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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박경화 바오로 - 산중의 포교자에서 감옥의 증거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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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1-10 ㅣ No.491

대구순교자 23위 시복시성을 준비하며 -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15) 산중의 포교자에서 감옥의 증거자로 - 박경화 바오로(1756-1827)

 

 

바오로는 1756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33세가 되는 1792년 무렵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인생의 행로를 바꾸게 되는 계기를 맞이하였다. 그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당시로써는 양반 가문의 후예로서 모든 기득권을 버리지 않으면 안될 길을 선택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1794년 홍주 지방에 박해의 회오리바람이 불어닥쳤을 때 박경화 바오로는 관가에 잡혀가서 고문과 회유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배교하고 풀려난 적이 있었다. 그는 그후부터 하느님을 배반한 데 대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살아있으되 죽음 못지 않은 고통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비록 한순간의 유혹을 떨치지는 못하였으나 그 보속으로 그때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롯이 천주를 섬기는 삶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가 고향을 떠나 새로운 삶의 길을 개척한 곳은 지명이 알려져 있지 않은 어느 산골 마을이었다. 그곳에서 한동안 그는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에게 봉헌하며 포교자로서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산중 생활 시기에 주문모 신부로부터 성세성사를 받을 때 그는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로서의 삶을 살겠다는 의지로 바오로라는 영명을 취하고, 그 이름에 걸맞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의 의지는 가정에서는 자녀들에 대한 철저한 종교교육에서 실천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천주교의 진리를 이웃에 전파하는 데 열성을 다함으로써 실천되었음이 전해진다. 이러한 생활을 가능하게 한 것은 무엇보다 박경화 바오로는 세속적 근심에서 벗어나서 규칙적으로 기도와 묵상에 몰두하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모든 곳에 존재하는 하느님을 실존적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었다. 말씀의 진리를 터득한 그에게 있어서 고향에 두고 온 재산과 지위, 그 모든 것은 잠시 지나가는 여행길에 스쳐지나가는 바람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육체적 고통과 굶주림을 영혼의 갈증에 비하면 일시적인 것으로 여길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신유대박해의 광풍이 지나고 박해의 회오리바람이 경상도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모두 목도하였던 박경화 바오로로서는 고난의 순간은 언제라도 재발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배교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내심 다짐하고 있었으나, 가능한 한 몸을 피하여 복음의 씨앗을 조금이라도 더 뿌리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1827년 전라도에서 박해가 일어났었을 때 그는 가족을 거느리고 상주 멍에목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박해의 손길이 상주에까지 뻗쳤던 1827년 4월 그믐, 예수 승천 대축일에 미사첨례 현장에서 박경화 바오로는 아들 박사의 안드레아와 함께 체포되었다. 이미 칠순에 접어든 그로서는 그의 인생 여정이 마감될 날이 머지 않았음을 직감하였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순간이나마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데 전력을 다할 것을 다짐하였던 그는 기쁜 마음으로 포승을 받고 함께 체포된 교우들을 위로하며 상주에서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는 모진 고문이 이어지는 감옥 생활과 오랜 산중 생활에서 기도와 묵상 가운데 체득하였던 믿음의 진리를 증거해 보이게 된다. 칠순 노령에도 불구하고 육체적 고통과 인격적 모욕을 견뎌내는 박 바오로를 지켜보던 형리들이나 영장의 놀라움은 컸고, 도저히 그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을 간파하고는 당시의 법 절차에 따라 감사가 주재하고 있는 대구의 감영으로 이송시키게 된다. 이리하여 을해박해 이후 또 한 차례 복음의 향기가 대구에 전해지게 되었다. 하느님의 아들이 초라한 마구간에 내림(來臨)하셨듯이, 당시의 기준으로서는 고통 중에 있는 중죄인의 육신을 빌어 대구 지역에 복음이 도래한 것이었다.

 

대구에 와서도 박경화 바오로의 믿음은 변함없이 지켜졌고 결국은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다.(『일성록』순조 정해년 6월 7일 참조) 사형 선고를 받은 후 형이 집행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감옥 생활을 하면서 박 바오로는 천주교를 박해하고 비방하는 자들에게 강력한 증거자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취조받을 때 보여주었던 위엄있는 자세와 불교 승려와의 교리 토론장에서 보여준 교리에 대한 깊은 지식은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가진 신앙이 단지 추상적인 공론이 아니라 심오한 철학이며 실천적 윤리로써 그의 기품있는 성품을 가능케 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 토론장에 있었던 포졸들은 천주교가 정녕 참 교(敎)임을 알겠다고 실토하였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말하자면 박 바오로는 고난에 처해서 평소에 믿던 바를 실제로 증거해 보임으로써 신앙의 불모지였던 대구 지역에 증거자로서 그 자취를 남겼던 것이다.

 

박경화 바오로는 노령에 지나친 고문과 감옥 생활의 궁핍함이 겹쳐져서 1827년 9월 27일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병사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는다는 사실에 행복해 하였다고 한다. 이 세상의 삶이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목의 여정(旅程)이라는 교회의 가르침을 그는 실천적으로 증거해 보인 것이다.

 

[월간빛, 2003년 2월호, 백경옥 레베카(대구가톨릭대학교 인문학부 사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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