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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김세박 암브로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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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1-10 ㅣ No.493

대구순교자 20위 시복시성을 준비하며 -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17) 김세박(金世博) 암브로시오(1761-1828)

 

 

순교자 김세박 암브로시오는 정해박해(1827년)때 순교한 신자 중에 박경화(보록) 바오로에 이어서 두 번째로 나이 많은 분으로, 한국교회 창립 때 크게 활동하다가 1785년 을사추조적발 사건 때 경상도 밀양 단장으로 귀양가서 한국교회 최초로 순교한 김범우 토마스의 먼 친척 형제이다. 또한 그는 열심한 신앙과 청빈, 정결의 덕행으로 모든 신자들에게 크게 존경을 받았는데,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울의 역관(譯官) 가정에서 태어난 김세박 암브로시오의 관명은 언우이고, 초명은 군미인 것 같다. 그런데 그의 집안의 가계를 보면 조부 갑령(甲齡)과 부친 득서(得瑞)가 모두 중인(中人) 역관 벼슬을 한 집안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비록 역관(譯官) 벼슬을 하지는 않았지만 중국어에 능통했을 것이고, 또한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집안이 천주교를 믿기 시작한 것은 1784년 한국교회 창립 때 이벽의 권고로 먼 친척 형제인 김범우 토마스가 천주교에 입교하여, 친지들과 친척들을 많이 권면, 천주교에 입교시킬 때 그 역시도 김범우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열심한 신앙생활을 시작한 것 같다.

 

그러나 그의 부인과 자녀들은 그의 말을 듣지않고 그를 따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천만가지로 귀찮게 굴면서 신앙을 버리고 다시 미신 행위로 돌아오게 하려고 했다. 특히 그의 부인은 성격이 포악하고 앙칼져서 그를 한시도 가만 두지 않았다. 그 중에도 그가 금식을 하고 음식을 가려 먹는 대·소재를 지키지 못하도록 큰 소리로 천주교를 욕하면서 방해하였다. 김세박 암브로시오는 하도 귀찮게 구는 데 지쳐서 집을 뛰쳐나오기로 작정을 하였다. 그리하여 1791년 신해박해 후 가족들과 하직을 하고, 시골로 내려가서 신자 집들을 이 집 저 집 찾아다니면서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또 성서를 베껴 나누어 주며 어렵게 생계를 꾸려갔다.

 

그 후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서 비밀리에 전교를 하자, 그는 주 신부를 만나 뵙고 얼마간 함께 모시고 다니면서 전교를 하며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는 동안 그의 신앙심은 더욱 깊어갔고 신앙의 덕행을 쌓아갔다. 일정하게 거처할 집이 없었던 그는 가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서 조용히 신심수련도 하였다. 특히 어린이들에게 교리 가르치기를 좋아하여 아이들에게 교리를 잘 가르쳐 주고 그들이 덕행의 길로 나아가도록 지도하였다. 무엇보다 그의 가르침은 말보다는 항상 덕행의 모범이 되었다. 또한 그는 아무리 혹독한 추운 겨울동안에도 매일 밤중에 일어나서 기도를 바쳤으며, 식생활도 극도로 절제하여 매일 밥상에 나오는 반찬이 맛이 있건 없건 항상 자기가 정한 양을 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하나의 규칙으로 지켰다. 따라서 그가 어디에 가든 신자들은 그를 존경하고, 그가 신자촌을 방문할 때마다 신자들의 열성은 새로워져 그를 선생님으로 존경하였다.

 

한편 그는 1801년 신유박해를 무사히 넘기고, 1815년 을해박해 때도 체포될 뻔했으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렇지만 1827년 정해박해 때는 사정이 달랐다. 그해 2월 처음 전라도 곡성고을 덕실 옹기굴에서 시작된 박해는 차츰 전라도 지방의 곡성, 장성, 순창, 임실, 용담, 금산, 고산, 전주 고을로 번져서 마침내 전라도 전역에서 240여 명이 체포되었으며, 4월 이후에는 경상도와 충청도까지 번졌다. 이렇게 하여 피신했던 주위의 많은 신자들이 매일 몇 명씩 체포되었고, 그가 머물고 있던 집주인도 외교인 집에 숨어버렸다. 그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자수하기로 결심하고서 5월에 안동진영으로 가서 자수하였다. 그는 그가 가지고 있던 조그마한 보따리를 옥사가 있는 곳에 내려놓고서 영장에게 가려고 했다. 그러나 문지기가 못 들어가게 하자, 그는 “나는 천주교인이요, 영장에게 가서 내가 여기 있다고 이르시오.”라고 말했다. 포졸들은 그를 미친 사람으로 알고서 저리 비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나는 미친놈이 아니고 천주교인이란 말이요.”하고 외쳤다.

 

하는 수 없이 포졸들은 영장에게 알렸고, 영장은 그를 불러다가 심문했다. 먼저 영장은 그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앙은 고백했지만, 그가 살고 있는 마을과 자신의 서적을 어디에 숨겼는지에 대해서는 일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영장은 그의 다리에 심한 매질을 하고서 감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한 달 후, 대구의 경상감영으로 이송하였다. 그곳에는 절친한 천주교인 친구들과 다른 증거자들이 진작부터 갇혀 있었다. 그는 경상감사 앞에 불려나가서 곤장을 세 차례 무지막지하게 맞고 여러 가지 심한 고문을 당했으나 백절불굴의 인내심으로 참았다. 이리하여 그는 이재행 안드레아와 같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 당시 나라의 기록인 {일성록} 1827년 6월 16일 형조의 보고에 의하면 “김세박, 이재행 등은 한 마음으로 강습하여 한사코 뉘우치지 않고, 설득하여도 끝내 돌이켜 뉘우치지 않으며 형벌을 당해도 반성하고 두려움이 없습니다. 동당에 대해서는 성명을 감추고 사서에 대해서는 태워 없앴다고 하며 흉악하고 교활함이 가장 심합니다. 박보록 등에게 시행하려 했던 형을 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죄수에 대해서는 관찰사에 분부하여 관례에 따라 결안을 받아 보고한 후에 처리하게 하소서.”라고 했다. 이 같은 형조의 보고에 따라 임금은 김세박과 이재행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침 그 무렵에 그 지방에서 이름난 스님 한 분이 대구 부근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불심이 지극하여 손가락 네 개를 살라 바쳤다. 한편 영장은 어느 종교가 참된 것인지 가리기 위해서 이 스님과 감옥에 갇힌 천주교 신자 중에 제일 나이가 많고 지도자인 박경화 바오로와 교리 공개토론을 시켰다. 처음 이 소식을 들은 천주교 신자들은 무척 걱정했으나, 정작 박경화 바오로는 “나와 같이 무식한 사람이 내 힘만 가지고서야 어떻게 그 중을 당해낼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천주와 성모의 도우심만 믿으면 두려울 것이 무엇이며 무엇 때문에 걱정을 합니까? 나를 위해 기도를 열심히 해 주시오.”라고 했다. 마침내 박경화 바오로가 영장 앞에 나가서 그 스님과 공개토론을 벌였는데, 하느님의 섭리로 그 스님은 한 마디의 대꾸도 못하게 말문을 막아버렸다.

 

그 후부터 경상감영에서는 그 이상 신자들을 체포하여 잡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모든 감옥에 갇힌 신자들을 석방시킬 생각까지 하였다. 감옥에 갇힌 신자들을 한 사람씩 다시 영장 앞에 불러내 심문을 받아 어떤 사람은 석방을 시키고, 더러는 귀양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때 석방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국에서는 증명서 한 장씩을 써 주었다. 대구 감옥에서는 배교하기를 거부하고 열심히 신앙을 증거하는 6명의 신자만이 남게 되었다. 남은 이들은 모두 백절불굴의 결심을 하고 자신들의 사형 집행이 언제 되는지 간절히 기다리면서, 생계를 위해 감옥 안에서 짚신을 삼았다. 그 후 감사가 이동되어 새 감사가 부임하자, 새 감사는 감옥에 있는 신자들을 다시 불러내어 간단한 심문 후에 심한 매질을 하였다. 이때 71세의 연로한 박경화 바오로는 기운이 쇠잔해져서 마침내 숨을 거두니, 때는 1827년 9월 27일이었다.

 

박경화 바오로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후, 김세박 암브로시오는 자신의 나이가 연로한 데다 전혀 경험이 없어서 짚신을 삼지 못하자, 대구의 경상감영에서는 이런 노동력이 없는 죄인들의 생계를 위해서 감영 주위의 주민들에게 돈을 모금하여 그 돈으로 양식을 장만하도록 명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김세박은 큰 충격을 받고, 일평생을 자기를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큰 부담이 되는 것을 크게 후회하였다. 결국 그는 모든 음식을 전폐하기로 마음먹고, 얼마동안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았다. 그러자 신자들은 “선생님, 선생님이 아무 것도 아니 잡수시니, 저희들도 모두 그렇게 똑같이 할까요?”하고 물었다. 그는 그들을 크게 책망하면서 “나는 이렇게 (단식)할 이유가 있지만,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당신들이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자살행위입니다.”하고 말렸다.

 

다른 신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김세박 암브로시오는 오랫동안 단식을 하다가 조금씩 음식을 먹기 시작하였고, 그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때는 1828년 10월 27일이며, 그의 나이 68세였다. 당시 신자들은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을 대단히 아깝게 생각했으며, 그분의 거룩한 생활과 영광스러운 죽음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를 더욱 존경하였다고 한다.

 

[월간 빛, 2003년 4월호, 마백락 클레멘스(영남교회사연구소 부소장, 시복시성위원회 역사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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