아 이러한 성체현시의 관습은 연중 다른 날에로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태리와 프랑스 지방에서는 예수가 무덤 속에 계셨던 시간을 상징하여 40시간의 성체조배가 유행하였고 이러한 성체현시와 조배는 16세기에 이르러 성체강복으로 끝을 맺게 되었는데 1600년의 교황 클레멘스8세의 주교예식서(Ceremoniale episcoporum)는 성체축일날 성체거동 후에 지존하신 성체(Tantum ergo)를 부르고 천상양식(Panem de caelo) 후렴 뒤에 강복 기도문(Deus qui nobis)을 바치며 이어서 성광을 들어 강복을 하는 전통형식이 확정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트렌토 공의회 이후 종교개혁자들이 성체의 실체변화에 대해 반대함으로써 가톨릭 교회의 성체신심은 한층 강화되었고 그리스도 현존의 상징이 되는 감실은 더욱 화려하게 장중하게 치장되었으며 성당의 가장 중요한 자리에 감실이 세워지게 되었다. 반 개혁운동이 강했던 이탈리아 밀라노의 경우 교구 내 성당들이 돌아가면서 한 시간씩 성체를 현시하기도 하였다. 이후 바로크 시대를 중심으로 성체 신심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체공경이 활발하게 펼쳐졌고 이와 같이 활발한 성체신심은 19세기 중반까지 교회 안에서 계속되었다. 이러한 성체신심의 지나친 발전은 오히려 영성체를 소홀히 하고 미사의 공동체성과 미사 안에서 실현되는 그리스도의 파스카 제사에 관한 신비신앙을 저하시키는 등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지나치게 남용되는 듯한 경향을 띄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급기야 20세기 전례운동을 통해서 다른 신심행위들과 함께 진지하게 고려되기 시작하였고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교회는 이에 대한 새로운 지침을 발표하게 된다.

 

 

현행 성체강복 예식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체공경과 같은 신심행사가 전례와 조화를 이루고 신자들을 전례에로 인도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선언하였고(전례헌장 13항) 성체신심에 관한 예부성성(훗날의 성사경신성성)의 성체 신비 공경에 관한 훈령 이 1967년 5월 25일 반포되었다. 이 훈령의 제3부에서는 성체신심의 중요성을 확인하면서 반복적으로 미사가 거행되는 성당에서는 적당한 숫자의 신자들이 참석할 수 있다면 1년에 한 번 장엄하게 성체공경을 위한 현시를 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63항). 또한 성체공경과 성체성사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면서 성체신심을 위한 여러 가지 다른 지침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특히 성체성사의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 성체현시 중의 미사 집전을 금지하고 있으며(61항) 이는 새 예식서에서 재차 강조하고 있다. 이 훈령의 내용에 맞추어 1973년에<미사 없는 영성체와 성체 신심 예식서(De Sacra Communione et de Cultu Mysterii Eucharistici extra Missam)>가 출간된다.

 

이 예식서는 우선 총 지침(Praenotanda)에서 미사 없는 성체신심과 미사성제와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는데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시는 생명의 빵이며 빠스카이신 그리스도와의 성령을 통한 일치가 미사성제를 통해 이뤄지므로(1-4항) 성체신심이 영성체를 통해 완결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13-15항). 이 예식서는 미사 없는 영성체와 성체분배 등의 성체신심에 관한 예식서인데  제3장에서 성체현시와 성체강복, 성체행렬, 성체대회 등 미사 밖에서의 성체 공경에 관한 예절을 수록하고 있다. 이 예식서에 따르면 우선 성체강복은 단순히 강복 그 자체만을 위해서 거행해서는 안되며 성체현시 및 조배,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노래를 부르고 기도를 바치며 잠잠한 묵상을 계속하는 절차를 밟아야한다(89항)”고 규정한다. 또한 성체의 현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이기에 성체성사의 의미를 흐리게 할 지나친 장식은 하지 않을 것을 권고하고 있다(82항). 그리고 성체는 성광이나 성합을 이용하여 현시할 수 있고 성체현시를 위한 장식으로는 초(4-6개)를 켜 두며 성체현시 및 강복 시에 성체께 분향을 드릴 수 있다(85항). 이와 같은 성체현시와 함께 성체조배가 거행되는데 이 때 “신자들의 보다 깊은 기도를 도와주기 위해 성경독서와 함께 성체신비를 더 잘 묵상할 수 있도록 해설이나 짧은 훈시를 겸할 것”(95항)을 권고한다. 그리고 성체현시가 길어질 때는 성무일도를 바칠 수 있다(96항). 성체조배를 끝맺을 때 비로소 강복을 위한 분향을 하고 강복 전 기도문인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본기도문, 혹은 예식서의 다른 기도문 중의 하나를 집전자가 바친 후에 성광을 들어 신자들에게 십자표를 그며 성체강복을 하게 된다. 성체강복은 성체를 다시 감실로 옮겨 모심으로 끝맺는다.

 

새 예식서는 전통적인 성체강복 예식을 준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이전의 성체강복 예식서와는 달리 집전자가 위에서 언급한 몇 가지 사항을 준수하면서 비교적 자유롭게 예식을 구성하여 거행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있다. 이 새 예식서에서는 이전과는 달리 성체현시 및 강복의 집전자로 사제뿐만 아니라 부제까지 예절을 거행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있으며 집전 시 복장으로는 장백의와 흰색 영대, 흰색 갑바와 견포를 사용할 것을 지시한다. 또한 만약 사제나 부제가 없거나 또는 있어도 다른 이유로 거동할 수 없다면 시종직을 받은 사람이나 성체분배권을 받은 사람도 성체를 현시하거나 다시 감실로 옮겨 모실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성체강복을 줄 수는 없다.

 

이러한 성체공경의 중요성과 성체보존 및 현시의 규정들은 이 후 성사경신성성의 성체 신비 공경에 관한 1980년 반포된 훈령 에 의해 다시 한 번 언급되었다. 여기서도 이전의 훈령이나 예식서의 지침에서처럼 성체신심과 성체성사의 중요성과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성체신심 예식서의 규정 준수를 상기시키면서 성체의 존엄성에 대한 교육을 강조하고 있으며 미사와 미사 밖의 성체공경에 대해 언급하면서 사목자들이 성체에 대한 올바른 신심을 가지고 신자들을 이끌 것을 권고하고 있다.

 

참고문헌 ▷ 미사 없는 영성체와 성체 신심 예식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7 / Sacra Congregatio Rituum, Instructio Eucharisticum mysterium de cultu mysterii eucharistici, 1967, AAS 59 pp.539-573 / Sacra Congregatio pro Sacramentis et cultu Divino, Instructio Inaestimabile donum de quibusdam normis circa cultum mysterii eucharistici, 1980, AAS 72, pp.331-343(최윤환역, 전례와 생활, 수원가톨릭대학 전례연구소, 1995 pp.235-244)  / R.Cabie, Eucharistie (A.G.Martimort편: L'eglise en priere 2권), Paris:Desclee 1983 (김창훈역: 성체 경배의 역사와 형태, 신학전망 84호:1989, pp.85-93) / S.Mattei, Esposizione del S.mo Sacramento, in EC 5권, pp.613-614 / H.Leclercq, Benediction du Saint Sacrament, in DACL V-1권, pp.345-349

 

[인천가톨릭대학교 홈페이지에서, 이완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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