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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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안군심 리카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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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1-10 ㅣ No.492

대구순교자 23위 시복시성을 준비하며 -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16) 안군심 리카르도(? ~ 1835)

 

 

달레에 의하면 안군심 리카르도는 충남 보령 고을 사람으로 명랑한 얼굴에 성격이 겸손하고 친절하였다. 청년시절에 천주교에 입교하여 보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하여 고향을 떠났다.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그가 자녀들의 교육을 정성 들여 하는 것과 남에게 대하여 너그러운 애덕을 가지고 있음을 탄복하였다. 기도와 묵상에 부지런하여 그것을 궐하는 일이 결코 없었으며, 보통 1주일에 세 번씩 대재를 지켰다. 그는 자기와 집안 식구들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성교(聖敎)의 서적을 베끼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책의 내용을 교우는 물론 외교인들에게까지 설명하여 주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연대는 미상이나 안군심 리카르도는 관헌에게 체포되어 “네가 사술(邪術)을 행한다는 말이 참말이냐?”고 묻는 말에, “저는 절대로 사술을 알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않습니다.”하고 대답하니 더 묻지 않고 석방시켰다. 물론 그는 자신의 대답이 한편으로는 정당하였지만, 한편으로는 항상 자신이 더 명확하게 답변하지 못하였던 것과 용기가 부족하였던 점들을 후회하였다고 전해진다.

 

1827년 안군심 리카르도는 자기 손으로 베낀 많은 책으로 인하여 반드시 혐의를 받으리라는 것을 깨닫고, 우리 주 예수께서도 여러 번 적들을 피하신 일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고 얼마동안 숨어 있으며 열심을 배가하여 싸울 준비를 하였다. 하지만 끝내 상주 포졸들이 그를 찾아내어 읍내로 압송하였다. 관장이 “네가 천주교를 믿는다는 것이 참말이냐?”고 묻는 말에 그는 “참말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천주교 교리를 설명해 보라.”하는 말에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하고 명료하게 천주교의 교리를 설명하였다. 이에 대해 관장은 그 내용이 훌륭하다는 것을 인정하였지만, 국법에서 금하는 천주교를 신봉하는 것은 상감에 불충하는 것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천주는 우주의 대왕이시오, 모든 인류의 아버지이니 우리는 그 분을 만물 위에 공경하는 것입니다. 임금님과 관장님들과 부모님들은 천주 다음으로 공경해야 합니다.”라고 답하여, 불변하는 진리를 신봉하는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천주를 배반하고 동료들을 고발하라는 관장의 명령을 일언지하에 거절한 안군심 리카르도를 관장은 여러 날 고문하여 굴복시키려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를 경상감영으로 이송하였다.

 

경상감영에 와서도 그의 자세는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신앙에 대한 그의 열정은 오히려 더 강렬하였다. 안군심 리카르도를 취조했던 경상감사 이학수는 장계에서 박보록 및 안군심 등을 사형에 처할 수 있게 해 주십사고 주청하였고, 형조에서도 경상감사와 같은 뜻으로 주청하니 왕이 윤허하였다고 1827년 6월 7일자 『일성록』에 기록되어 있다.

 

다블뤼 주교는 그의 비망록에서 안군심 리카르도는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갇힌 지 9년째 되는 1835년에 이질에 걸려 사망하였다고 전한다.

 

안군심 리카르도는 청년시절에 천주교에 입교하였고, 보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하여 고향을 떠났다고 한다. 이는 박해가 시작되면서 신자들은 전통의 사회질서에 대한 도전자요 파괴자로 인식되었고, 따라서 비밀리에 신앙집단을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박해가 가혹해지면서 비밀집단들은 배교자나 이웃에 의해 밀고되었고, 포졸들에 의해 신자들이 체포되면서 집단자체가 와해되어, 고향을 떠나 다른 지방으로 유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일반 동네사람들과 함께 살 경우 박해의 위험성도 있었지만 필경 부락에서 행하는 많은 미신행위나 부락제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오로지 신앙생활만을 좀더 자유롭게 영위하기 위하여 외인들의 눈을 피해 굶어 죽을 위험한 지경에까지 놓이고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까지 신앙생활을 하려고 결심하였던 것이다. 안군심 리카르도 역시 삼구(三仇 : 마귀, 육신, 세속)를 끊어버리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자유롭고 항구한 신앙생활을 위하여 고향을 떠났던 것이다.

 

특히 안군심 리카르도는 자녀의 신앙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정성을 들였다고 하는데,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은 물론이고 교회에서의 신앙교육마저도 현세적 가치와 학부모들의 지나친 교육열에 밀려 소홀히 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당시 순교자들의 공통된 모습을 살펴보면 오직 애긍에 힘쓰고, 기도와 성서 읽기, 그 밖의 신자본분을 지키는데 부지런하였고, 대군대부(大君大父)인 하느님을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공경하였으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당시 교우촌의 생활 속에서 피어난 것이 공동체정신이었다. 교우촌에서는 과거의 신분이나 재산, 학문을 내세우지 않았으며, 생업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협조하여야만 했다. 가난한 이웃을 위해 함께 나누며, 죽을 위험이나 굶주림에 직면해 있는 사람을 보면 대세를 주거나 자신의 음식을 나누어주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도는 중요한 일과였으며 내적신심의 근본이었다.

 

그들은 아침·저녁으로 기도드리는 것을 배웠고, 삼종경이나 묵주신공을 일상생활처럼 생각하였다. 또 신앙보존과 전파의 수단으로 교회서적을 목숨보다 소중하게 생각하였다. 한역서학서를 한글로 번역하여 옮겨 적고, 이것을 돌려보면서 천주교 교리를 이해하고 이 책들을 바탕으로 신앙을 전할 수 있었다. 그 중 기도서나 신심묵상서가 절대다수를 차지하여 신심과 기도생활을 중심으로 신앙을 영위해갔음을 알 수 있다.

 

긴 옥중생활에서 낮에는 짚신을 짜고 밤에는 등불아래서 성경을 낭송하였던 것은 바로 교우촌 생활의 연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월간 빛, 2003년 3월호, 이경규 안드레아(대구가톨릭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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